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0
260====================
54. 천벌
“쏴!”
부지휘관의 짤막한 명령이 떨어지자 허공으로 뛰어오른 형진을 향해 병사들이 일제히 석궁을 겨눈다.
기사의 눈에 자신감이 흐른다. 그가 보기에 이건 명백한 놈의 실책이었다. 지상에서라면 저 날렵한 몸놀림을 정확하게 예측해 화살을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상태라면 더 이상 피할 곳도 막을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 거느린 병력은 정예 중에서도 특별히 뽑은 정예들. 도망칠 곳조차 없는 허공에 뜬 목표물을 석궁으로 쏘아 맞추는 건 일도 아니다.
뜨드득!
검은 그림자가 별빛 속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 병사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석궁들이 일시에 발사되었다. 짧지만 그만큼 날카로운, 이 정도 거리라면 능히 철판으로 감싼 갑옷이라 해도 꿰뚫어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화살들이 마치 말벌로부터 벌집을 지키기 위해 날아오른 벌떼처럼 형진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은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수많은 화살에 꿰뚫려 고슴도치 같은 모습으로 변한 채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어떤 광경에 크게 놀라야만 했다.
화라라락!
만약 바닷가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다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불가사리라는 동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바닷가에서만 살아본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들어가 수중의 생물을 좀 더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는 자라면 문어나 해파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식의 경험이 전혀 없는 자라면, 사냥감을 잡기 위해 허공에 던져진 그물 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되었든, 그건 이미 상관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허공에 뛰어오른 그림자로부터 검은 빛의 무언가가 확 펼쳐지는가 싶더니 날아드는 화살들을 그대로 집어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촤촤창!
곧바로 말에 탄 채 지휘관을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든다. 상대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달자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곧바로 전투 태세로 접어든 것이다.
“합!”
그 중 앞선 기사 하나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빛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검을 휘둘렀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일단 튕겨내고 반격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검은 빛의 무언가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잠시 멈칫하며 검을 피하더니 시간차를 노려 기사의 미간을 꿰뚫어 버렸다.
“컥!”
미친.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기사는 자신이 타고 있는 말 머리 위에 무언가가 사뿐 내려앉는 것을 뻔히 지켜봐야만 했다. 검은 두건 아래 드러난 것은 씨익 말려 올라간 채 웃고 있는 남자의 입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가 마지막으로 이 생에서 본 영상이기도 했다.
“터스크!”
아마도 방금 일격을 맞은 기사의 이름인 듯한 단어. 선 굵은 외모의 기사 하나가 그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묵직한 메이스를 휘두르며 형진에게로 달려든다.
“흠.”
형진은 그런 기사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개구리 같은 자세로 말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 순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형진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달려들던 기사는 메이스를 휘두르려다 말고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손 하나가 허공에서 뻗어 나와 마치 물구나무를 서듯 기사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어?”
기사는 무언가가 투구 위에 턱 하고 얹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미처 위를 올려다보지도, 그렇다고 손에 들고 있는 메이스를 휘둘러 머리 위의 무언가를 떨어뜨리지도 못했다. 그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은밀한 일격이 마치 벼락치듯 정수리를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르르.
기사는 전기에 감전된 개구리처럼 사지를 떨며 그대로 움직임이 멈추어 버렸다. 머리 속을 파고든 차디찬 금속이 그에게서 사고는 물론이고 신체의 자유마저도 단숨에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흣차!”
형진이 가볍게 몸을 튕기며 허공으로 튀어 오르자, 메이스를 들고 있던 기사는 잠시 그대로 말안장 위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몸이 기울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쿠당탕!
기사가 있고 있던 갑옷이 얼어붙은 땅바닥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음을 낸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얼굴을 찌푸릴 뿐 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
지켜보던 모든 이들에게 침묵이 내려앉는다. 처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뒤이어 이루어진 행동들을 보는 순간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집행자인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지휘관으로부터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그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자 사뿐히 마차 위로 내려앉은 형진이 씩 웃으며 답했다.
“오, 대단한데. 보통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도 내가 집행자일 거라고 딱 짚어서 얘기하는 놈이 없던데. 자신은 절대 집행자가 달라붙을 정도의 흉악한 범죄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웃길 때가 많거든. 당신은 의외로 꽤 현명한 모양이야.”
정말로 현명한 자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만.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마저 아연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절망에 빠졌다. 집행자의 목표가 되었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휘관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 얘기는, 만약 지금 당신을 물리치고 살아남는다면 공포와 죽음께서 다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실 거란 뜻인가?”
그러자 절망에 빠졌던 병사와 기사들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다. 지휘관의 말을 통해 어떻게든 이 위기만 넘기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모양이다.
“킥.”
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몇 마디 말로 거느린 병력들의 마음가짐을 좌우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한 재능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하다못해 제랄딘이나 오귀스트만 되어도 어떻게 운좋게 한두 놈 정도는 도망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형진에게 걸린 이상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대로야. 그래서? 설마 나에게서 살아 나갈 자신이 있다는 얘긴가?”
“…”
적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를 고쳐 잡고 마음을 다잡을 뿐. 형진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거 재미있군. 그렇다면 나도 좀 더 재미있게 응대를 해야겠지.”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피리 형태의 작은 막대기를 꺼냈다.
“망상필드 발동.”
이어서 한 마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기이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혹시 결계? 아니면 동료들을 부르기 위한 신호? 그렇게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대응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지휘관을 향해 형진은 키득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갖고 싶었어? 하지만 정말로 그것을 원했다면, 호구신 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희망과 생명의 여신을 능멸하고도 희망을 품고자 하다니,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호구니까 그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싶었던 건가?”
지휘관은 물론이고 기사와 병사들 역시 입술을 깨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형진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마침내 선고를 내렸다.
“어림 없는 소리. 따라서 이제 공포와 죽음의 뜻을 받드는 내가 너희들에게 내려진 형벌의 이름을 고한다. 너희들이 겪어야 할 것은 바로 절망.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공포에 짓눌려 죽어가라.”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세상이 변화했다.
방금 전까지 전해지던 모든 감각이 일순 차단된다. 빛도, 소리도, 촉감도 그 무엇도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린다.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아무리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그들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심장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느껴지지 않는다.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는 물론이고, 가슴이 자리하고 있어야 할 장소 역시 그저 빈 허공에 불과했다. 아니, 그것을 느끼기 위한 손조차도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정지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의 세계.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벌은 바로 상실이라는 이름의 절망이었다.
끝도 없는 심연 속에 가라앉는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이라는 늪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늪 속으로 빨려드는 와중에도 그들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형진은 마차 위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눈앞의 인간들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우성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음…”
뒤늦게 마을 안의 목표들을 제거하고 도착한 오귀스트와 제랄딘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들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왔어? 아, 그 앞으로는 다가서지 마. 망상 필드가 발동 중이거든. 집행자는 정신이 보호되니까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
잠시 기다리자 그들의 아우성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모든 비명 소리가 잦아들자, 형진은 망상필드를 거두어들이고는 아직 숨이 남아 있는 자들의 생명을 하나씩 차근차근 거두어 들였다. 오귀스트와 제랄딘이 도우려 했지만 형진은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괜찮아. 어차피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할 일이기도 하니까.”
“…”
어떻게 보면 이들도 결국은 형진이 파놓은 덫에 빠진 가련한 사냥감들에 불과하다. 오귀스트와 제랄딘은 무거운 형진의 말에 뭐라 대답하지도 못한 채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휴. 끝났네. 고마워. 기다려 줘서. 오귀스트님도요. 그럼 이제 이 자들을 여기 이 마차들에 싣는 일을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시체를요?”
“네. 어차피 이들은 명령을 받아 그것을 수행한 자들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이들에게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아하.”
곧바로 시체들을 마차에 실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들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까지 몽땅 준비된 마차에 실었고, 신전 입구에 시커먼 숯덩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자들의 시신까지 빠짐없이 가져다 실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나자, 형진은 성역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아에게 말했다.
“요정들을 불러서 마을 안팍을 좀 치우는 것이 좋겠어. 지금 이대로라면 여러모로 흉흉한 소문이 돌 테니까.”
“네.”
유아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명이 죽어간 것이 안타까운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신전의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는 해도, 희망과 생명의 뜻을 따르는 그녀로서는 이렇듯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다녀올게.”
“네.”
유아의 환송을 받으며 일단 요정의 나라로 시체들이 가득 담긴 마차들을 옮긴 형진은, 대기 중이던 수호자들을 불러들였다.
“감히 계약을 어기고 신전을 범하려던 자들이 있다고?”
요정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급히 달려온 아디슈는 형진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맞아.”
형진은 일단 그렇게 긍정하고는 시체가 담긴 마차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일단 신전을 범한 놈들은 우리가 처리를 했지만, 이후의 일은 계약의 수호자들이 나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알겠다. 감히 신의 이름으로 맺어진 계약을 어기다니, 신뢰와 헌신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겠다.”
어쩐지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어떤 만화의 대사가 떠올라서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하지만 곧이어 우락부락한 수호자들이 마법 소녀 차림으로 그런 대사를 남발하는 모습을 연상하는 순간 형진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근엄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웁, 쏠린다. 이건 상상외로 강력하다.
“좋아. 그럼 믿고 맡기도록 하지.”
“알았다. 맡겨 두도록.”
딱딱하게 굳은 형진의 표정에 아디슈는 이 남자도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게 앞에서는 이토록 진지해지는 구나 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