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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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인의 집행자
명작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물건이긴 해도, 첫 번째라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는 일이다. 형진은 잠시 의자에 앉아 안정감을 확인해 보고는 그늘에 말려 두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더라도 수분이 마르고 나면 변형이 일어나 형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이른바 작품이 만들어지면 엘리시온의 제작 시스템은 그것의 제작과정을 하나의 레시피로 등록할 것인지 물어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지만, 불행히도 그가 만든 첫 번째 의자는 아직 작품이라고 불리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모양이다.
의자 다음은 식탁이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넓은 면적의 평면을 제대로 유지해야 하고, 위쪽에 무거운 것을 올려 두더라도 균형이나 안정성에 문제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형진은 일단 판자를 제작하지 않고 다소 투박한 형태의 식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판자는 생각보다 제작 난이도가 높은 데다 제대로 제작하려면 톱이나 도끼 외에도 이런 저런 도구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톱만 가지고도 제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효율이 영 엉망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역사에 남을 명품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대충 만들기로 했다.
일단 통나무를 고정한 다음 톱으로 반을 나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평평한 면을 아래로 향하도록 주욱 늘어놓은 다음, 도끼로 끄트머리를 둥글게 파서 역시 반으로 가른 통나무를 댄다. 그렇게 통나무를 짜 맞춘 다음에는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사실 이 과정은 엄밀히 말하자면 식탁의 제작이라기 보다는 통나무 집을 만들 때 나무를 쌓는 기법과 거의 동일하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식탁보다는 훨씬 투박할 수밖에 없지만, 반대로 그만큼 튼튼하다는 장점이 있다.
연결 부위에 또한 굵직한 통나무를 고정시킨 다음 뒤집어 놓으니, 이대로 개울가에 가져다 두면 훌륭한 선착장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대패가 없어서 제대로 마감을 못한 탓에 한층 더 그런 느낌이 물씬 풍긴다.
식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선착장이 만들어지다니, 과연 명장의 손놀림은 신묘하구나.
젠장. 얼른 다시 명장이 되든가 해야지 원.
“다 좋은데 너무 무겁군.”
그럴 수밖에 없다. 판자를 대서 만든 것도 아니고 무식하게 반으로 가른 통나무를 몇 개나 써서 만들었으니 어지간한 힘으로는 들고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낑낑거리며 안으로 들여 놓는 일을 마친 형진은 그래도 썰렁하던 집안이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추어지고 있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저기… 잠깐 괜찮아요?”
누군가 부르기에 돌아보니 옆집 아줌마가 바구니를 하나 들고 문가에 서있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형진이 다가서자 아줌마는 빙긋 웃으며 바구니를 건넸다.
“감자를 조금 삶았어요. 식사가 부실한 것 같아서.”
“아… 감사합니다.”
딱히 부실하지는 않다. 아직 준비가 갖춰지지 않아서 요리 스킬을 올릴 생각을 못하는 관계로 끼니는 그냥 근처 주점 등에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전에 살던 그 양반이랑은 어떤 관계에요?”
“아… 예, 친척 아저씨입니다. 사정이 생겨서 먼 곳에 가시게 되어서 제가 대신 집을 받았죠.”
“아하, 그럼 한동안 이곳에 머무실 생각이신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급한 예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아줌마는 그렇게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뭔가 있어.
그러고 보면 처음 올 때부터 낯선 사람에게 대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친절한 느낌이었는데, 혹시 그 주정뱅이가 따로 언질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한창 꿈 많은 어린 시절에 봤던 이웃집 아줌마 시리즈가 떠올랐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어 그런 상념을 떨쳐 버렸다. 사실 동네 아줌마 치고는 의외로 살짝 색기가 흐르는 인상이긴 하지만, 딱히 취향인 것도 아니고.
대충 짐을 챙겨들고 임무를 확인한 다음 숲으로 향했다. 오늘치 임무도 수행하고 덤으로 오랜 만에 사냥을 해볼 생각에서였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간 숲을 오가면서 나무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사냥개의 코장식을 이용해 남아 있는 흔적들을 살피고, 그것을 통해 어떤 생물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또한 형진이 숲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엘리시온에서는 마을 밖에만 나가면 토끼며 족제비며 여우가 떼거지로 몰려다녔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꿈에서나 볼 법한 사냥터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사냥하려면 우선 그 무언가가 있는지부터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냥개의 코장식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정말 엄청난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장착하는 것 만으로도 우수한 사냥개들을 이끌고 사냥에 나선 것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더 좋다. 아무리 우수한 사냥개라도 무엇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실시간으로 정확한 정보를 인지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이 코장식은 감히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역시 레어 아이템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일단 이곳에서의 첫 사냥이니 정석대로 토끼를 잡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곳의 토끼는 또한 엘리시온과 다를 것이다. 제 자리에 말똥말똥 선채로 누가 오면 오히려 눈싸움을 벌이던 그 멍청할 정도로 순한 게임 속의 토끼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나름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한 지역의 왕인 것이다.
아, 이건 좀 과장이 심한가.
어쨌든 형진은 조심스럽게 이전에 봐두었던 흔적을 살펴 토끼를 추적했고, 마침내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토끼, 뭔가 좀 이상하다.
“…”
원투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어컷!
어디 동양챔피언 선수권에라도 도전하려는 건지 쉐도우 복싱을 아주 그럴 듯 하게 해낸다. 몸집만 아니라면 토끼가 아니라 캥거루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럴 때 형진은 또 한 번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곳은 역시 내가 살던 그곳이 아니구나.
또는, 역시 내가 했던 그 게임과는 다르구나… 라는 식으로.
토끼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형진을 발견하자, 한 차례 멋들어진 쉐도우 복싱을 선보이더니 용맹하게 돌진해 왔다.
아무래도 이 세계의 토끼는 맹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일반적인 토끼처럼 보자마자 잽싸게 도망치거나 했다면 사냥이 훨씬 피곤해졌을 테니까.
형진은 곧바로 단검을 뽑아들고는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훅! 훅!
콧김을 뿜어내 펄쩍 펄쩍 뛰어 앞발을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콧잔등에 무언가 할퀸 듯한 흉터까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싸움 경험도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컥!”
조그마한 토끼 발이라고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니다. 한두 대 맞자 눈앞이 번쩍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쌍코피가 주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형진이 누구인가.
무려 다른 세계의 포장마차에서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만취 상태인 채로 스카우트되어 낙인의 집행자라는 그럴 듯한 직함마저 얻은 인물이 아닌가!
빌어먹을.
스스로 떠올려놓고도 뭔가 한심하다. 토끼한테 얻어맞아서 쌍코피가 터지다니. 농담으로라도 어디 가서 말하기 무서울 정도다.
워낙 순발력이 대단한 탓에 좀처럼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 그렇게 버티자, 토끼는 특유의 종족 특성까지는 다르지 않았던 모양인지 금새 지친 기색을 보이며 헐떡이기 시작했다.
역시 토끼. 조루의 대명사.
다행이다. 여기서 더 얻어맞았으면 완전히 체면 구길 뻔 했는데.
아니, 쌍코피가 터진 시점에서 이미 체면 운운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금!”
지쳐서 헐떡거리던 토끼는 형진이 내지른 단검에 약점이 찔리자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인스턴트 킬! ‘복서 토끼’가 죽었습니다!]복서 토끼라니. 역시 그냥 토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진은 최소한의 자존심은 세운 것 같은 기분에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토끼가 떨군 룻을 집어 들었다.
[‘용맹한 바니 걸 슈트’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와 곱게 개켜둔 한 벌의 옷을 보는 순간 형진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형진에게 친절하게도 알아서 떠오르는 아이템 정보.
아이템정보
명칭 : 용맹한 바니걸 슈트
등급 : 희귀
착용제한 : 도적, 권사, 암살자 계열.
설명 : 복서 토끼의 용맹함이 서린 슈트. 특정 아이템과 함께 착용하면 세트 옵션 발동.
효과 : 회피력, 순발력 증가. 지구력 소폭 감소.
강화시 효과 : 회피력 증가.
다행히 암살자 계열도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와아, 그렇지 않아도 방어구가 없었는데 잘 됐다.
…는 개뿔.
형진은 얼른 손에 들린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단지 손에 들고 있는 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것을 착용한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뇌가 녹는 느낌이란 이런 것이 아닐지.
“크흠.”
일단 코피부터 닦아낸 형진은 적당히 피를 뺀 토끼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다른 희생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기긴 했지만 이대로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족제비에 맞아죽을 때부터 은근히 느끼고 있던 일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은 심각한 몸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복수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끼요오오옷!
흔적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널찍한 장소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멋들어진 회축을 선보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토끼 한 마리.
설마… 이 세계의 동물들이 전부 이 모양인 건 아니겠지?
까딱까딱.
토끼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텐데, 앞발을 까딱거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쩐지 예전에 봤던 영화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드루와. 드루와.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 뭉개지는 듯한 기분에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전투태세를 취했다.
폼은 제법 그럴 듯 하다만, 어차피 이 놈도 토끼인 이상 조루의 저주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 버티며 시간을 끌면 되지 않을까.
형진이 전투태세를 취하자. 토끼는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앞뒤로 폴짝폴짝 스탭을 밟기 시작한다. 모양만 봐서는 리틀드래곤 아저씨가 형님하고 부를 정도…
휙!
하지만 형진이 스탭을 보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순간, 일순 토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아까 코피가 터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일격이 관자놀이를 가격한다.
“커헉!”
형진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단 일격에 뇌가 흔들려 도저히 서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제서야 형진은 깨달았다. 아까 복서 토끼한테 맞아서 쌍코피가 터진 시점에서 더 망가질 체면이 남아 있기나 하겠냐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지금 상황에 비하면 쌍코피가 터진 것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다.
훗.
그렇게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형진은 똑똑히 들었다. 망할 토끼 놈이 자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는 그 소리를!
이 망할 토끼 놈이!
토끼는 그런 형진을 흘낏 내려다보더니 이내 조금 쓸쓸한 모습으로 뒤돌아 골짜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아직도 나를 쓰러뜨릴 자는 없는 것인가 하고 한탄하는 듯한 모양새로.
============================ 작품 후기 ============================
주인공: 어쩐지 역할이 바뀐 것 같지 않아?
작가: 그래서 장비 줬잖아. 기껏 줬는데 왜 안 입고 나한테 트집이야?
주인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