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3
13====================
2. 각인의 집행자
춥다. 추적자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갑옷을 벗었더니 쌀쌀한 바람에 드러난 팔과 다리에 오소소 닭살이 돋는다.
새삼 벗어서 땅에 묻어버린 갑옷이 아깝게 느껴진다. 냄새가 좀 나고 몸이 근질거리긴 했어도 안쪽에 털가죽을 대서 나름 따뜻했기 때문이다. 인벤토리라도 있었다면 일단 보관했다가 고쳐서 쓰든 했을 텐데.
춥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슬슬 배도 고파진다. 이쯤 되면 지금의 상황이 게임을 빙자한 또 다른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실이었다면 욕지기가 터지고 트라우마가 되었을 법한 광경을 눈으로 보고도 끄떡없지 않은가. 게다가 경황이 없었다고는 해도 몇 사람이나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렸다. 사람 따위 죽여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정신이상자라면 모를까, 역시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상황임에 틀림없다.
아닌가. 미처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의 본성이 그랬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손으로 남녀를 꼬치 꿰듯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도 너무나 무감동하게 느껴지니 오히려 불안할 정도다. 이대로 정말 좋은 건가 싶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소한 쾌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정도. 짜릿한 통쾌함 같은 걸 느꼈다면 그야말로 빼박이었을 텐데, 최소한 그건 아니니 다행이랄까. 그래봐야 정상이 아니란 건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언덕 하나를 넘자 비로소 작은 시가지 하나가 등장한다. 아마도 교차로에 위치한 역참 주위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을이 아닐까 싶긴 한데, 그런 세세한 설정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지와. 어째서 자신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대한 것뿐이다.
이런 거지꼴로 돌아다니면 역시 눈에 띄지 않을까 싶어서 옷이라도 훔쳐볼까 싶었다. 이런 점에서는 역시 사냥개 코장식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든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이라도 알 수 있다는 점은 그것만으로 확실히 사기스러운 일이니까. 다만 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생각보다 유효 범위가 좁다는 정도랄까. 강화 단계가 좀 올라가면 범위가 확장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적당히 주위를 살피다가 근처 민가에 널려 있는 옷 한 벌을 훔쳤다. 값을 치르고 싶어도 지니고 있는 것이 동전 몇 개 뿐이라 일단 그것만이라도 내려놓고 나왔다. 이로써 빈털터리가 되긴 했지만 조금 있으면 보상을 받을 테니 그 정도쯤이야 그냥 투자한 셈 치기로 했다.
남들이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갖추자, 비로소 형진은 언능 오라고 재촉하듯 아래쪽을 콕콕 찍어대고 있는 화살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고 보니 로드넥이라고 대충 쓴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라…”
뭔가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이상한 글자인데도 바로 의미를 이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기야… 말도 통하는 마당에 이상한 일은 아닌가.
태연을 가장한 채 안으로 들어선다. 아직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기 전인지 사람이 별로 없다. 이곳에서 빨간코를 찾으라고… 저기 있군.
어두컴컴한 중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그스름한 코를 지닌 주정뱅이 하나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낮술을 들이켜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왔군. 이리 와서 앉아.”
“…”
일단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빨간코의 중년 사내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워서 형진에게 건넸다.
“일단 목이 마를 테니 한잔 쭉 들이키게.”
“그보다… 보상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데.”
“쯧. 독이라도 탔을까봐 그러나. 뭐 그 정도 조심성이 있으면 내가 따로 주의를 줄 필요는 없겠지만.”
“…”
“손을 내밀어 보게. 손바닥 말고, 손등.”
형진이 손등을 내밀자, 주정뱅이는 자신의 손등을 그곳에 가져다 댔다.
“맡겨 두신 것을 이제야 넘겨 드립니다. 형제여.”
“…”
형진에게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무슨 주문이나 기도문의 일종인 듯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형진은 손등에 뭔가 짜릿한 통증이 전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끌어 당겼다.
“놀라긴. 어쨌든 시련을 무사히 통과한 것을 축하하네. 그나저나, 혼자 온걸 보니 가트는 역시 죽은 건가.”
“…”
손등에 뭔 짓을 한 건가 싶어 살펴보던 형진은, 느닷없이 가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이지. 우리들을 그저 사람 죽이는 백정 정도로 생각한다고나 할까. 가트 그 놈은 처음부터 글러먹었어. 시련에 참가하도록 허락하신 것 자체만으로도 놈은 충분히 자비로운 은혜를 입은 셈이지. 그나마도 시련에서 살아남지 못한 걸 보면, 뭔가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한 거겠지만. 다 신의 뜻이니 그렇게 이해하게.”
“…”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형진이 무언가를 되묻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 우르르 메시지들이 뜨기 시작한다.
[임무가 완료되었습니다] -가트는 약속한 대로 단검과 열쇠를 넣어주었다. 일단 족쇄를 풀고 감옥을 벗어나자. (완료!)-양동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안채로 진입하자. (완료!)
-요새로부터의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약 십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지원군이 도착하면 양동을 위해 움직였던 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그 전에 목표를 처리해야만 한다. (완료!)
-목표를 무사히 처리했다. 하지만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 남았다. (완료!)
-축하한다. 이제는 보상을 받는 일만 남았다. 주점 로드넥에 있는 빨간코를 찾아가면 된다. (완료) [축하합니다!] -‘암살신의 성도’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공포의 낙인’이 부여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각인의 집행자’ 전직이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인벤토리’를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팩션 공헌도’가 10 증가하였습니다.
갑자기 마구 떠오르는 메시지에 형진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임무 메시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직이라니… 설마 그가 방금까지 수행했던 임무들이 단순히 튜토리얼 같은 것이 아니라 전직 퀘스트 였단 말인가.
얼떨결에 이상한 곳에 떨어진 것도 황당한데, 시작하자마자 직업이 강제로 정해졌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게다가 암살신의 성도 어쩌구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암살자 계열인가 본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암살자라고는 해도 우리는 엄연히 제국의 인가를 받은 합법적인 단체일세. 세금도 확실하게 내고 있는 훌륭한 납세자이지. 방금 전해준 공포의 낙인은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지만, 훌륭한 성도라면 그것에 관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명예로운 일임을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자, 이제는 내 잔을 받을 수 있겠지? 형제여.”
“…”
형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잔을 받았다. 뭔가 단순한 암살자라기보다는 성직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암살자인 건 맞는데 제국으로부터 승인 받은 합법적인 단체라는 건 또 뭔지. 뭔가 자신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암살자와는 다른 느낌이다.
“크으…”
일단 잔을 받자 씁씁한 느낌이 입안으로 화악 퍼진다. 술은 역시 쓰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마셨던 포장마차의 일이 다시 떠오른다.
형진이 잔을 비우자 주정뱅이는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건네준 것을 잘 살펴보면 열쇠가 하나 있네. 본래 내가 머물던 곳의 열쇠지. 이제 나는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자네가 갖도록 하게.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과 성도로서 지켜야 할 것 또한 정리해 두었으니 시간 날 때마다 읽어두면 좋겠군.”
그렇게 말을 늘어놓은 주정뱅이는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쭈욱 들이키고는 가벼운 탄식과 함께 형진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럼, 자네에게 낙인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빌겠네. 난 이만 떠날 때가 된 듯 하군.”
“…”
빨간코의 주정뱅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휘적휘적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얼핏 보면 얼큰하게 취해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주정뱅이인 듯 하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무거운 짐을 훨훨 털어버린 것 같은 그런 홀가분한 뒷모습이다.
뭔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주정뱅이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형진은 주정뱅이의 뒷모습이 주점 밖으로 사라지자 화들짝 놀라 뒤를 쫓았다. 하지만 곧바로 뛰쳐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주정뱅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해서 사냥개의 코장식으로 확인해 봤지만, 자취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승천이라도 한 것처럼.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다시 주점 안으로 들어온 그는 남은 술병과 음식을 마저 먹으며 건네받은 것들을 확인했다.
[공포의 낙인] -이것은 암살신의 성도임을 증명하는 표식이다.-사용자는 강건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지니게 되며, 각종 정신공격에 대한 저항 능력 또한 부여받을 수 있다.
-팩션 공헌도가 높아질수록, 낙인의 효과가 증가한다.
-팩션 공헌도와 계급에 따라 추가 효과가 발생한다.
-현재 효과: 강건한 정신, 불굴의 의지, 정신 공격 저항 증가.
-현재 팩션 공헌도: 10
-현재 팩션 계급: 하급 성도.
각인의 집행자에 관한 정보는 따로 없었지만, 손등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낙인을 활성화하자 이런 내용이 형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팩션이 파벌이나 분파, 당파 등을 뜻하는 말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또한 자신이 어떠한 단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인벤토리] -인벤토리는 최초 10개의 공간이 제공됩니다.-같은 종류의 물품은 하나의 공간에 겹쳐서 보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벤토리 전체의 최대 무게 한도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화폐는 인벤토리의 최대 무게 한도의 제한에서 제외됩니다.
-화폐는 인벤토리의 여유 공간과 상관없이 보관이 가능합니다.
-현재 보관된 물품: [암살신의 성도가 알아야 할 것], [각인의 집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허름한 열쇠] -현재 무게: 1/100
-현재 보유한 화폐: 바이겔 기념 금화 1개, 이넬 은화 11개, 에데루스 은화 23개, 돌란 동화 237개, 반트 동화 17개, 가스트 주화 2707개.
인벤토리 안에는 주정뱅이가 말한 대로 책 두 권과 열쇠 하나, 그리고 상당히 많은 양의 돈이 들어있었다. 다만 저마다 화폐의 이름이 제각각인걸 보면, 게임 안에서처럼 단순히 금은동의 화폐 산식이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형진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주정뱅이가 넘겨준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든 뭘 하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급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손바닥을 내민다. 아마도 주정뱅이가 값을 치르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지닌 것 전부를 자신에게 넘기고 가버린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얼만데?”
“다섯 개요. 다섯 개 더 얹어주면 서비스로 키스를 얹어 드릴게요.”
“…”
돈 냄새를 맡은 것인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나름 유혹을 하기는 하는데,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다. 인벤토리에서 주화 다섯 개를 꺼내주자, 여급은 혀를 차더니 냉큼 돈을 받아들고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움직인다.
주점을 나와 열쇠를 집어 들자, 이전에 임무 중에 목표를 알려주었던 것처럼 시가지 한켠에 화살표가 나타난다. 위치를 확인한 형진은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고 보니, 그곳은 허름한 오두막집이었다. 제대로 관리를 안했는지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 차라리 여관 같은 곳을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녹이 잔뜩 슨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먼지 냄새가 확 하고 풍겨진다. 젠장. 도대체 청소를 언제 한 건지 원.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다음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부의 공기가 쾌적하게 변하자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 앉아 인벤토리 안에 들어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암살신의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책이었다. 두꺼운 양피지를 사용한 탓인지 페이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활자로 인쇄된 것도 아니고, 마치 메모를 적듯이 하나 하나 손수 글자를 적은 것이 일종의 수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