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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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인의 집행자
책에는 암살신에 관한 신앙의 유래와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어져 내려왔는지 간단히 기술되어 있었다.
이들이 신앙하는 것은 공포와 죽음의 신.
다만 이 공포나 죽음이라는 것은 징벌로서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죄라는 이름의 가치에 대한 가책과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이 곧 공포이며, 죽음은 이러한 공포를 해소하는 가장 빠르고 적절한 수단으로 정의되어 있는 것이다.
즉, 암살이란 일반적으로 죄를 집행하기 어려운 사안이나 인물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의뢰가 들어온다고 그것을 수행하지도 않을뿐더러, 명예롭지 않은 의뢰를 한 자는 오히려 암살신의 노여움을 받아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죽음에 이른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 있어 암살은 신앙을 표현하는 한 가지 수단이었고, 제국에서 이들을 합법적인 단체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실제로 제국 스스로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해 이들 암살신의 성도에게 집행을 의뢰하는 경우도 많았다. 죄는 지었으되 역사에 죄인으로 처벌되었다고 기록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스스로의 이름으로 의뢰를 거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물론 각인의 집행자에게 의뢰가 전해지더라도 모든 이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법에 의한 집행이 아니기에, 신앙이 다르고 의지가 다른 이들은 그것에 저항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러한 저항이 성공하여 집행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또한 신이 죄 없음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각인의 집행자가 아닌 다른 자가 행하는 암살까지 합법으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경우엔 각인의 집행자나 그들이 신봉하는 공포와 죽음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임무가 오면 열심히 하라는 소린가. 성공이든 실패든 결국은 신의 뜻이니.”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한 내용이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결국 이런 의미도 된다. 결국 암살신의 성도는 공포와 죽음의 신이 그 의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온 그로서는 얼핏 이해되지 않는 구석도 많다. 무엇보다도 법 위에 존재하는 신앙이라는 측면이 좀처럼 납득되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이 세계의 특이성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문제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기괴한 신앙의 성도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점.
역시 의심이 되는 것은 포장마차에서 만났던 그 사람 좋아 보이던 놈과의 대화 정도다.
-바보 같은 회사입니다. 이런 능력이라면 달리 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혹시 당신의 그 재능, 저에게 맡겨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환영합니다. 이제 당신도 타…
좋게 말하면 헤드헌팅이고, 나쁘게 말하면 영문도 모른 채 새우 잡이 배에 끌려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헤드헌팅을 당했다가 정말로 머리를 잘리게 생겼으니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할.
“심신미약 상태에서의 계약은 원천 무효란 말이다!”
물론 이렇게 소리를 질러본 들 대답이 돌아 올 리 없다. 이미 계약은 성립이 되었고, 달리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공연히 방 안에 남아있는 집기에 화풀이를 해대다가, 겨우 진정하고 다시 남은 내용을 읽던 그는 책 말미에 씌어진 한 구절을 보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각인의 집행자로서 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공포와 죽음의 명예를 드높인 자는, 이곳 타나토스를 벗어나 엘리시온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형제여, 그대에게도 행운이 함께 하기를.
엘리시온.
그것은 이 모든 사단의 시발점이 된 게임 이름이다. 또한 엘리시온과 타나토스는 특정 신화로부터 천국과 지옥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좀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식의 대척점에 있는 관계라고나 할까.
어쩌면 단순한 은유일 수도 있다. 현세를 지옥이라 칭하고 그 끝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신앙은 달리 특정한 어느 한 종교를 콕 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종교에서 명시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채택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엘리시온이나 타나토스라는 말이 이렇게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 자체가 너무 공교롭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좋게 생긴 사기꾼 자식이 마지막에 했던 말도 혹시 타나토스가 아니었을까. 이제 당신도 타나토스의 일원이 되었다… 라는 식으로.
젠장.
어쨌든 이 마지막 문장대로라면, 각인의 집행자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경우 이곳을 벗어나 엘리시온으로 갈 수 있다. 문제는 그 엘리시온이 형진이 알고 있는 그 게임을 말하는 것인지, 그 게임이 존재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 그러나 일단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방향성 만큼은 찾아낸 셈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책과 집을 넘겨준 주정뱅이가 사라진 것도 엘리시온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각인의 집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하나, 웬만하면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드러내지 말라.하나, 어지간하면 성도임을 스스로 밝히지 말라.
하나, 심심하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지 말라.
하나, 가급적이면 강하고 현명한 자를 먼저 죽여라.
하나, 될 수 있으면 임무는 성실히 수행하라.
하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형제를 해하지 말라.
하나, 정말 곤란한 상황이 아니라면 형제의 것을 탐하지 말라.
하나, 기왕이면 이상의 계율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다.
하나, 명예를 소중히 하라.
하나, 네 죽음을 무겁게 여겨라.
“…”
책에 적혀 있는 것은 이 내용이 전부였다.
게다가 계율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뭔가 미묘하다.
마지막의 두 가지를 빼고는, 웬만하면, 어지간하면, 심심하다고, 가급적이면, 될 수 있으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왕이면 같은 애매모호한 단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어딘가의 면발로 가득한 몸을 지닌 신의 계율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 내용대로라면 마지막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반드시 강제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그에 해당하는 경우가 되었을 경우 한번쯤 머리 속에서 떠올리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외로 상당히 헐렁한 계율인 셈이다.
다만 마지막 두 줄이 의미심장하다.
명예를 소중히 하라… 단순히 생각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앞서 가트의 죽음에 대해 주정뱅이가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한 댓가라고 칭한 일을 떠올려 보면, 이것이 생각보다 강력한 계율임을 이해할 수 있고, 앞서의 여덟 가지 계율이 바로 여기서 정의된 명예를 소중히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즉, 무엇을 하든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되 그것이 명예롭지 못한 일일 경우 책임도 스스로 져야만 한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마지막 줄의 내용은 더 의미심장하다.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 그러나 신이나 성도라는 개념과 연결 지어 볼 경우 나 자신의 죽음이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일이나 생활 같은 것이 힘들다고 자살하지 말라는 식의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고,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게 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애초에 형진은 이 불공정한 계약에 대해 제대로 동의한 기억조차 없다.
“망할…”
한편으로는 짜증나는 현세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있긴 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완전히 빈손인 것도 아니다.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돈도 제법 건네받았고, 머물 집도 있다. 각인의 집행자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걸림돌이긴 하지만, 계급이나 공헌도의 개념이 있는 걸 보면 무턱대고 수행 불가능한 임무를 던져줄 것 같지도 않고.
잠시 고민해 봤지만 딱히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국 형진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일단 청소부터 하자.”
사냥개의 코장식을 착용했던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느껴지는 먼지라든가 냄새 같은 것이 짜증스럽다. 일단 청소부터 하고 좀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야 비로소 뭔가 생각을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창문을 모두 열었다. 문도 모두 활짝 열었다. 침대 위에 덮인 시트를 담벼락에 널고 막대로 마구 털자 뭔지 모를 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도대체 청소를 언제 한 건지 원. 아니, 청소 자체를 한 적은 있는 건지.
하는 김에 바닥에 깔려 있던 양탄자인지 거적떼기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물체도 마찬가지로 바깥에 내다 널고 털어봤다. 놀랍다. 원래부터 회색인줄 알았는데,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보니 뭔가 알록달록한 무늬가 드러난다.
아무래도 그냥 먼지 좀 털고 말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쿠션 대신 침대에 가득 채워져 있던 건초 역시 걷어냈다. 눅눅한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것이, 냄새만 맡아도 병이 날 것 같은 느낌이다.
헛간을 뒤져 빗자루와 동이을 찾았다. 이것 역시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 모양새가 언제 사용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다.
설마 일부러 이런 식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 듯 하고, 일종의 은신처로서만 활용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주소만 이곳으로 해두고 실제로는 이곳저곳 여관 같은 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든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았던 주거의 느낌이 아니다.
형진이 부산을 떨며 청소를 시작하자, 이웃 사람 몇이 힐끗거리며 쳐다본다. 계율에는 어지간하면 성도임을 밝히지 말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이웃과 통성명조차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리라.
“저, 죄송합니다만 혹시 근처에 물을 뜰 만한 곳이 있을까요?”
형진이 그렇게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지켜보던 아줌마 가운데 하나가 화들짝 놀라더니 한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놀라긴. 안보는 척하면서 훔쳐 보고 있었던 거 다 아는데.
아줌마는 괜히 내외하듯 눈을 피하며 손가락으로 대충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이라면 저쪽에 개울가가 있어요.”
“감사합니다.”
어쩐지 등 뒤에서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모른 척 하며 동이를 들고 개울가로 향했다. 그러자 아마도 빨래터 같은 곳으로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은 널찍한 개울이 모습을 드러낸다. 곧바로 제법 큰 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마당 한쪽에 놓여진 물통에 들이 붓기를 반복하는데, 문득 메시지 하나가 나타난다.
[채집 스킬이 상승했습니다.]“얼씨구.”
어쩐지 좀 웃음이 나온다. 하기야 물뜨기는 엘리시온에서 채집 스킬을 올리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기도 하다. 요리나 연금, 가공, 기타 제작에 이르기까지 물이 쓰이는 곳도 상당히 많은 터라 생활러의 처음과 끝은 물뜨기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엘리시온도 아닌 이곳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고 보면 인스턴트 킬을 처음 확인한 것도 싸움이 아닌 생활러로서의 활동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쩌면 인스턴트 킬을 그렇게 임의로 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생활러로서의 경험과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잘 됐다.
각인의 집행자가 됐다고 해도 임무가 오지 않는 이상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그 시간 동안 생활 레벨이나 올려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요리든 가공이든 뭐든 간에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적어도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솔직히 암살자보다야 명장 쪽이 훨씬 어감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딱히 명장 되지 말라고 계율에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또한 그 과정 중에 사냥이나 채석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인스턴트 킬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형진은 팔을 걷어 붙였다. 어쩐지 목표를 하나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좋아. 까짓 거 다시 명장 한 번 찍어 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