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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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추종자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고작 편의점에 도시락을 사러 갔다 온 것 뿐인데 운동장을 전력질주로 몇 바퀴나 돈 것처럼 숨이 가빠온다. 단순히 격렬하게 움직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그녀를 덮쳐왔던 상황들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나가기 전에 샤워를 했는데 들어와 보니 다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갑갑하다. 일단 도시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다 미처 데우지도 않고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자렌지에 넣으려고 포장을 뜯는데, 이건 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뜯어지는 건지.
어찌어찌 포장을 뜯고 전자렌지의 시간을 맞춰 놓은 다음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가서 바로 샤워를 한다.
아, 개운해.
미지근한 몸이 전신을 흘러내리는 감각이 이렇게 개운한 건지 미처 몰랐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비누칠 같은 건 하지도 않은 채 샤워기 앞에 가만히 서서 물을 맞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리 돌려둔 전자렌지의 타이머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수빈은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대충 거품을 내서 몸을 닦아내고 한 번 물을 맞았다. 그냥 이대로 계속 물을 맞고 있는 건 어떨까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속옷을 챙겨 입으려다가 땀에 젖은 느낌이 불쾌해서 그대로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는 목욕용 가운만 몸에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거의 항상 커튼을 쳐두고 있으니 이런 차림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먼저 머리부터 대충 말린 수빈은 전자렌지를 열고 안에 담겨진 도시락을 꺼내 식탁겸 책상으로 쓰는 작은 상에 가져다 놓았다.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느라 다소 시간이 지체된 탓에 조금 식어 버렸다.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켠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한다.
우물우물.
뉴스를 보며 거의 기계적으로 도시락의 내용물을 입으로 옮겨가던 수빈은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맛없어…”
그랬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도시락이 맛없다. 요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주제에, 실제로는 귀찮아서 걸핏하면 사먹는 도시락. 평소엔 그냥 저냥 생각 없이 먹을 만했는데. 오늘은 꼭 모래를 씹어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째서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빈은 아까 점심 때 게임 안에서 먹었던 카레돈가스가 생각났다. 나이프로 썰어내는 순간 확 퍼져 나오는 그 후끈한 육즙의 향기라니.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그득하게 고인다.
“후우…”
그렇다. 지금 갑자기 도시락이 맛없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그 말도 안 되는 요리를 먹고 난 후유증인 셈이다. 신들이나 먹는 천상의 음식 같은 걸 경험해 버리고 나서 대량생산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니 그 차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그 요리들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버린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여신이라든가 그 외의 다른 일들은 현실로 받아들여 버린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임 속에 존재하는 음식들을 현실로 가지고 나오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음식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장비들도 전부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훈련 중에 착용하라고 진이라는 남자가 건네주었던 부스터 장비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스터 장비들은 확실히 탐이 난다. 그것이 현실에 정말로 존재한다면, 공부가 안 돼서 머리를 싸매고 끙끙 거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오늘 길드성 뒤뜰에서 수련했던 것처럼 전력으로 집중해서 딱 한 달만 공부할 수 있으면 이 지겨운 시험공부 따위는 단숨에 클리어 해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수빈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참 웃긴 일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집중력이라면 좀 더 훌륭한 일에 쓸 수도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기계적으로 도시락을 입으로 옮겨간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대충 용기를 씻어서 재활용 쓰레기에 넣어두고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하루 종일 게임에 접속해 있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보니 이제 와서 다시 책을 펴놓고 앉기도 귀찮아진다. 아니,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기만 하다.
어두운 골목에서 남자들이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것을 전부 제쳐두고 일단 이동 스킬부터 익히라고 밀어 붙였던 남자의 의도를 아까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째서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어설프게 호신술을 익히는 것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뺄 수 있는 이동 스킬이야말로 지금의 그녀에게는 더 적합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권능… 인가.”
수빈은 침대에 누운 채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손등에 여신이 새겨준 꽃의 낙인이라는 것이 새겨져 있었다. 착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하지만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이자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작은 바람이 손끝을 휘감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지 작은 바람의 요정 같은 것이 손끝을 따라 노니는 감각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아직 그리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여신이 전해준 힘 가운데 하나인 바람의 권능이다.
그리고, 지금 손가락으로 희롱하고 있는 바람 외에 그녀가 여신에게 전해 받은 또다른 권능이 바로 꽃의 권능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아직 자신의 몸에서 풍겨지기 시작한 향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손끝을 감싸고 있는 작은 바람처럼 확실하게 느껴지기라도 하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하지만 편의점 알바의 그 멍한 표정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따라오던 남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역시 꽃의 권능도 확실하게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리라.
가만히 몸을 일으켜 손거울을 바라본다.
어제만 해도 부석거리는 피부와 머리카락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연거푸 샤워를 두 번이나 해서 그런지, 아니면 유아라는 분이 베풀어준 회복의 효과 때문인지 스스로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피부가 보송보송한 느낌이다.
“흠…”
역시 뭔가 좀 달라진 건가. 피부가 좀 좋아진 것 외에는 딱히 뭔가 특별해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거울을 들여다보며 괜히 이리저리 표정도 바꾸어보고 포즈도 잡아보고 하는데, 문득 탁자 위에 올려둔 전화기가 부르르 떨린다.
확인해 보니 승희라는 이름이 떠있다. 이전에 몸담았던 요리 길드에서 자신을 항상 언니 언니하면서 따르는 동생이다.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연락하는 길드원은 이 아이가 유일하다. 정확히는 요리 블로그를 운영하다가 알게 되어 같이 게임까지 하게 된 사이다.
“여보세요.”
-언니? 어떻게 됐어? 잘 됐어?
다급한 목소리. 어지간히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하기야 지금까지 초식 길드에서만 서식하던 가냘픈 양 한 마리가 느닷없이 육식 중에 육식으로 손꼽힐 만한 길드로 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 수빈 스스로도 속으로 엄청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니까. 물론 막상 그 실체를 열어 놓고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 버리긴 했지만.
확실히 그 길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의문이 남는다. 여신의 존재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현실에서까지 통용되는 능력을 전해주는 이들이라니. 수빈은 컴퓨터라든가 게임이라든가 프로그래밍이라든가 하는 영역의 일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것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다.
-언니? 괜찮아?
잠시 아무런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수빈은 다시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승희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응. 괜찮아.”
-정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있었다. 말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일이. 아니, 지금 여기서 전화기를 통해 얘기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 만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냥 좀.”
-흠… 어쨌든 길드는 들어간 거야?
“응.”
-정말? 뭔가 다른 조건을 걸지는 않았고?
이를테면 퀘스트 전담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보통 초식 유저가 육식 길드에 들어가면 그런 식의 조건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들은 수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능이라는 힘을 전해 주고 현실에서도 쓸 수 있는 스킬을 전수해주기까지 했으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부스터 아이템은 물론이고, 앞으로 장비까지 알아서 맞춰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여신이 관계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긴 해도, 일반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우다.
“딱히.”
-정말? 의왼데.
“그쪽은 어때? 분위기라든가.”
떠맡기듯 빠져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이 만든 길드다. 비록 육식 길드들의 등쌀에 치여서 길드 하우스도 없고, 사람도 몇 남지 않은 초라한 길드이긴 해도 애착이 없다면 말도 안 되는 일.
-그냥 뭐… 그렇지. 그나마 언니까지 그렇게 나가 버리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분위기가.
“역시 그런가.”
그나마 지금까지 길드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은 수빈이 어거지로라도 계속 끌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구심점이 사라져 버렸으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대부분은 택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실 육식 길드로 넘어가서 결말이 좋았던 사람이 없잖아. 그냥 일반적인 육식 길드로 가도 그런데, 그런 육식 길드를 잡아먹는 육식 위의 육식 정도 되는 길드에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들어가더라도 제대로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긴.”
단순히 분위기를 전하는 것을 넘어 걱정이 다분한 목소리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어떻게 보면 오지랖이 넓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승희는 게임 외적인 요소를 통해 만난 사이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승희가 몸이 살짝 불편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병명은 천식.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완치가 사실상 불가능한 난치병 중에 하나이고 그만큼 고통스러운 병이기도 하다. 승희는 그나마 증세가 많이 완화되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세먼지 주의보 같은 것이 발령되는 날은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승희는 엘리시온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수빈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바로 유아라는 사람의 회복 능력이 그것이다.
확실히 그 회복 능력이 불치병 같은 걸 치료할 수 있다고 확정된 건 아니다. 하지만 아름이라는 아이가 자신의 무릎 부상이 완치되어 버렸다고 말한 걸 생각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신의 힘을 통한 기적이라면 논리적인 이유를 찾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수빈은 길드 분위기에 대해 재잘재잘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승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승희야.”
-응?
“너도 우리 길드 들어올래?”
말 해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자신이 만든 한입만 길드가 아니라, 오늘 가입한 타나토노트10을 우리 길드라고 지칭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디? 그 육식 길드?
“응.”
-킥. 혼자서 고생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
“아니야. 얘는. 날 뭘로 보고.”
수빈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내일 구경이라도 하러 와봐.”
-정말? 그래도 돼?
바로 가입하라고 몰아붙이는 건 역시 부담스러울까 싶어서 그렇게 방향을 선회했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유아라는 사람에게 회복을 받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아니, 대놓고 여신이니 뭐니 하면서 길거리에서 종교 가입을 권유하는 사람처럼 들이대는 것보다, 이쪽이 나을 수도 있다.
다행히 그런 수빈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승희 역시 요즘 유저들 사이에 소문 자자한 강대한 육식 길드의 실체에 대해선 궁금하던 참이다.
-그럼… 내일 귓 넣을게. 언제쯤 접속할거야?
“오전 중에.”
-헤에. 역시 이거 어쩐지 불안한데. 하루 종일 군만두 먹이면서 퀘스트 노예시키는 거 아니야?
“넌 그렇게 언니를 못 믿니?”
-농담이야. 농담.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그럼 내일 봐.
“응. 잘 자.”
-언니도.
다단계가 무서운 건 이래서다. 그것이 호의든 악의든 간에, 계속해서 사람을 통해 퍼져가기 때문이다. 마치, 전염병처럼.
그렇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전염병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거짓된 천국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그런 치명적인 전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