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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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출발
형진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유아였다.
“이건… 설마 성소인가요?”
유아의 말에 형진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맞아. 완전한 신전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
“우와… 저 성소가 만들어지는 거 처음 봐요.”
“내가 좀 대단하지. 어때, 새삼 멋져 보여?”
“네! 너무 멋져요!”
뻔히 사람들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닭살스런 커플의 만행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와 같은 일이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다른 이들도 모두 깨닫고 있었다. 더구나 이 중에 형진의 정체가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유아뿐. 그래서 일행들은 설마 이 현상이 형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성소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그 한 사람은 바로 하마란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확실하게 패배하기는 했어도 아직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반항심이 남아있던 그녀로서는, 갑자기 던전 한복판에 성소를 만들어내는 형진의 모습이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신의 추종자임에도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집행자들은 이것이 아마도 신녀인 유아가 이루어낸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하마란은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유아가 행한 일이 아니다. 바로 저 진이라는 남자가 벌인 짓이다.
성소가 만들어질 때 은은하게 퍼져나온 신성력의 양과 농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유아가 기적의 성광을 발했을 때 정도? 하지만 그런 놀라운 일을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은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녀조차 정신을 잃고 꼬박 앓아누울 정도의 일과 동급의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서… 설마…”
하마란은 그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신들 가운데 장난기가 넘치는 몇몇은 간혹 자신의 힘을 억누른 채 세상을 구경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해진다. 흔히 아바타라 불리는 것이 바로 그러한 존재다. 완전한 신은 아니고, 그래서 능력에 제한도 많지만,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들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존재다. 물론 이것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일이 아니고, 과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영웅들 가운데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업적을 이룬 이들이 혹시 이런 아바타가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하마란이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아바타의 존재였다.
혹시 저 남자가 바로 그 아바타가 아닐까 하고.
“쯧쯧. 아직 놀라시는 건 이릅니다.”
“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아직 놀랄 일이 더 남았다니?
“유아, 타운 포탈을 한 번 써봐.”
“지금요?”
“그래, 지금.”
형진의 말대로 타운 포탈을 실행하던 유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곧바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느 곳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1. 그리칸 신전.-2. 대미궁의 성소.
“이건… 설마?”
맹한 유아도 이번만큼은 눈앞의 선택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앞서 그리칸에서 뛰어왔던 것처럼 힘들게 왕복하거나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미궁과 그리칸을 오고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소는 한 번에 하나만 만들어낼 수 있는 관계로 집으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어. 아쉽더라도 이 정도로 참아줬으면 해.”
“…”
형진의 귓속말에 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보다 희망과 생명의 성도들이 더욱 융성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신도의 숫자나 그들의 명성이 신이 지닌 힘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미친놈이나 폭력배 같은 신들이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어필하려고 애쓰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신의 속마음을 알 도리는 없으니 이것 역시 추측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게다가 제약도 있다. 형진은 스스로 성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지만, 타운포탈과 같은 기능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희망과 생명의 추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유아에게 그 사용권한을 부여해 기능을 이용하는 식의 편법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참 애매하고 불합리한 부분이고, 어쩌면 희망과 생명은 이런 불편함을 강요해 그가 공포와 죽음을 버리고 희망과 생명에 귀의하게끔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형진은 떠올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굳이 번잡스러운 미궁 입구를 통과할 필요 없이 얼마든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타운 포탈 기억하시죠? 물론 다른 사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유아만이 가능한 일이죠.”
개나 소나 사제라면 전부 성소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일. 게다가 이 발언을 통해 집행자들은 이 모든 것이 유아의 능력이라고 감쪽같이 속아버리고 말았다. 유아만이 가능하다는 말을 통해 이 일을 벌인 당사자가 은연중에 유아로 낙인찍히고 만 것이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난 거짓말은 한 적이 없어. 그렇지 않아?”
“…”
장난기 어린 형진의 말에 유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긴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이면서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집행자들 개개인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괜히 오해나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는 일. 하지만 오귀스트나 하마란은 몰라도 제랄딘이나 미엘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유아는 마음이 좀 찜찜했다.
“자, 선택하시죠. 일단 돌아가서 식사를 하고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전투식량이라도 까먹으면서 온천욕을 즐기시겠습니까.”
“…”
제랄딘과 미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씩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둘 다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오귀스트는 물론이고, 형진의 옆에 서있던 유아마저 쾌활한 두 아가씨의 대답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이쿠, 이런. 욕심쟁이 아가씨들이군요. 할 수 없네요. 제가 뭐 힘 있습니까. 자, 그럼 아리따운 신녀님. 그리칸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유아는 곧바로 그리칸으로 통하는 타운 포탈을 열었다. 그러자 마치 물로 이루어진 거울과도 같은 형상 하나가 그녀의 앞에 나타난다.
“가시죠.”
“넵!”
곧바로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오귀스트가 타운 포탈을 통과했고, 하마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자, 우리도 갈까.”
“네.”
형진이 손을 내밀자 유아는 마치 결혼식에 참석하는 신부처럼 그의 손을 맞잡은 채 타운 포탈을 통과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그리칸 신전 안에서도 최고 사제의 방이었다.
“…”
최고 사제는 형진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골치를 썩이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타운 포탈이 열리며 낯선 이들이 쏟아져 나오자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음? 여긴?”
“최고 사제님의 방이네요.”
마지막으로 형진과 유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타운 포탈은 이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대… 아니, 진님? 그리고 신녀님도?”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타운 포탈의 도착 지점을 이곳으로 설정하셨습니까?”
“그, 그게… 네. 누가 언제 도착하는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과연. 나쁘지 않군요.”
누가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일에 방해가 된다고 그냥 멀리 떨어진 방 같은 곳을 지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최고 사제는 모범적인 호구신의 사제였고, 때문에 그런 편의주의적 발상 같은 것은 떠올리지 못했다.
“역시 호구신의 사제들에게 이런 잔머리를 바라는 건 무리인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형진이 내준 숙제는 하나가 아니었다.
이 타운포탈 능력을 잘 사용하면 도시간 물자 운송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약간의 잔머리를 굴린다면 서로 다른 귀환지점을 설정한 사제 둘이 짝을 이루는 것으로 상대의 도시를 무한히 왕복할 수 있다. 만약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특산물을 운반한다면, 기존에 마차나 배 같은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운송 효율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물론 타운 포탈의 크기나 지속시간을 통해 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크기나 양이 제한되기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방법이다.
형진이 기다리는 것은 이런 잔머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융통성과 그것이 지닌 경제적 효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가진 인물이다. 만약 이 기준에 합당한 인물이 하나 이상 나타난다면, 형진은 그 인물을 통해 물류 사업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아무나 골라 맡길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활용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능력과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해 옮길 수 있을 정도의 결단력이 있다면 사업 한 가지 정도는 맡겨볼만한 인재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귀찮다. 어느 세월에 그걸 다 혼자 하고 있으란 말인가.
“앞으로 종종 이용할 테니까,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일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하십시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얼른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는 최고 사제의 모습에 괜찮으니 계속 하던 일 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형진의 저택으로 향했다.
-어? 벌써 오셨어요?
“그러네. 왜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자기들끼리 식사를 하려고 준비하던 림과 크루그는 점심 때가 되자 딱 시간 맞춰 돌아온 일행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긴. 밥 먹으러 왔지. 자아, 자리 만들어 봐. 이제부터 이 요리는 내가 집행한다!”
-오오!
집행이라는 말이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닐텐데. 하지만 여기 모인 집행자들중 누구도 그 말에 기분 나빠하거나 하지 않았고, 형진이 집행자라는 얘기를 오늘 처음 들은 유아는 이게 농담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카트린을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동굴곰 고기 남은 거 써야겠다. 유아, 재료 준비 좀 해봐!”
“네!”
방금 전까지 던전 탐사를 하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자, 형진은 일행들을 데리고 다시 던전으로 돌아가려다가 카트린을 보고는 아차 싶었는지 얼른 달려가 말했다.
“너희들도 준비해.”
“저희들도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크루그에게 형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던전 안에서 몸에 아주아주 좋은 온천을 발견했거든. 온천 한 번도 안 가봤지? 기가 막힌다. 얼른 준비해.”
“네? 하지만…”
가까운 곳이라면 몰라도 던전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그런 크루그의 눈앞에서 유아가 타운 포탈을 만들어낸다.
“…”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크루그를 무시한 채, 형진은 녀석과는 달리 반짝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물거울의 형상을 한 타운 포탈의 모습 그 자체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카트린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속삭였다.
“가실까요?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의 온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카트린은 잠시 말문을 잇지 못하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