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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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치유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와서 잠시 형진은 머리속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지금… 엘 파르드 왕실의 비이며, 또한 크루그와 카트린의 어머니라고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헐…”
대박. 형진은 물론이고 옆에서 함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아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주인님이 이따금 카트린을 공주님이라고 부르고 그랬던 게 그래서였나요?”
“아니야. 난 몰랐어. 정말 몰랐다고. 알았으면 오히려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기를 했겠어?”
“그, 그렇군요.”
다급한 형진의 대답에 유아는 비로소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왕자와 공주였다면, 더욱더 그런 얘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다.
누가 봐도 크루그와 카트린은 현재 왕자나 공주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본래의 신분을 밝히지 못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왕자니 공주니 하는 식의 호칭을 입에 올리는 것은 자칫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일.
“끙…”
형진은 자신이 공주님 운운할 때마다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카트린의 모습이 생각나자 가슴이 쿡쿡 쑤시는 듯한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티 없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길래 그냥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런 형진과 유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마들렌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트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아이들은 의외로 눈치가 빠르답니다. 정말로 호의를 가지고 한 말인지,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정도는 다 알아듣거든요. 카트린이 그런 말을 듣고도 해맑게 웃었던 것은, 여러분이 정말로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후…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그제서야 형진과 유아는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엘 파르드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겼다.
엘 파르드는 현재 그들이 머물고 있는 라야바르트와 발디프스 대산맥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다. 최근 몇 년간 거듭된 반란과 숙청으로 정치 상황이 혼란에 빠져 있으며, 중앙 정부에 반발한 몇몇 지방들이 분리 독립의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을 정도로 막장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지만, 최근 서너 개의 거대 세력으로 재편되어 재통일의 기류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나라이긴 하지만, 발디프스 대산맥이라는 장애물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현재는 그다지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과거 몇몇 귀족들이 제랄딘과 크루그를 엮어서 명분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엘 파르드를 라야바르트에 병합시키자는 의견을 낸 적이 있었지만, 그런 이들 대부분은 국경이 인접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발디스프 대산맥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고 보니…”
형진은 크루그에게 배운 스킬인 라이언하트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그 스킬을 배우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단검에 분명 엘 파르드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그런 물건이었나.”
왕가의 이름이 적시된 아이템이라면, 아마도 왕실에 내려오는 보물이었을 터. 게다가 그것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스킬이라면 역시나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장의 스킬이라고 봐야 한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대단한 스킬이다. 사용자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킬이라니. 왕실의 보물쯤 되니까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확실히 납득이 된다.
어쨌든 잠시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로써 크루그나 카트린의 신변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물론 어째서 이들이 이런 곳에서 단 둘이 지내는지, 왕자씩이나 되는 크루그가 어째서 집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런 건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상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궁금증을 풀자고 아이들의 상처를 헤집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나저나… 아까 부탁이 있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만.”
형진의 말에 마들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마들렌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카트린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부탁은, 저를 소멸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네?”
“그, 그게 무슨…”
자신이 사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는 하였으되, 형진과 유아가 보기에 마들렌은 단순한 사념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공포와 죽음의 문양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망자와는 구별되는 그런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만약 언데드나 그 비슷한 유형의 존재였다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형진의 문양이 반응하며 페스타에 준하는 상황이 발령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존재가 카트린에게 붙어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크루그가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으리라.
“그게 무슨 말이죠? 자신을 소멸시켜 달라니.”
유아의 물음에 마들렌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여러분은 이 아이를 낫게 해주고 싶으신 거겠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의 소멸이 필요한 겁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들렌의 후회와 미련, 그리고 아이들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진 사념. 제가 계속 주위에 머물게 된다면, 이 아이들은 마들렌의 죽음으로 인해 얻어진 모든 주박으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게 될 겁니다.”
“당신이 소멸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마들렌에 대한 것을 잊게 되겠죠.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
이런 말이 생각난다.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일은 잊혀진다는 것이라던가.
망각이란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의 축복이라고도 표현되지만, 막상 그 잊혀지는 대상에게 있어서는 죽음과도 같은 형벌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얽혀 만들어진 사념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소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진과 유아를 향해, 마들렌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제가 있음으로 인해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제 존재 자체가 아이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역할을 다했고, 또한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굳이 제가 더 지켜봐야 할 이유도 없겠지요.”
다만 아쉬운 일이라면, 아이들이 건강하게 어른이 되어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는 점일지도. 마들렌은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가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이전에 제랄딘이 신기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크루그의 기이한 직감이었다. 어린 아이가 거동이 불편한 동생을 데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 모든 요소들을 피해 머나먼 타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직감. 마들렌은 바로 그 직감의 실체였다. 물리적으로 어떤 힘을 발휘할 수는 없더라도, 사전에 주위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에 대해 직감이라는 형태로 크루그에게 알려주었던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마들렌이다. 스스로는 단순한 사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들 남매의 수호천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본래 마들렌은 유령이나 귀신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힘을 가진 사념체인 탓에 하다못해 남매들의 꿈속에서조차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회합장은, 이를테면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 각자의 의식을 형상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소였고, 이 때문에 단순한 사념체에 불과한 마들렌 역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너무나 미약한 존재감으로 인해 이렇게 흐릿한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흑…”
가만히 그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유아가 울먹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 마음 약한 호구신의 사제는 두 남매와 마들렌의 얘기를 잠깐 듣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마구 끓어오르는 모양이다.
에휴. 바보 같은 녀석.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 그건!”
유아가 당황해 하며 얼른 형진의 팔을 붙잡는다. 차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뭔가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애원하고 있었다.
확실히, 마들렌의 부탁은 지금 카트린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면 두 남매를 괴롭히고 있는 기억 또한 사라지고, 그것은 다시 말해 장애의 원인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까 그러셨지요. 마들렌의 후회와 미련, 그리고 두 아이의 기억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사념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건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계기로 이들이 마들렌에 대한 일을 접하게 되면 그 모든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
마들렌은 대답하지 못했고, 형진은 혀를 찼다.
“뭐… 당장 아이가 괴로워하니 그런 식의 처방을 떠올린 것도 납득은 갑니다만, 제가 보기엔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군요.”
“무책임… 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땅히 자신의 아이라면 스스로 돌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야 되겠습니까.”
“주, 주인님?”
유아가 당황해서 팔을 끌어당겼지만, 형진은 그런 유아의 손을 가만히 토닥거리며 씩 웃었다. 마치 자신을 믿고 맡기라는 듯이.
“당신으로 인해 생긴 상처라면, 당신 외에 달리 누가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이 아이들과는 한 마디 말조차 나눌 수 없는 처지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이 공간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곳인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네?”
“이곳은 희망과 생명의 여신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물론 애초에 살아있지도 않았던 사념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들어 몇 가지를 조작하더니,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부여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
그 순간 희미하게 비춰지던 마들렌의 모습은 마치 생전의 그것처럼 온전한 사람의 형체로 바뀌었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인격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사념체를 좀 더 치장하는 정도는 대리자인 형진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주인님?”
그리고 당황해 하는 유아의 외침을 무시한 채 거침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파창!
그러자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카트린과 마들렌을 연결하고 있던 희미한 연결 고리가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져 사라져 갔다.
“이, 이건…”
“으응…”
곧바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트린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들렌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다래지고 말았다.
“어, 엄마?”
“…”
“엄마죠? 그렇죠?”
마들렌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카트린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품으로 뛰어들었다. 마들렌은 당황해 하면서도 자신의 품으로 뛰어든 카트린을 안았고, 이내 자신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형진은 그런 마들렌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마들렌. 앞으로 당신을 이곳 회합장의 관리인으로 임명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현실에서 아이들을 지켜보지는 못하겠지만, 이곳에서라면 얼마든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안아볼 수 있을 겁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들렌은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형진은 괜히 툴툴거리며 유아에게 말했다.
“쳇. 아무래도 호구병이 옮은 것 같아. 유아, 우린 이만 돌아가자.”
“네.”
유아는 글썽거리고 있던 눈물을 얼른 닦으며 형진의 팔을 꽉 껴안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원래도 좋았지만, 오늘따라 그가 더 좋아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