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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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풍운
이게 무슨 일인지. 기사단이 전부 몰려온 것도 모자라서 병력까지 죄다 끌고 나온데다, 이제는 가주까지 총출동이라고?
이쯤 되면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을 정도. 하지만 그리칸 인근에는 딱히 국경선이라고 할 만한 곳도 없고, 군사를 투입할 곳이라고는 발디프스 대산맥이나 대미궁 정도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 두 장소 모두 정규 병력을 투입하기엔 상당히 난감한 곳이다. 무엇보다도 대규모 병력을 전개시키는데 제한이 따르고, 보급도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전술적인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이런 식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나 할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원.
혹시 예전에 대미궁 입구를 통제하려 했던 백작 나부랭이를 혼내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린다. 차라리 이쪽이 신빙성이 높아 보이긴 하지만, 그게 왕국 최고 가문의 가주가 직접 나서야만 할 일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에이, 몰라.
지금 여기서 고민해 봐야 딱히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 마당에 머리 아프게 골치 썩일 이유가 없다. 내일 방문한다고 했으니 와서 얘기를 나눠보면 알겠지.
결국 형진은 그렇게 생각을 그만두었다.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그럼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예전에도 몇 번 제랄딘의 호위 기사가 이런 식으로 서신을 전달한 적이 있긴 하지만, 저렇게 저 자세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딱 거리를 지키며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혹시나 해서 유아에게 물었다.
“설마 네가 고쳐준 것 때문에 저러나?”
“누구요? 방금 그 기사님이요?”
“…”
이 맹한 신녀님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불쌍한 젊은 기사님. 이 곰탱이는 이미 당신을 잊은 듯 하구려. 어쩌겠소. 다 이 나의 매력이 넘치는 탓인 것을.
“근데 무슨 편지였어요?”
미엘의 물음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랄딘님이 내일 아버지랑 같이 방문해도 괜찮겠냐고 묻던데.”
“공작님이요?”
“응. 전투식량이 너무 비싸다고 깎아 달라고 오는 건 아니겠지?”
농담 섞어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유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다.
“어쩌면 침대 때문일지도 모르죠.”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제랄딘님이라면 몰라도 그 분은 침대를 보지도 못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역시 전투식량인가.”
역시나 방문 이유 역시 오리무중. 아직 얼굴도 보기 전인데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지니, 역시 귀족은 귀족인 모양이다.
형진은 식사 시간에 방금 받은 편지의 일을 다른 식구에게도 알렸다. 하지만 림이나 하마란은 물론이고, 크루그와 카트린도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림은 황자의 일 때문이라도 공작이 방문할 동안 잠시 자리를 피해 있는 편이 나으니 상관없는 일이고, 하마란 역시 왕궁을 오가며 공작이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니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일단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다. 얼굴은 그 악취미적인 두건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저 과격하게 출렁이는 가슴은 남자라면 한 번 보는 순간 잊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이니까.
크루그나 카트린도 마찬가지. 그들의 신분을 생각하면 왕국의 고위 귀족과 얼굴을 마주치는 건 역시나 꺼려지는 일이다. 공연히 얼굴 마주쳐 봐야 여러 가지로 껄끄러우니 그들 역시 적당히 자리를 피하는 것이 속 편하다.
결국 공작이 찾아오더라도 얼굴을 마주할 만한 인물은 형진과 유아, 그리고 미엘과 오귀스트가 전부인 셈이다.
“그나저나, 형.”
“…”
형진은 형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지칭한 말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크루그와 카트린이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화들짝 놀라며 말을 받았다.
“응? 나? 지금 나보고 한 말이야?”
그 말에 크루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다시 아저씨라고 불러줄까요?”
형진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절대로 안 되지. 이렇게 파릇파릇하고 때깔 나는 아저씨 봤냐? 이렇게 멋진 아저씨 봤냐고. 그렇죠? 카트린.”
그러자 카트린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빠.”
“컥!”
크루그가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당히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가 불러주는 오빠라는 단어의 파괴력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크루그의 형이라는 말이 수류탄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카트린의 오빠는 벙커버스터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견고한 콘크리트 구조물도 단숨에 뚫고 들어가 내부를 박살내버리는 바로 그 무기 말이다.
“크으… 드디어 내 생에도 이런 날이…”
“킥킥.”
심장을 부여잡은 채 호들갑을 떠는 형진의 모습에 카트린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크루그 역시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어 버린다.
“그런데 웬 일이냐. 그렇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난리를 쳐도 꼼짝도 않더만. 내일은 해가 두 개는 뜨려고 그러나.”
“호들갑은.”
그렇게 핀잔을 먼저 던진 크루그는 괜히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이래저래 너무 많이 받았는데, 당장 해드릴 수 있는 것이 그 정도 뿐이라서요.”
볼을 살짝 붉힌 채 부끄러워하는 미소년이라니,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순간 심장이 덜컥 주저 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크으… 소년! 네가 나를 감동시키는 구나! 자, 이리 와서 안겨라! 이 형이 꽉 끌어안아 주마!”
“됐거든요! 저리 안가요? 그런 취미 없거든요?”
“소년! 부끄러워 하지마라.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부끄럽지만 이렇게 꿋꿋하게 견디고 있잖냐.”
“부끄러우면 그냥 하지 말라고요!”
어쨌거나 그렇게 조금은 떠들썩한 시간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이 나라 최고 가문의 가주가 방문한다는데 그냥 되는대로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라, 식구들 모두가 일찍 일어나 집안 곳곳을 쓸고 닦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왜?”
형진의 반문에 유아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 제랄딘님의 아버지라면 딱히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쯧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를 차는 저 모습이 왜 그리도 얄미운지. 유아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하며 반문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하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손가락을 메트로놈처럼 까딱거리며 박자 맞춰서 대답했다.
“잘 생각해 봐. 제랄딘님이 전투 식량을 사갈 때, 그 돈은 어느 가문에서 나오는 돈이지?”
“그거야… 브라드로슈 가문이죠.”
“맞아. 게다가 얼마 전에는 침대도 새로 주문했지. 그럼 그 돈은 또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지?”
“그야… 공작님이죠.”
“그래! 바로 그거야. 물론 다른 곳에서도 돈은 들어오지만, 최근 가장 큰 규모로 목돈을 벌어들인 대상이 누구냐면 바로 그 양반이라는 얘기지. 이제야 감이 와? 그 사람은 단순한 제랄딘님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 분은 말이지, 나에게 금화를 물고 날아와 주는 아주 아주 멋진 호구, 아니 고객님이라고. 그런 큰 고객을 맞이하는데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줘야 하지 않겠어?”
“…”
유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목도리 상태로 분신들을 움직여 청소를 도우며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엘이 혀를 차며 말했다.
“뭔가 납득이 되네요.”
“그렇지?”
“네. 당신이라는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서요. 에효.”
“내가 뭘? 그 한숨의 의미는 뭐야?”
“글쎄요. 제가 무슨 말을 했었나요? 아, 날 참 좋다.”
“딴청 부리지 말고!”
그렇게 투닥거리며 청소를 마치고 조금 지나자, 한 무리의 기사들이 호위하는 화려한 마차 하나가 형진의 저택에 당도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오귀스트가 나가 문을 열어주자, 선두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있던 그랙커스가 그를 알아보고는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오랜 만이야. 어쩌다 보니 덜미를 잡혔달까. 하하. 일단 어서 공작님부터 모시게.”
“알았네.”
곧바로 마차는 저택 현관에 멈추어 섰고, 그곳에서 제랄딘이 키가 작은 중년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섰다.
“안녕하십니까. 이 집의 주인인 진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유아, 그리고 이쪽은 미엘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유아라고 해요.”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브라드로슈 공작은 의외로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뭐랄까. 작고 다부진 느낌의 남자라고 해야 하나. 저런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쭉쭉빵빵한 딸이 나온 것인지는 조금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만나서 반갑군요. 레이번케인 라스미어 브라드로슈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라드로슈 공작님.”
의외로 브라드로슈 공작은 형진에게 말을 낮추지 않았다. 왕국 최고 귀족이라면 적당히 거드름 정도는 피울 거라 예상했는데 좀 의외다.
형진은 살짝 의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제랄딘이 뭔가 미리 언질을 준 건가 하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형진은 일단 공작과 제랄딘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하지만 자리를 나누어 앉자 공작은 대뜸 형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집에 크룩스크루드 왕자님도 함께 머물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잠시 뵈었으면 합니다만.”
“…”
형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공작의 옆자리에 앉은 제랄딘을 바라보았으나, 그녀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이 말을 흘린 것이 아니라는 듯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크흠… 그게…”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하나 하고 잠시 머뭇거리는데, 문득 문이 열리며 크루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크루그를 보고는 급히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크룩스크루드 왕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형진은 살짝 놀랐다. 물론 이제는 그도 크루그가 왕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라야바르트에서 최고가는 귀족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는 모습은 솔직히 예상 외였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다시 자리를 나누어 앉았고, 크루그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공작은 형진은 제쳐두고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은…”
“잠시만요.”
하지만 크루그는 대뜸 손을 들어 말을 자르더니, 곧장 이런 말을 던졌다.
“공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만약 엘 파르드와 관계된 일이라면, 아직 어린 저보다는 형님에게 말씀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개하죠. 벨크라드진 엘 파르드. 제 형님이십니다.”
“…”
공작은 물론이고 제랄딘마저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은 채 크루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형진은 이 인간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고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등 뒤에 누가 서있는 건가 싶어서. 물론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형진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크루그에게 물었다. 설마 아니겠지하는 표정을 지은 채.
“나?”
하지만 크루그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여기서 제가 형이라고 부를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