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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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장악
형진이 입에 올린 이야기의 당사자들은 그 즈음 젝스트란이라는 어느 한적한 도시에서 신전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보고 있을 테니 가서 식사하고 오세요.”
“점심은 맛있게 먹었고?”
“여기 사제님들의 솜씨가 꽤 좋더라구요. 가시면 꼭 볶음 국수라는 걸 먹어보십시오.”
“그러지.”
먼저 식사를 마치고 온 할이 오귀스트 대신 성소의 입구에 버티고 선다. 사실 신상이 배치된 성소 인근에서는 성역 효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렇게 경비를 서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길 우려가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상이 들어설 즈음 하루나 이틀 정도 경비를 서는 이유는,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함과 동시에 그 지역의 상황을 잠시나마 살펴보기 위함이다.
할은 얼른 눈에 형진이 마련해준 색안경을 끼고는 오귀스트와는 달리 성소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경비를 서는 척 하며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언젠가 오귀스트가 집에 돌아가면 언제든지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데 뭐하는 짓이냐고 묻자, 그거랑 이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당당하게 대답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오귀스트는 저게 뭔 짓인가 싶지만, 덕분에 하마란을 더 이상 쫓아다니지 않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성소를 나와서 신전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은 김밥 천국을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하마란이 그를 알아보고는 한 손을 살짝 들어 보인다.
오귀스트가 앞자리에 가서 앉자 하마란이 잔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볶음 국수라는 걸 일단 미리 시켜 놨어요.”
“그랬군. 고마워.”
오귀스트는 하마란이 따라준 물을 마시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우편 서비스 등을 통해 소문이 꽤 돈 모양인지 오늘 막 문을 연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함께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맞춘 채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있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데, 문득 테이블 위로 올려둔 손을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감싸쥔다. 바라보니 하마란이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는 건가. 하마란은 뭔가 할 얘기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괜히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란.”
“네.”
“뭔가 할 얘기라도 있어?”
오귀스트의 말에 하마란은 잠시 말이 없다가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것을 멈추며 괜히 딴청을 피우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거스.”
“응.”
“식사 하고 시간 있어요?”
란이나 거스는 이 두 남녀가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다.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만 쓰는.
사실 이 두 남녀가 이렇게 조금 은밀한 연애를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할이 오고 난 뒤로 조금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는 저택 주위의 날파리를 때려잡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이후로는 이렇게 단둘이 빠져 나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할이 하마란을 쫓아다닌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셈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할은 어느새 하마란을 쫓아다니던 것도 잊고 요즘은 여신에게 푹 빠져 있다. 원래부터 금사빠 기질이 있는 할 때문에 잠시 휘둘린 감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할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두 사람이 이렇게 연인 관계로 급진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오귀스트는 슬그머니 손을 빼려고 드는 하마란의 손을 자신 쪽에서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막 좋은 분위기로 넘어가려는 그 시점에 하필이면 방해꾼이 등장했다.
“볶음 국수 두 개 나왔습니다.”
콧잔등에 살짝 주근깨 자국이 남아 있는 귀여운 견습 사제 하나가 커다란 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오자 둘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손을 놓았다.
할은 맛있다고 꼭 먹어보라고 추천을 했지만, 어쩐지 둘의 입맛에는 그리 맞지 않는 느낌이다. 할보다 훨씬 오랫동안 형진의 요리를 먹어서 입이 고급이 된 건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이거 큰일이네. 입이 너무 고급이 되버려서.”
“그러게요.”
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접시를 깨끗이 비운 후, 값을 치른 후 식당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히 신전을 빠져 나가 강가를 거닐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강가를 거닐다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즈음 문득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슥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렬적인 입맞춤을 나누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하마란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올려다 보며 말한다.
“거스.”
“응.”
“난 요리 못해요.”
오귀스트는 피식 웃었다. 아까 볶음 국수를 먹으면서 했던 얘기 때문에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큰일이군. 나라도 배워야 하나.”
“거스가요?”
“왜? 이상해?”
“이상하다기 보다는… 그냥 좀 미안해서.”
“그럼 그냥 둘 다 배우지 말고 계속 진님한테 얻어먹을까.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로 잘할 자신은 없는데.”
“풋. 뭐에요, 그게.”
오귀스트는 웃는 하마란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하마란은 그런 오귀스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다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끈다.
“란?”
오귀스트는 살짝 놀랐다. 이제 키스는 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런 식의 행동은 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싫어요?”
“싫다기 보다는… 좀 놀랐달까.”
그러자 하마란은 눈을 슬며시 피하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오귀스트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사인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럼… 지금 말고, 있다가 내가 찾아가면 될까.”
“…”
하마란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오귀스트의 가슴을 꼭 끌어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둘은 잠시 동안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할은 둘이 그런 식으로 땡땡이를 치고 있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여신의 목소리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의 일을 마치고 섬으로 돌아가자 마침 형진이 여신이 머물 거처를 완성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는 중이었다.
“와아아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신전 하나 가져 본 적이 없던 여신은, 형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집의 모습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신의 집은 작은 정원이 달린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되어 있었다.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이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작은 집이긴 했지만, 여신의 사이즈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크고 화려한 신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대리석 돌기둥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면 토끼들을 새겨 넣은 조각상과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작은 응접실이 나온다. 그곳에서 다시 뒤편으로 가면 침실이 나온다. 좌측은 욕실, 그리고 우측은 아름다운 드레스들이 가득 걸려 있는 드레스룸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봐도 신전이라기보다는 작은 인형의 집 같은 느낌이지만, 여신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급히 달려가 형진이 틈틈이 만들어준 가구들을 들여놓고 카트린과 이것저것 집안을 꾸미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엘은 침대에 또아리를 튼 채 누워서 수선을 떠는 여신과 카트린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다.
오귀스트는 여신과 카트린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슬슬 자신도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예전에 하마란과 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에 이런 걸 물은 적이 있다. 어째서 할이 아니라 자신이냐고. 물론 지금 떠올려 보면 참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싶긴 하지만, 하마란은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그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라면 좋은 아버지가 될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할은 배우자로서는 낙제점이나 다름 없다. 도박중독부터가 일단 점수를 왕창 깎아 먹고 들어가는데다, 비록 천벌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 되긴 했어도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리는 성격까지 여기저기 감점 투성이다.
하지만 오귀스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예전에 수도 라야에서도 손꼽히는 기사였을 당시만 해도 오귀스트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누가 봐도 출세할 일만 남은 전도유망한 기사인 그에게 이런 저런 매파도 참 많이 찾아오고, 파티에 가면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아가씨들도 많았다.
그랬던 그의 인기는 기사의 지위를 버리고 모험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기야 여자들이 보기에 그의 선택은 미친 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명성과 돈이 굴러들어올 텐데, 그런 자리를 내팽개치고 불한당이나 다름없는 모험가의 길을 가고자 하니 누가 그걸 좋게 보겠는가.
어떻게 보면 당시의 오귀스트는 여자들의 기준으로는 할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여자들과 인연이 없었다. 이따금 몇몇 풋내기 여성 모험가들이 그에게 한발 걸치기 위해 유혹을 해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귀스트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보이는 그런 값싼 유혹에 넘어갈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주체 못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라면 모를까 모험가의 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의 오귀스트는 이미 어느 정도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고루 경험한 처지였다.
그러다가 하마란을 만났다.
처음 하마란이 형진의 집에 왔을 때는 그도 별 생각이 없었다. 집안의 다른 여자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장신의 여성이라는 점과, 집행자들이 우글거리는 와중에 단 한 명 뿐인 수호자라는 점이 조금 특이하게 생각되었을 뿐이다.
확실히 어디서든 눈에 띄는 그 커다란 가슴이야 남자인 이상 절로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지만, 그건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찾아하는 하마란의 성실한 모습에 조금은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을 돌보는데 이골이 난 오귀스트의 성격이 집안에서 혼자 겉돌고 있는 하마란의 모습에 반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작은 어찌 되었든 간에 둘은 이제 서로가 없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그런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하마란에게서 마침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발자국 뿐이다.
그렇게 여신의 새집을 보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문득 형진이 다가와 오귀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오귀스트님.”
“네.”
“잠깐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형진은 음료수를 오귀스트에게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대미궁의 코어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진척이 되었습니까.”
오귀스트는 조금 놀랐다. 인위적인 코어를 제작해 대미궁에 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 바로 얼마전의 일인 것 같은데 벌써 대미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코어에 도달하다니.
“아직 완전히 도달한 건 아닙니다. 그냥 조만간 그렇게 될 거란 얘기죠.”
“그래도 충분히 대단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오귀스트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 무엇 때문에 모험이라는 일에 그렇게 매달렸는지에 대해 허무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 남자가 벌이는 일은 뭔가 발상 자체가 달랐다.
단순히 어두운 던전 속을 탐색하고 그곳을 정복하는 것을 넘어, 이 남자는 던전 그 자체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발상도 아니고, 설령 생각을 떠올렸다 한들 쉽게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오귀스트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귀스트의 물음에 형진인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귀스트님. 마왕이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