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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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잠식
어딘가에서는 그렇게 행복한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저녁 식사는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엘리시온 한국 지사의 지사장도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네! 바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렁차게 대답을 한 지사장은 마침내 전화가 끊기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뉴욕 지사에서 직통으로 전화가 걸려왔다는 조심스러운 비서의 말을 들었을 때는 영락없이 해고 통지를 받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엘리시온을 통째로 털려 버린 지금의 상황은 모든 핵심 경영진이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내도 이상하지 않다. 솔직히 지사장 본인이 최고 경영자였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후우우…”
몇 번이나 그렇게 심호흡을 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지사장은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오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후다닥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따깍. 딸깍.
오늘따라 마우스 클릭 소리가 무지하게 크게 들린다. 물론 그건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전해지는 클릭감이 환청처럼 전해진 것에 불과했지만, 지사장은 그런 걸 눈치 챌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 도착한 이메일을 열어본 지사장은 한 명의 신상 명세가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것을 프린터로 출력함과 동시에 팀장 전원을 소집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상사태라 퇴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회사에 붙들려 있던 팀장들은 지사장의 호출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지사장은 그들에게 프린터로 출력한 한 사람의 신상명세를 건네며 말했다.
“본사의 특별 지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포섭하도록. 지사가 운용 가능한 예비비 한도 내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가능하다.”
“네?”
털려 버린 게임에 대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사람을 찾아 포섭하라는 지사장의 지시에 팀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엉뚱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절대로… 절대로 무례해선 안 된다. 어떤 수단이라는 건 상대가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모든 수단을 의미한다. 강제적으로 뭘 어떻게 해 볼 생각 따윈 버려라.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이 인물이 우리 회사에 불쾌한 느낌을 받아선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스카웃인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스카웃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만약 예비비 한도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부족하다면 나에게 연락하도록.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상대에게 무례해서도 안 되고 불쾌감을 줘서도 안 된다. 알았으면 얼른 움직여!”
“네!”
팀장들은 전달 받은 인적 사항을 살피며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길래 이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헉!”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상 명세를 살피던 한 사람이 문득 그렇게 숨넘어 가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굳어 버린다.
“왜?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 그게… 화장실이 급해서.”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습으로 운영팀장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안에 들어가 칸막이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신상 명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맙소사.”
어쩐지 처음 인적 사항을 봤을 때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들었다. 혹시 착각인가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던 운영팀장은 이 신상 명세가 자신이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형진.
이른바 아머브레이커라고 불리며, 한 때 엘리시온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던 인물. 결국 운영진 회의를 거쳐 버그 사용자로 확정되어 계정 삭제가 이루어진, 바로 그 인물.
-이런 말씀 드리면 기분이 나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객이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매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굴 먼저 건지겠냐는 식의 질문이 있죠?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사용자가 아니라 구매자에게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면 캐시 좀 쓰지 그러셨어요. 사용자님.
“맙소사…”
운영팀장은 과거 형진에게 했던 말들이 뇌리에 떠오르자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비틀거렸다. 하필. 하필 이 사람을 왜 지금.
지사장의 태도를 봐서는 본사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 사항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 갑자기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는 건, 바꿔 말하면 엘리시온이 털린 것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던지, 아니면 엘리시온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중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상대에게 무례해서도 안 되고 불쾌감을 줘서도 안 된다.
“마, 망했다.”
운영팀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미쳤지. 왜 하필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 사람을 만났던 걸까. 그런 일이라면 대충 신입 중에 아무나 맡겨도 되는 일인데, 뭐가 잘났다고 직접 만나서 그렇게 사람을 깔아뭉갰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도 이미 늦어 버렸다. 원래 때린 놈은 잊어도 맞은 놈은 평생 기억하는 법 아닌가. 힘들여 키운 캐릭이며 계정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 것만으로도 이가 갈릴 판에, 그런 소리까지 들었다면 평생 이를 갈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그말을 해놓고서도 너무 심한 거 아니었나 싶은 생각을 하긴 했다. 정확히는 양심을 가책을 받았다기 보다는 소송이니 뭐니해서 지저분하게 물고늘어지는 사태를 우려했던 것 뿐이지만.
큰일이다.
이 유형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일이 밝혀지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다. 한때 엘리시온을 뜨겁게 달궜던 일이기도 하고, 그 처분 때문에 시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니 자신처럼 금방 알아차리지는 않는다 해도 누군가는 이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전의 일이 밝혀지게 되면, 과연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올까.
두말 할 것도 없다. 애초에 유형진이라는 사람이 만난 운영진은 자신이 유일하다. 게다가 운영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가지고 있는 상황이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전부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운영팀장은 이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파트 대출금부터 시작해서 새로 산 자동차 할부금에, 신형 휴대폰 할부금까지. 앞으로 그가 갚아나가야 할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딩동.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운영팀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X팀장! 기억났어! 나 기억났다고! 이 사람은 그때 인스턴트 킬 쓰다가 버그 사용자로 계정 삭제 된 그 사람 맞지?
-X팀장! 그때… 이 사람한테서 전화 왔을 때 X팀장이 나가서 직접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 번호 혹시 저장해 뒀으면 알려줘!
-지금 어디야?
-X팀장! 대답 좀 해!
-아까 화장실 간다고 하지 않았나?
“…”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부들거리는 두 손으로 휴대폰에 계속해서 미친 듯이 찍히는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그가 들어가 있는 칸막이를 노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X팀장! 거기 있지? 빨랑 나와! 지금 거기서 힘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
덜덜덜.
운영팀장은 어느새 흠뻑 땀에 젖어버린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천천히 칸막이의 걸쇠를 열었다. 그러자 문이 왈칵 열리며 영업팀장의 얼굴이…
쾅!
“어윽!”
“미, 미안.”
영업팀장의 얼굴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세차게 열린 문이 그의 얼굴에 직격하고 말았다. 순간 눈앞에 불똥이 번쩍 튀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얼마 전에 맞춘 뿔테 안경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운영팀장의 코에서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코피… 그것도 쌍코피…”
“아니… 난 그러려는 게 아니라… 이, 일단 이거라도…”
영업팀장은 급하게 화장지를 꺼내 운영팀장의 코를 막아주려고 한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순간 와그작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발을 통해 전해진다.
“안경…”
기겁을 하며 발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뿔테 안경은 진각이나 다름없는 무지막지한 발걸음에 짓밟혀 박살이 난 뒤였다.
“그, 그게…”
영업팀장이 연속된 동료의 불운에 당황해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할 때, 다른 팀장들과 자신의 팀장을 찾아나선 운영팀원들이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왔다가 그 상황을 목격했다.
“너희들… 싸웠어?”
한 사람은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새파랗게 질려있고, 또 한 사람은 문을 강제로 열어젖힌 듯한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서있다. 누구라도 두 사람이 싸웠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아냐! 그럴 리가! 그냥… 문을 좀 열다가…”
“어쨌든… X팀장! 유형진이라는 사람 연락처 알고 있지? 빨리 알려주고 병원에 가든가 해.”
“몰라…”
“뭐?”
“모른다고. 내가 전화를 받았겠어? 내가 그 사람 전화 번호를 왜 기억해야 하는데?”
“…”
운영팀장은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모르는 것도 사실이고, 이제 곧 밝혀질 일들이나 터져버린 쌍코피나 기타등등 여러 가지 것들이 마구 뒤엉키자 더 이상 이성이 남아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쟤… 왜 저래?”
“글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유형진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뭔가 일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들은 운영팀장을 닦달하는 대신 당시의 통화내역을 추적해 연락처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이 꼬여버린 동료가 안타깝긴 해도, 당장 자신들의 모가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남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회사 내에 남은 상담원 연결 기록을 뒤져서 연락처를 확보했을 때는 이미 밤을 새고 날이 하얗게 밝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 번호가 확실하지?”
“네.”
밤새도록 직원들을 들들 볶아 마침내 형진의 전화번호를 확보한 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잘못 걸지나 않을까 싶어, 통화를 시도하기 전에 몇 번이나 번호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끙… 여보세요.
어쩐지 짜증 가득한 목소리. 그러고 보니 마음이 급해서 이른 아침이라는 사실을 깜박했다. 하지만 홍보팀장은 오랜 시간 업계에서 갈고 닦여진 접객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친근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걸렀다.
“안녕하세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이상향, 엘리시온입니다.”
-엘리시온? 끄흐아아…
어쩐지 탄성이라고 하기도 미묘하고 신음이라고 하기도 미묘한 소리와 함께 뭔가 푸드득거리는 소음이 이어진다.
“…”
홍보팀장의 풍부한 상상력은 순간 한 가지 모습을 연상해 버렸다.‘
이른 아침, 화장실 안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힘을 주다가 마침내 노력의 결실을 얻는 그런 훈훈하고도 어딘지 모르게 구리구리한 모습. 어쩐지 전화기 너머로 며칠동안 묵었다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의 향긋한 냄새가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다.
-후우우… 엘리시온이라면, 그 게임인지 뭔지를 말하는 건가?
홍보팀장은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엘리시온 한국 지사의 홍보팀장 XXX입니다. 유형진님, 맞으시죠?”
그러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닌데.
“네? 유형진님… 아니세요?”
-응. 아니야. 잘못 걸었어. 쳇. 아침부터 재수없게스리.
그리고 이어지는 신호음. 홍보팀장은 연락처를 찾느라 밤을 새운 사람들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라는데?”
“그럴 리가. 그 번호가 틀림없다고요.”
“잠깐… 설마, 번호 이동이라도 한 건가.”
직원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계정이라도 남아있으면 회사에 저장된 개인 정보를 뒤지든 뭐든 해서 추적이라도 해볼 텐데, 계정 삭제가 되어 버린 탓에 그럴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상담원 연결 기록을 뒤지느라 밤을 새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지?”
홍보팀장이 멍청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사람들은 밀려드는 극심한 피로감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