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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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노크합시다!
“그랬습니까.”
회합장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크루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대답은 그것이었다.
“만나길 원한다면 따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마.”
카트린과는 달리 크루그의 경우는 조금 문제가 복잡하다. 그가 이미 공포와 죽음의 추종자인지라 회합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다. 이미 낙인을 가지고 있는 탓에 희망과 생명의 문양을 새로 부여하기가 곤란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미 자신이라는 예외가 있는 상황이니 어떻게 방법을 찾아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형진이 말한 것은 그런 의미였으나, 크루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설령 만날 수 있다 해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고.”
“…”
사념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람의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에 가까운 존재. 게다가 이런 식의 기억은 보통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미화되기 쉽다. 즉, 지금 회합장의 관리자로 임명된 마들렌은 크루그가 이전에 알던 어머니와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이상적인 어머니 상에 좀 더 가깝다는 의미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크루그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한창 성장기에 들어선 크루그가 그런 면에 있어서는 카트린보다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바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분명한 일이다. 또한 크루그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하는 이상 형진이나 유아도 강제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뭐라 해도 만나고 안 만나고는 엄연히 크루그의 의지에 달린 일이니까.
“알았다. 정 그렇다면 더 권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다만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라. 준비는 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일단 그렇게 조금 진지한 얘기가 끝나고 나자 형진은 씩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나저나 왕자였다면 본래 이름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게…”
크루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크룩스크루드 엘 파르드입니다.”
“오, 뭔가 있어 보이는데?”
“이래봬도 왕자니까요.”
“자식.”
크루그와 카트린이 왕족이었다는 것을 알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서로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형진은 여전히 기도중인 카트린의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아마도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이상하다 싶으면 유아한테 말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됐다. 뭘 우리 사이에.”
“…”
어쨌든 그렇게 하나의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카트린이 얼마나 회복될지, 그리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을지는 형진도 유아도 확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이전과는 뭔가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만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형진은 일단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때까지 인벤토리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기이한 느낌의 구슬들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고 그것을 살폈다.
“도살자 가트의 살의.”
형진은 아이템 정보에 적힌 그것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었다. 그렇다. 지금 이 구슬들은 형진이 이 세계로 온 뒤 죽인 인간들로부터 얻은 것들이다.
의뢰를 통해 집행된 이들의 경우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달리 희귀 아이템이 아닌 유일 등급의 구슬들을 드랍한다. 이 구슬들은 모두 아이템에 부착하여 특수한 효과를 부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금 형진이 집어든 도살자 가트의 살의 같은 경우는 인간 대상의 추가 피해와 치명타 확률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꽤 훌륭한 옵션이지만 인스턴트 킬을 가지고 있는 형진에게는 어찌 보면 큰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라이언하트라는 스킬을 얻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적절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단숨에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얻은 상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 구슬들이 지금껏 방치되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인간을 죽여 얻은 무언가를 쓰는 것이 좀 꺼림직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형진이 이것을 꺼내 놓은 것은, 한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들렌은 온전한 인간의 영혼조차 아니다. 미련과 후회, 그리고 기억이라고 칭해지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합쳐져 만들어진 사념체이다. 그런 사념체가 어떤 식으로든 남매의 일에 미약하나마 관여해 왔고, 이제는 회합장의 관리자가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이 구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을까.
이 구슬들은, 어떻게 보면 집행자에게 처형되었던 자들이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감정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것 자체로 형상화된 사념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문제가 있다. 마들렌처럼 선의로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라, 강렬한 악의로 뭉쳐져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마들렌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호구신의 사제들이 평화롭게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뛰어놀게 될 회합장에 살인마들을 풀어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때문에 형진은 이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통나무 분신술의 미끼로 활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통나무 분신술에 사용되는 미끼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묵직한 크기의 통나무에 세공으로 존재감을 심은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낸 목각 인형이다. 통나무는 단순한 눈속임과 방어용이며, 목각 인형은 공격까지 염두에 둔 물건이다.
하지만 일전에 제랄딘에게 시험해 봤을 때 밝혀진 것처럼, 이것들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반응이 너무나 수동적이라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에게는 그저 시야와 감각을 교란시키는 장애물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고, 또한 그 모든 것을 제어하는데 너무 많은 정신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이 구슬들에 남겨진 사념들을 각각의 인형들에 심어 넣을 수 있다면 어떨까.
형진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한 그런 꼭두각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발상은 그럴 듯 한데 말이지.”
문제는 이것이 정말 생각했던 것처럼 실현이 가능하냐는 점이다. 그래서 형진은 일단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자칫 인형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일이 꽤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진은 림과 같은 사이즈를 상정하고 간단하게 도안을 그렸다. 간단하게 시험만 해볼 생각이라 너무 정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일단 작업에 들어가자 형진은 순식간에 공예가의 혼을 담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자르고 깎고 다듬는다. 관절이 될 부위를 정교하게 사포로 문지르고 몸의 형태를 가다듬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형진의 손길이 닿을수록 인형의 모습이 도면과는 다르게 누군가를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라.”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접어들고 나서야 형진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인형이 누군가의 외모와 몸매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지금 형진이 만든 인형은 유아의 모습을 꼭 닮아 있었다. 다른 건 어떻게 얼버무린다 쳐도 그렇게 밤마다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처로울 정도의 앙증맞은 크기를 자랑하는 가슴은 정말 판박이다.
“끙…”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매일 보고 느끼고 만지는 대상이 그녀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인형에 그대로 투영해버리고 만 것이다.
무서운 녀석.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구속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세요?”
그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유아가 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내민다.
“왜?”
곧바로 형진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지만, 유아는 오히려 그런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쟁반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귀스트님이랑 림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과자랑 해서 조금 가져 왔어요.”
“그래? 가져와 봐.”
아이스크림이라. 림에게 대충 원리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시연을 해보인 적은 없기 때문에 조금 불안한 기분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쟁반에 담겨진 것은 의외로 제대로 된 아이스크림이었다. 잔에 동그랗게 퍼담고 거기에 쿠키를 약간 얹어 놓으니 딱 파르페 같은 느낌이다.
“일단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 한데.”
“그렇죠?”
“어디… 맛은 어떤지 볼까.”
“네. 자… 아 하세요.”
“…”
얘가 지금 뭐하는 거야. 형진은 유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티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미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크흠. 그냥 내가…”
“어서요. 자, 아…”
“…”
뭔가 상당히 난감하다. 세상에,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형진이 그렇게 머뭇거리자 유아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어서 입을 벌리라는 듯이 티스푼을 그의 입가에 강제로 밀어붙였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도대체 왜 이래.
하지만 결국 유아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이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티스푼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받아먹고 말았다.
“어때요?”
“뭐… 그럭저럭이네.”
바닐라 에센스가 빠진 탓인지 완벽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럭저럭 아이스크림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나고 있었다. 뭐, 이 정도면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고급 디저트가 아닐까. 오귀스트는 그렇다 쳐도 림 역시 숙련 등급의 요리사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는 일을 자처하던 유아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무언가를 포착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건… 인형인가요?”
“…”
아차차. 형진은 뒤늦게서야 만들고 있던 인형을 미처 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달리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유아의 손이 인형을 번개같이 낚아채고 말았다.
그 재빠른 손놀림이라니. 과연 자신 밑에서 그동안 격렬한 노가다의 나날을 보낸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차차, 지금 이 곰탱이의 손놀림이 빨라진 것을 감탄할 때가 아니지.
“이거… 저에요?”
“…”
아직 얼굴도 완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아는 대번에 그것이 자신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아보았다. 역시 가슴이 문제였다.
“아니거든? 이리 줘. 마저 작업해야 하니까.”
“흐응…”
하지만 형진이 손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는 살짝 눈을 흘기며 묘한 콧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바보. 그렇게 제가 보고 싶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같이 있어 놓고서. 어, 어라. 왜 옷자락을 푸는 건데.
“지금 뭐하는 거야?”
“몰라요.”
말로는 모른다 했지만, 유아는 대답과 동시에 형진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그대로 덮치듯 그의 입술을 훔쳤다.
졸지에 입술을 빼앗겨 버린 형진은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얘가 자신이 알던 그 곰탱이가 맞나. 둔하고 맹한 곰탱이는 어디가고 어디서 갑자기 요염한 여우 한 마리가 대신 들어와 앉은 듯한 느낌이다.
유아는 키스를 마치자 잠시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다가, 형진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 가슴 키우기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