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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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금은 노오오력이 필요할 때.
인정한다. 솔직히 전직 퀘스트가 끝나고 마음이 좀 헐렁해져 있었던 것, 양심에 손을 얹고 명백하게 인정한다.
딱히 강제성을 띈 임무가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좀 허름하긴 하지만 마이홈도 생겼다. 돈이 필요하면 생활 레벨도 올릴 겸 물자 보급 임무 정도만 해도 하루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틈만 나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바라보는 아줌마도 있고, 물통을 들고 가면 어머 어머 저 팔뚝 좀 봐를 연발하는 아줌마들도 있다. 어째서 처녀들은 눈길도 안 주고 아줌마들만 환호하는지는 형진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여하튼 그 정도면 이전에는 수퍼를 가든 은행을 가든 신경도 안 쓰다가 가끔 가는 길이 같으면 의심스런 눈길로 뒤돌아보는 아줌마들보다야 훨씬 정감이 넘친다.
그래서 좀 마음을 놓았다. 그냥 다 잊고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노래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깨달았다. 이렇게 헐렁하게 지낼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퍼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끙…”
뭔 놈의 토끼 발차기가 이렇게 묵직한 건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머리가 딩딩 울린다.
그 움직임, 확실히 범상치 않다. 필드 보스라고 경고 메시지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토끼 중에도 강한 축에 드는 놈이 아닐까. 아니라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다.
다시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몬스터는 몬스터. 토끼 따위를 몬스터라고 불러야 하는 현실이 난감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상대가 몬스터인 이상 다음 번에도 지금처럼 살아남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솔직히 방금 전도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골로 갈 뻔했다. 한방 얻어맞는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나가면서 그대로 폭 고꾸라지는 그런 경험은 가급적이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해 보면 전직 퀘스트 이후로 전투 쪽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냥러들이 사냥을 잘하는 건, 단순히 그들이 사냥에 감각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냥을 열심히 하다보니 몹의 패턴이라든가 이런 저런 상황에 관한 대처가 몸에 익은 것이다. 평생 사냥도 않던 놈이 갑자기 무기 하나 들고 인스턴트 킬이라는 비기를 얻었다고 무쌍 찍고 다닐 거라 생각하면 그게 오히려 미친놈인 것이다.
형진이 전혀 전투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초보존의 잡몹들과 좀 어울려 본 것일 뿐, 전문적인 사냥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후우우우…”
그래. 만렙 찍기보다 더 어렵다는 명장까지 찍었던 몸 아닌가. 까짓 사냥 따위 못할 것 없다. 해보자.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살아남아라. 토끼여. 강해져서 내 친히 네 놈을 구워먹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일단 오늘치 임무인 풀베기를 마친 다음, 건초로 쓸 분량을 추가로 더 모아서 산을 내려왔다.
“저기… 계세요?”
울타리 너머로 그렇게 말을 건네 보자, 마침 저녁을 준비 중이던 옆집 아줌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네? 무슨…”
“풀을 베다가 보이길래 잡았습니다. 괜찮으시면 식구들이랑 같이 드세요.”
“어머. 토끼잖아요. 사냥도 할 줄 아세요? 사나워서 잡기 힘들었을텐데.”
“…”
역시 이곳의 토끼는 맹수 맞나보다. 대뜸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아줌마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고맙다고 하는 걸 들으니 그럭저럭 보람은 있다.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 골짜기에서 본 그놈을 반드시 잡아 통째로 구워먹고 말리라고.
엘리시온에는 수련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반복적으로 같은 행위를 함으로서 특정 능력치를 증가시키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맷집과 힘 같은 것이고 민첩이나 손재주 같은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형진의 경우엔 명장을 찍는 과정에서 민첩과 손재주를 끝까지 찍는 기염을 토했었다. 적어도 그 능력치들만 이전과 같았더라도 최소한 오늘 그렇게 어이없이 발차기 한 방에 기절해 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시온에서의 실력만이라도 회복하기 위해선 최소한 그때와 능력치만큼은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손재주의 경우엔 생활 레벨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단련이 되지만 민첩성은 별도로 수련이 필요하다. 본래 엘리시온에서는 레벨 업 할 때마다 일정한 수치의 보너스 스탯이 부여되어 자유롭게 자신의 캐릭터에 부여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현재까지 그런 식의 레벨 업이 달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조금 번거롭더라도 수련으로 올릴 수밖에 없을 듯 하다.
민첩 수련은 보통 그것 자체를 수련하기 보다는 반응 속도나 순발력 단련을 통해 간접적으로 올리게 된다. 도적, 권사, 암살자 계열의 경우엔 추가적인 치명타 확률과 회피력 증가 효과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능력치를 효과적으로 올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런 수련들의 대부분은 2인 1조로 수행하는 것들이 많아서 현재의 형진에게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역시 매크로 수련 밖에 없나.”
형진처럼 그런 식의 적극적인 수련을 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엘리시온은 매크로 수련이란 것을 만들어 두었다. 특정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정해진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것인데 방법이 간단한 만큼 시간 대비 효율 면에서는 최악을 달린다.
“…”
문득 인벤토리 안에 담겨 있는 바니걸 슈트가 떠오른다. 외형은 어쨌든 간에 보기 드문 회피, 순발 부스터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수련을 똑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더라도 이런 부스터 아이템이 있으면 그만큼 높은 수준의 성과를 얻기 때문에 수련시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있다. 이전에 그 여자가 다른 이들의 눈총에도 무릅쓰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면서까지 머리띠에 목을 맸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달리 비약이나 음식 같은 것으로 도핑을 할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이런 부스터 아이템은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눈 딱 감고 입어봐?
어차피 밤중에 문과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수련하면 일부러 찾아와서 훔쳐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알 도리가 없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사냥개 코장식까지 하면 주위 경계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읍…”
자신도 모르게 문 걸어 잠그고 바니걸 슈트를 입은 채 사냥개 코장식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평소에는 반응도 없던 상상력이 왜 이럴 때만 발동하는 것인지.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총각. 자요?”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이웃집 아줌마가 냄비 하나를 들고 서 있다.
“무슨…”
“총각이 줬던 토끼고기에 감자 조금 넣고 스튜를 만들어 봤어요. 아직 식사 안했으면 먹어 봐요.”
“아… 감사합니다.”
꾸벅 절을 하고 냄비를 건네받자 아줌마는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매운 맛을 내는 향신료를 넣었는지 뭔가 얼큰한 냄새가 나는 것이 제법 입맛을 당긴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의 음식은 뭔가 좀 느끼한 맛이 강해서 곤란하던 참이라 그런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한 가득 고인다.
얼른 들어가서 아침에 사놨던 빵과 함께 식사를 했다.
맛있다. 그냥 눈웃음만 헤픈 아줌마인줄 알았더니 요리 솜씨도 제법이다.
이 정도면 엘리시온의 등급으로 따져도 숙련가를 넘어 전문가 수준은 될 것 같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어서 평가가 좀 후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매콤한 토끼 스튜’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헐?”하지만 그건 절대로 형진의 평가가 후했던 것이 아니었다. 음식을 다 먹고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는 순간 이런 메시지가 나타나며 버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두 가지나!
“하나는 민첩성 상승, 또 하나는 치명타 확률 상승… 대, 대박.”
전문가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이 이것으로 증명되었다.
엘리시온의 요리 시스템은 각 등급에 따라 버프 효과가 달라진다. 같은 음식을 만들었더라도, 숙련가의 경우엔 버프 1개, 전문가는 2개, 장인이 되면 무려 3가지 버프가 생긴다.
버프의 유효 시간은 포만감이 사라질 때까지인데, 음식의 종류에 따라 30분에서 2시간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스터 효과 때문에 바니걸 슈트를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형진으로서는 갑자기 복이 굴러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고로 지금까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전전했던 이 근처의 어떤 음식점에서도 버프 현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 중에는 의외로 꽤 맛있는 음식도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요리 버프는 이 세계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하고 있던 참이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매콤한 토끼 스튜의 버프 지속 시간은 무려 한 시간. 형진은 급히 집 안팍의 문단속을 하고는 곧바로 수련에 들어갔다.
헛둘! 헛둘!
누가 보면 영락없이 달밤에 체조하는 꼴로 보이겠지만 지금 형진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최소한 바니걸 슈트를 입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랄까.
[민첩성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성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민첩성이 증가하였습니다!] [민첩성 경험치가 상승…버프 효과 때문인지 경험치 상승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대박. 대박이다. 하하하!
오랜만에 몰입한 덕분인지 버프 시간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형진은 일단 흥건하게 젖은 땀을 대충 닦고는 스튜를 담았던 냄비를 깨끗이 닦아 울타리에서 아줌마를 불렀다.
“저… 계세요?”
조심스럽게 부르자, 아줌마는 역시나 살짝 눈웃음을 흘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네. 부르셨어요?”
“여기… 그릇.”
“아, 설거지까지 다 하셨네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정말 맛있었습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음식점을 하셔도 될 것 같던데요.”
“아이, 그 정도는 아니구요.”
아줌마는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은지 살짝 볼을 붉힌다. 크흠. 진정하자. 자꾸 이웃집 아줌마 시리즈가 떠오르면 여러 가지로 곤란하다.
“저…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까 싶긴 한데,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러자 아줌마는 형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안다는 듯이.
순간 형진은 뭔가 뜨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크흠. 별 건 아니고… 괜찮으시다면 요리를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 재료비나 수고비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
하지만 이어진 말에 아줌마는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란 건… 그것 뿐인가요?”
“네, 뭐… 일단은.”
스스로 요리 레벨을 올리면 좋겠지만, 요리 레벨은 모든 생활 레벨 중에서도 올리기 어려운 축에 속하기 때문에 기본 버프가 발생하는 숙련가 수준까지만 올리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도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 올려둬야겠지만, 당장 이웃집에 전문가 수준의 요리사가 있는데 활용하지 않고 놀리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다.
“알았어요. 하지만, 전 보수가 비싸요. 후회할 지도 몰라요.”
아줌마는 조금 새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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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설마… 저 아줌마가 히로인?
작가: 응, 아니야.
주인공: 정말?
작가: 네 인생에 히로인 따위가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주인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