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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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명성
유아와 미엘의 어쩐지 좀 쑥스러운 듯한 느낌의 설명을 듣고 난 제랄딘은, 이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녀들의 피부 비결이 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뿐인가. 예술품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그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피곤에 지쳐 자리에 누웠을 때 귓가로 흘러드는 그 영롱한 음악 소리는 또 어떠한가. 이 모든 것들은 이미 형진의 작품이 가구의 영역을 넘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에 마법과도 같은 효과까지 더해졌다면 이것의 상품 가치는 이미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형진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제랄딘님의 것도 만들어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것이라면… 수도로 가져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될 텐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진님은 그저 만들어 주시기만 하세요. 어려울까요?”
다급함이 서린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씩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죠. 다만 저희 식구들에게 먼저 만들어 줘야 하니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 정도야 당연히 기다려야죠.”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형진은 다시 만들고 있던 침대를 향해 돌아섰다. 제랄딘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가 작업 중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건… 카트린이 쓸 침대인가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서야 방해한 것이 아닌가 해서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형진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순순히 그 질문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살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이건 림의 것이나 제 방의 것과는 또 다릅니다. 이것은 침대이면서도 또한 놀이기구이기도 하죠.”
“아…”
솔직히 침대이면서도 놀이기구이기도 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랄딘은 끈덕지게 뒤에서 지켜보며 카트린의 침대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렸다.
“자, 다 됐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카트린의 침대는 완성되었다.
“이것의 이름은 ‘카트린을 위하여’로 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만큼은 카트린도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한 채 자신의 침대가 제작되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작품의 이름조차 ‘카트린을 위하여’. 명실공히 오직 카트린이라는 소녀를 위한 침대인 셈이다.
“다른 침대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죠.”
그런 설명과 함께 형진은 협탁에 놓여진 보석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 위치한 룬을 작동시켰고, 곧바로 영롱한 오르골 음악 소리와 함께 침대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다른 침대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침대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단순한 조각이라고만 생각했던 하얀 망아지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까 말씀드렸죠? 이것은 침대이며 또한 놀이기구이기도 하다고. 카트린, 한 번 타볼래?”
“네!”
눈을 반짝 반짝 빛내고 있던 카트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고, 형진은 일단 작동을 멈춘 다음, 휠체어에 타고 있던 카트린을 망아지 위에 태웠다.
“꽉 잡아야 됩니다. 이 망아지들이 이렇게 순해 보여도 의외로 장난꾸러기들이거든요.”
“아하하하.”
카트린이 망아지 위에 자리 잡자, 형진은 그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안전벨트를 채워주고는 목덜미에 자리 잡은 손잡이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보이는 이것을 힘주어 누르면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손잡이를 비틀어 당기면 속도가 빨라지고 이런 식으로 놓으면 다시 느려집니다. 그리고 이걸 당기면 바로 멈춥니다. 참 쉽죠?”
“네!”
“자, 그럼 아가씨, 한번 달려보실까요?”
형진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서자, 카트린은 일러준 대로 손잡이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머리맡의 보물 상자에 장치되어 있던 룬을 작동시킨 것처럼 침대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이 세계에 첫 번째 회전목마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회전목마가 아니었다. 카트린이 망아지 위에 앉아 조작하는 체계는 오토바이의 그것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시동과 가속, 감속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미 스쿠터 정도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회전목마는 그 자체로 새로운 탈것에 익숙해지기 위한 기초적인 시뮬레이터 역할도 하는 셈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부분까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아주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놀이 기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놀이기구라고는 해도 움직이는 물건이니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협탁에 놓여진 이 보물 상자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이것이 구동하기 위해서는 망아지에 장치된 것과 상자 안의 룬이 동시에 활성화되어야만 하고, 둘 중 하나라도 활성화가 풀리면 즉시 회전이 멈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별 말씀을요.”
그렇게 카트린의 침대에 대한 시연이 끝나자, 그것을 남매의 방으로 옮기도록 한 뒤 형진은 제랄딘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 곧바로 미엘이 차를 끓여 내왔다.
“일단… 지금까지 만들어진 침대는 이런 종류가 있습니다.”
형진은 종이에 쓱쓱 스케치 몇 개를 그려 제랄딘에게 내밀었다. 세공 기술이 장인의 경지에 오른 탓에, 스케치라고는 해도 각 작품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 있었다.
“요정의 꿈은 요정들을 위한 침대라 사람이 쓰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들을 위한 장식품 정도의 용도가 적당할 겁니다.”
“크게 만들면요?”
“그래도 되긴 합니다만, 구동 체계 자체가 다른 침대와는 좀 다른 편이라서요. 이걸 크게 만드느니 다른 침대의 외형을 좀 변형해서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렇군요.”
형진이 다음에 가리켜 보인 것은 자신이 쓰고 있는 침대였다.
“이것은 ‘영원이 깃드는 밤’입니다. 설명을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부부를 위한 침대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죠?”
“다섯 가지 음악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고, 회전 장치를 작동할 경우 천정 부분의 캐노피가 열리면서 거울이 나타납니다.”
“네?”
거울이라니? 앞서 유아에게서는 듣지 못한 설명이었기 때문에 제랄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천장에 거울은 왜…”
그렇게 반문하던 제랄딘은 이내 자신이 그 침대에 누웠을 경우를 떠올렸다. 천정이라면 침대에 누웠을 때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 보일 터. 게다가 형진이 이 침대를 굳이 부부용의 침대라고 설명한 것을 떠올리면…
화악!
제랄딘은 그제서야 거울의 용도를 확실하게 이해했고, 곧바로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이해하셨습니까.”
“벼, 변태.”
“그래도 효과는 확실합니다. 뭐,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
제랄딘은 그제서야 유아와 미엘이 머뭇거리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얘기, 아무리 여자끼리라도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느 정도 부부생활이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깔깔거리며 자신들의 일을 얘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아줌마들이라면 몰라도, 유아나 미엘은 아직 그런 조건에 해당 사항이 없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쪽은 앞서 보셨던 ‘카트린을 위하여’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침대죠.”
“…”
형진은 당황스러워 하는 제랄딘의 모습을 더 즐길까 하다가 그렇게 넌지시 얘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기본적인 구성은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게…”
제랄딘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앞서 처음 진의 방에 놓여진 침대를 봤을 때는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에게 부부를 위한 침대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괜히 침대의 효과를 견디지 못하고 여자를 끌어들여서 동생이라도 생기면 그것 역시 난감한 일 아닌가.
“거울은 빼면 안 되나요?”
“상관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가격은 알아서 나중에 성의껏 받기로 했다. 제랄딘이야 그렇다 쳐도 그녀의 아버지에게까지 공짜로 주기엔 뭔가 좀 아까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지금 상태에서 무작정 가격을 책정하기에도 다소 애매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게 더 무서운 일일수도 있었다. 왕국 최고 귀족의 체면이 있지, 이 정도의 예술품을 대충 후려친 가격으로 사들일 수도 없으니 모르긴 해도 제랄딘의 아버지는 자신의 여유 자금 대부분을 사례금으로 쏟아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최대한 빨리 제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일단 간단하게 계약을 맺고 난 뒤에야 제랄딘은 이곳을 찾은 이유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며칠 안에 기사단에서 사람이 몇 올 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대단한 건 아니고, 신녀이신 유아님의 힘을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토너먼트 도중에 부상자가 몇 생겼는데, 꽤 위중한 이들이 몇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죠. 유아, 괜찮겠지?”
“물론이에요.”
유아가 지닌 신녀의 힘은 상당히 막강하다. 어지간한 부상은 그녀가 회복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바로 완치되고, 장애가 생길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수준의 중상도 기적의 성광이면 충분히 완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 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형진은 이후로 호구신의 사제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기사단의 전투식량과 침대를 제작하는 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미엘의 일로 다소 서먹해졌던 제랄딘 역시 공적인 일로 교류를 이어가기 시작하자, 다시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휴식을 취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더 힘든 격무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침대의 효능 덕분에 형진의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어느 정도 미엘의 일로 인한 후유증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서고, 슬슬 미뤄두었던 대미궁의 탐색을 다시 시작해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즈음, 수도 라야로부터 한 무리의 병력이 그리칸을 방문했다.
기사단의 방문 자체는 이미 제랄딘으로부터 목적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기사단의 수를 전해들은 순간, 형진은 뭔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수가 단순히 부상자를 호송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 전체는 물론이고, 브라드로슈 가문에 속한 병력까지 총출동한 모양새이니 누가 봐도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챌만 했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대미궁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은 역시 대미궁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브라드로슈 가문의 기사단과 병력이 총출동한 상황은 설명이 되질 않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제랄딘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진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제랄딘님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일전에 다리가 부러졌다가 유아 덕분에 부상이 완치되었던 젊은 기사가 존경심마저 서린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형진을 바라보며 편지를 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얘가 왜이러나 싶은 느낌이지만, 일단 정중하게 서신을 받아 그 내용을 확인했다.
“엥?”
편지에는 조금 당황한 듯한 제랄딘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 오전 중에 자신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가 방문하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제랄딘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브라드로슈 공작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