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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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눈덩이
형진의 이름이 나온 순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렇게 언질이 되었다면 여기서 당장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 탓이다. 아니, 그런 언질이 없었더라도 길드에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간단하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의 길드라도 당연한 일인데, 이들이 속한 길드는 단순히 엘리시온을 즐기는 유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그런 길드조차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오빠가 그랬어요. 분명히 다시 찾아오게 될 거라고.”
“그래요?”
일전에 수빈이 찾아왔을 때 형진이 요리를 하면서 흘렸던 한 마디를 기억해 낸 카트린이 제랄딘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인다. 제랄딘은 그 말을 듣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진이 그렇게까지 미리 말했다면, 분명히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잠시만요.”
따로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측근 비서에 가장 가까운 입장인 제랄딘이 모두를 대신해 메시지를 통해 형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한스푼이란 분이 길드에 받아달라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까요?]형진은 바로 그녀의 메시지에 답했다.
[한스푼? 아, 그 여자인가 보군. 일단 데리고 있어. 있다가 점심 먹으면서 얘기를 해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응. 재미있게 보고와.]구체적인 얘기가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형진이 누군지 알아들은 것만으로도 일단 거짓말일 가능성은 낮아졌다. 제랄딘은 메시지를 끝내고는 수빈을 향해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전해 주었다.
“지금 당장은 바빠서 어려울 것 같고, 있다가 점심때쯤 만날 수 있다고 하시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형진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가 속한 길드까지 전부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길드를 나와 개인으로서 찾아오게 되면 문전박대를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요리 장인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사실 육식 길드 입장에서 수빈은 별 소용이 없는 인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저쪽 세계의 관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얘기지만, 적어도 수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 해도 저쪽 세계의 사정 같은 걸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남을 허락 받았다고 해서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입사 시험으로 치면, 이제 겨우 응시 자격을 허락 받은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류 전형부터 시작해서 필기 또는 실기를 거친 다음 면접까지 다 끝내야 비로소 당당한 사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처럼, 수빈은 이제 겨우 타나토노트10 길드의 일원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수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을 위한 헌신적인 가이드가 되어 주어야만 했다. 어쨌든 아직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개개의 길드원들과 친목을 다져 놓으면 그만큼 길드에 들어가기 쉬워질 것은 분명한 일 아니겠는가. 설령 길드 가입에 실패하더라도 길드원들의 성향을 파악해 베일에 싸인 타나토노트10 길드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된다.
“휴…”
표를 사고 자리를 나누어 앉는 일까지 끝내고 나서야 수빈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첫 단추는 그럭저럭 잘 잠근 셈이라고 자평하며, 영화 상영 도중 날아올지 모르는 질문이라든가 요청에 대비해 정신을 가다듬는다.
“아…”
“음…”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극장에 끌려왔을 때처럼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지거나 하지 않았다. 처음 봤던 영화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이들로서는 생소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질문이 쏟아졌던 경향이 있었던 반면, 인어공주는 물속에 사는 유사인종인 인어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물어보거나 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이해될 만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카트린과 여신이 이미 스포일러를 꽤 해버린 것도 있고, 대부분 그렇게 조용히 감상을 하고 있으니 괜히 입을 열어 다른 이들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이전과는 달리 질문이 확 줄어버린 또 한 가지 이유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이전과는 달리 다소 정숙한 분위기에서 감상이 이어지자, 조금 여유가 생긴 수빈은 그렇게 영화를 감상 중인 이들을 힐끗힐끗 살펴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역시 겉모습만 봐서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저 이번에 처음 보게 된 유아나 제랄딘의 미모에 같은 여자로서 부러움이 느껴진다는 정도가 고작이랄까. 그나마도 그녀의 눈길을 알아챈 제랄딘의 시선과 마주치는 바람에 더 이상 살펴보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야만 했지만.
아무래도 생각이 딴 데 가 있다 보니 다른 이들처럼 영화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수빈은, 문득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을 닮은 아주 작은 무언가였다. 온몸에는 하늘거리는 얇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영화관 안에 흐르는 작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스륵.
문득 그것이 고개를 돌리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소리로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친다. 순간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멎어 버렸다. 숨을 쉬어야만 한다는 생물로서 아주 당연한 행동조차 그 순간 잊어 버리고 만 것이다. 본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지금 이순간 그녀는 잊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원근감 같은 건 싸그리 무시된 채 그 무언가의 시선에 사로잡혀 버린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작은 나비처럼, 아니 최소한 거미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라도 가능한 나비와는 달리, 그녀는 다른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몽롱한 세계 안에 그대로 사로 잡혀 있었다.
생긋.
그 무언가는 문득 그런 수빈을 향해 작게 미소 짓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고 나서야, 수빈은 비로소 다시 숨 쉬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헉, 허억… 허억…”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몇 초. 하지만 수빈은 그 안에서 영원을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그녀는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모든 자유를 상실한 채 그 눈빛을 마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수빈의 몸은 순간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몸과 마음은 신이라는 이름의 존재감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리는 바람에 크게 놀라버린 것이다. 이미 신의 추종자이거나, 보호와 균형을 통해 신이라는 존재에게 친숙해진 다른 이들과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적어도 그녀는 이런 식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마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지독한 멀미에라도 걸린 것처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수빈의 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바로 유아였다.
“그, 그게…”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수빈은 그렇게 더듬거리는 대답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유아는 수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마치 무릎을 고무망치로 툭 쳤을 때 일어나는 반사 작용처럼 그녀에게 회복을 걸어주었다. 아픈 누군가의 상세를 살피고 그것을 고쳐주는 것은 그녀에게는 이미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아…”
수빈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손으로부터 따뜻하면서도 시원하고 또한 상쾌하면서도 안락한 기이한 어떤 힘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거칠어졌던 숨결은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고, 연신 배어나오던 식은땀 또한 조용히 진정이 되어 간다.
“어때요?”
“감사합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요.”
유아는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만히 손을 뻗어 수빈의 이마를 짚어 정말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음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어쨌든 갑작스런 사태는 그런 식으로 진정이 되었지만, 수빈은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설마 상태 이상 같은 것에 빠졌던 것인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극장 안은 어떠한 적대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 안전지대. 설령 그럴 의도가 있었더라도 절대로 상태 이상과 같은 것에 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자신이 겪었던 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사태는 모면했지만, 그렇게 배어나온 땀은 여전히 옷깃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착각도 무엇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수빈은 이전에 자신이 겪었던 어떤 상황과 방금의 일이 비슷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바로 얼마 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화를 감상중인 소년과 마주했을 때도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전신을 옥죄는 듯한 느낌에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어야만 했다.
물론 방금 전의 그 일은 소년이 뿜어내던 어떤 기운과는 달랐다. 눈이 마주친 순간 죽음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소년과는 달리, 지금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무언가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몽롱한 어떤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보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블랙홀과 같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경험했던 것은.
수빈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시선을 돌려 그 무언가를 바라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처음이야 그렇다 쳐도, 아니 처음에 그렇게 강렬한 경험을 해버린 탓에 두 번째를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후아아…”
“우으으으… 허, 허리가…”
“쿡. 제가 좀 봐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고맙죠. 하하.”
오랜 시간 미동도 않고 영화를 지켜본 탓에 몸이 굳었던 할이 기지개를 펴다가 끙끙 앓는 모습에 유아와 카트린이 번갈아서 회복과 균형의 권능을 써준다.
“여신님. 어떠셨어요?”
“아… 끄, 끝난 건가요.”
“네. 아마도요.”
“하아아…”
특유의 몽롱한 눈빛으로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 있던 꽃과 바람은 제랄딘의 대답을 듣고는 안타까움 가득한 탄식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색기발랄한지, 질문을 던졌던 제랄딘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잘 됐어… 정말…”
“흑… 흑흑…”
마유나와 로트나는 감정 이입을 좀 심하게 했는지 해피 엔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썽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어공주와 마녀에 누군가를 대입시킨 탓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구체적인 것까지는 함부로 입에 담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나온 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아까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경황이 없어서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작은 생명체들의 모습들. 수빈은 식구들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뒷모습으로나마 그 작은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펫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겠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뭔가가 석연치 않다. 안전지대에서 눈이 마주친 상대를 옴짤달싹 못하게 만드는 그런 기이한 시선을 가진 펫이라니, 어떻게 보면 밸런스 자체를 붕괴시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펫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펫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자신의 앞에서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걸친 모습으로 마치 나비처럼 사뿐 사뿐 허공을 걷고 있는 저 존재는.
그렇게 홀린 듯한 모습으로 꽃과 바람의 뒤를 쫓고 있던 수빈은 어느 틈엔가 길드성에 도착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서오세요!”
식당으로 들어가자 인던에서의 일을 마치고 먼저 와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던 형진과 여신이 그들을 반긴다. 수빈은 또다시 나타난 작고 아름다운 무언가에 화들짝 놀랐지만 다행히도 아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호와 균형의 귀여운 모습에 살짝 가슴이 떨리긴 했지만, 앞서 꽃과 바람의 존재감에 놀랐던 것 같은 상황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보호와 균형이 지닌 존재감이 부족한 것도 있고, 한번 그렇게 놀라고 나니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것도 있다.
형진은 식구들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오는 수빈의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식사가 끝난 뒤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