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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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데뷔
그리고 다음날.
“끄후어아으어아으으으…”
뭐라는 건지도 알 수 없는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있는 힘껏 기지개를 편 형진은, 목과 어깨를 한손으로 주무르며 밤새도록 매달려서 만들어낸 성과물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낸 그 신상은, 이전에 만들었던 보호와 균형의 그것과는 달리 제법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딜 뛰쳐나간다거나 하는 식의 자세를 담은 것은 아니다. 단지 다소 정적인 느낌의 보호와 균형의 신상과는 달리 바람을 맞으며 날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 등의 표현이 보는 이로 하여금 훨씬 동적인 느낌을 주는 정도랄까.
“음. 좋아.”
사실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로 꽃과 바람이라는 여신의 모습을 스케치로 담은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그녀의 매력을 보다 부각시킬 수 있는 형상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만들어진 신상의 모습을 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아쉬운 기분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공포와 죽음의 신상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상관 없지 않겠는가.
[흥.]“…”
방금 어디서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형진은 그런가보다 하며 아틀리에를 정리하고는 신상을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아틀리에를 빠져 나왔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는 않아서 어둑어둑하다. 어두운 주위 모습에 설마 하루를 완전히 넘겨 버린 건가 싶어 얼른 시간을 확인해 봤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휘장이 쳐진 침대 위에 마눌 둘이 나란히 누워서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유아는 그렇다 쳐도 제랄딘까지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것은 또 흔치 않은 모습이라, 형진은 가만히 휘장 밖에서 그런 마눌들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제랄딘 정도는 깨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주 깊이 푹 잠이 들어 버렸는지 둘다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형진은 잠시 더 지켜보다가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근처에 놓여진 의자에 대충 걸어두고는 침대 안으로 올라갔다.
“으음…”
그러자 문득 유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더니 옆으로 다가가 눕자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품 안으로 들어온다. 살짝 따끈따끈한 느낌의 부드러운 몸의 그 감촉이라니.
“애기냐.”
사람의 몸은 본래 잠이 들면 체온이 약간 떨어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단, 예외적으로 오히려 체온이 약간 올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아기들이 그런 경우다. 아무래도 유아의 경우엔 신녀가 되면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재생력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어찌되든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형진은 피식 웃으며 유아의 몸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훈훈한 느낌의 부드러운 몸이 품 안에 들어오니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응…”
형진의 손이 등을 가만히 쓰다듬기 시작하자, 유아는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더욱더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정말 영락없이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유아를 품에 안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는 생각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주위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잠이 들기 전과의 차이라면, 제랄딘까지 그의 품안에 들어와 잠들어 있다는 정도.
“깼어요?”
문득 품안에 들어와 있던 유아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묻는다. 사실 깬 거야 그냥 눈 뜬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 이것은 자신 역시 깨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응. 잘 잤어?”
가만히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며 그렇게 대답하자 유아는 배시시 웃더니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그에게 입을 맞춘다.
“언제 왔어요? 중간에 본 것 같기는 했는데.”
역시 완전히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확실히 그 반응은 반쯤 비몽사몽이란 느낌이긴 했다.
“새벽에.”
“신상은 다 만든 거에요?”
“응.”
“수고하셨어요. 상 줄게요.”
유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맞추어 준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더 길고 뜨겁게.
“으응…”
그런 유아의 기척에 잠을 깼는지 제랄딘 역시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을 뜬다. 좀처럼 보기 드문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에 형진과 유아의 표정엔 절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잘 잤어?”
형진이 그렇게 물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지만, 제랄딘은 대답대신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부벼댄다. 배고프다고 엄마의 가슴에 매달리는 아기 양처럼.
“이거 큰일이네.”
“왜요?”
“마눌들이 전부 어리광쟁이 뿐이라서.”
“킥.”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하루 종일 뭉개고 싶지만, 아쉽게도 형진은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가 않다. 때문에 그들은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젠 좀 편해져도 좋을 것 같은데. 어쩐지 점점 더 쉴 틈이 없어져 가는 것 같아.”
투덜대며 시트를 널어 말리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은 빙긋 웃고 말았다. 말로는 저래도 실제로 일을 찾아하는 건 바로 형진 자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카트린도 잘 잤어?”
“네!”
시트를 널어 말리고 간단하게 집 안팎을 청소하고 있자니, 다른 식구들도 하나둘 일어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신님.”
“안녕… 하세요…”
조금 지나자 몽마들의 시중을 받으며 두 꼬맹이 여신들이 형진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형진은 어쩐지 밤잠을 이루지 못한 듯 눈가가 거뭇한 꽃과 바람의 모습에 빙긋 웃고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 할만한 주제를 꺼내들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신상이 완성되었는데 보시겠습니까?”
“네!”
역시나 꽃과 바람의 시선은 형진의 말 한 마디에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바뀌어 버린다. 겉보기에는 사람 몇은 우습게 홀릴 것 같은 모습인데, 보이는 반응은 보호와 균형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형진이 신상을 공개할 기미를 보이자 이내 다른 식구들도 몰려 나와 기대어린 시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 보호와 균형의 성물을 만들어 냈을 때도 그랬지만, 형진의 손을 통해서 만들어진 신상이 여신과 마주하는 장면은 놓치면 후회할 만한 순간이 될 것이다.
모두가 모이자 형진은 마침내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던 완성품을 그들 앞에 꺼내 보였다.
“아…”
“와아…”
그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바람 가득한 언덕, 그 중에서도 꽃이 만발한 봄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여신의 모습을 담은 듯한 그 신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꽃내음 가득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이름은 ‘설렘’.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여신님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설렘…”
꽃과 바람은 형진이 말해준 신상의 이름을 되뇌이며 몽롱한 시선을 보낸다.
어떻게 보면 신상에는 걸맞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었다. 또한 그 이름 또한 신상과는 걸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신성의 대단한 점은,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바로 사람의 마음 속에 각인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꽃과 바람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린 신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멍하니 신상을 바라보는 꽃과 바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보호와 균형은 문득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신상 쪽으로 밀어 주었다. 떠밀리듯 앞으로 나선 꽃과 바람은 그런 보호와 균형의 행동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앞으로 나가 자신의 모습을 새겨 넣은 신상에 손을 댔다.
그러자 옅은 빛이 여신과 신상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은은한 꽃향기가 가득 담긴 한줄기 바람이 솟아올라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다.
[축하합니다! 성물이 탄생했습니다!] [공포와 죽음의 성도인 진에 의해서 만들어진 걸작 조각품 ‘설렘’이 꽃과 바람으로부터 인정받아 성물로 각인되었습니다.] [꽃과 바람의 성물 ‘설렘’에 의해 일정 반경 이내에 성역이 활성화됩니다!] [꽃과 바람의 성역 안에서는 언제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향기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연이 있는 자는 성역 안에서 성물을 통해 기원을 올리는 방법으로 꽃과 바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흠…”
잘 될까 싶었는데, 한 명에 불과하긴 해도 제대로 추종자를 만든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제대로 성물로 각인되었다.
“아… 좋다.”
“정말요. 너무 좋은 냄새에요.”
신상은 메시지대로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나서 날뛰던 사람이라도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잠시 자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을 듯한 그런 느낌이다.
나쁘지 않다. 보호와 균형처럼 일정 지역에서 분쟁 자체가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강력한 효과지만, 이렇게 향기를 내뿜어 그 존재감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 또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꽃과 바람의 이미지를 새겨 넣는 데는 무척이나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이 새로운 신상 쪽이 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분쟁이 벌어지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기 어려운 보호와 균형의 성역과는 달리, 꽃과 바람의 성역은 누구라도 그 실체를 단숨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쥐꼬리만큼 밖에 없는 힘을 모조리 쏟아부은 탓에 꽃과 바람은 이내 비틀거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한번 같은 일을 겪었던 보호와 균형이 몽마들과 함께 재빨리 부축한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가뜩이나 몽롱한 느낌인데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파리한 안색까지 더해지자 어쩐지 더욱더 색정적으로 느껴진다. 형진은 어쩐지 홀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별 말씀을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형진은 곧바로 무언가를 조작하는가 싶더니, 두 여신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 함께 신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조정을 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따로 자신들의 신도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꽃과 바람께서는 아직 이런 일이 생소하실 테니 보호와 균형께서 처음 얼마간이라도 도움을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보호와 균형은 당연하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꽃과 바람의 손을 잡았다.
“아…”
다른 이들의 눈에는 단순히 두 여신이 손을 맞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 순간 보호와 균형이 자신의 신도가 있는 대화방에 꽃과 바람을 초대한 것이다. 꽃과 바람이 작은 탄성을 터뜨린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여러분, 제가 오늘은 친구를 소개시켜 드릴게요.
-친구요? 여신님의?
-와아! 어떤 분이시죠?
-혹시 친구분도 여신님?
-네. 맞아요. 자, 인사해.
-안녕… 하세요. 꽃과 바람이라고 합니다.
-와아아! 목소리 너무 예뻐!
-살짝 졸린 듯한 느낌이 특히 매혹적이시군요. 이거 좀 놀랬습니다.
신상을 통해 여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신도들은 곧바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냈다. 여신과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무려 친구까지 가세를 하다니!
잊혀진지 오래 되어서 이렇게 사람들의 환대를 받아본 기억조차 희미해진 꽃과 바람은 몸 둘 바를 몰라하기 시작했다. 보호와 균형은 그런 꽃과 바람의 모습에 작게 웃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꽃과 바람의 신상이 각지에 들어서게 될 거에요. 그러니 얘한테도 많은 성원을 부탁드려요!
-정말요?
-혹시 어디부터 들어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제일 먼저 가서 참배할게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신자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보호와 균형은 호구스러움을 타고난 여신답게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잘 되었다며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