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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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잠식
누군가에게는 악몽 같고, 누군가에는 망연자실한 아침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아침이기도 하다.
특히 승희에게 있어서 오늘 아침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다.
“으으으으응!”
자명종 소리에 맞춰서 잠에서 깨어난 승희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괜히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엉아야. 나와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등의 낙인이 살짝 빛나는가 싶더니, 그곳으로부터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 보고는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꺄아앗!”
승희는 조폭식으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건달 토끼의 모습에 그렇게 괴성을 지르고는 얼른 손을 뻗어 힘껏 껴안는다. 건달 토끼는 그런 승희의 행동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천식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인형 따위는 가져본 적도 없었던 그녀에게 있어 인형처럼 귀여우면서도 따뜻한 체온을 지닌 채 살아 움직이는 이 토끼는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선물이었다.
그렇게 건달 토끼를 안고 잠시 버둥거리던 승희는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자 얼른 토끼를 문양 속으로 되돌리고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깼니?”
“응. 엄마.”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승희는 얼른 대답한 다음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천식은 발작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규칙적으로 의사를 방문해서 관리를 받아야 한다. 원인 항원이 분명한 환자라면 집중적인 면역 치료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실행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은 승희처럼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관리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식은 환경과 약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야만 하는, 그런 병이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선 승희는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황사에 꽃가루에 환절기까지 겹친 봄의 외출은 이전까지 승희에게 상당히 괴로운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승희의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응!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아!”
거짓말도, 꾸며낸 말도 아니다. 물론 마스크를 하고 있는 상태라 조금 갑갑한 기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은 채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홀가분한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승희는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응?”
당연한 얘기지만 눈에 띌 정도로 좋아진 그녀의 상태는 의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상태를 확인해 본 결과, 사실상 완치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래부터도 천식은 증상의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건 딱 봐도 그런 주기적인 변화의 일환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이것저것 시험을 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건강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기계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라 다시 몇 번이나 더 확인을 하고 나서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 상태대로라면 완치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군요.”
“정말요?”
차를 타고 오면서 승희가 보여주었던 모습으로 인해 살짝 기대를 하기는 했지만, 의사에게 그렇게 확실하게 얘기를 듣자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냥 좋아졌다고 해도 감지덕지인데, 완치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확실한 것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천식은 만성 질환이고,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방심했다가는 더 악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긴… 그렇겠죠.”
의사와 어머니의 대화를 들으면서 승희는 정말로 다 나았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여신님이 데려온 사제라는 분에게 회복도 받았고, 앞으로 꾸준하게 건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균형의 권능도 계속해서 그녀의 몸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그녀가 병에 걸려서 아프거나 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여신은 정말로 그녀에게 건강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을 안겨 준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승희는 얼른 엘리시온에 접속했다.
“어?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너무 빨리 온 것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접속해보니 카트린과 크루그를 비롯한 몇몇 인원이 이미 접속해 있는 상태였다.
“여신님은요?”
“일이 있어서 오늘은 좀 늦게 오실 거에요.”
“아…”
승희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트린은 그런 승희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여신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면 팬클럽으로 할 수 있어요.”
“아… 그건 알지만…”
뭔가 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카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다른 용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게…”
승희는 카트린의 등 뒤에 서서 심유한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크루그의 모습에 움찔하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이동 스킬이라는 것을 배워보고 싶어서요.”
“아하.”
그녀가 머뭇거린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천식도 낫게 해주었고, 여신의 팬클럽이 되어 권능이라는 것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투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그녀를 길드에 받아주기까지 했는데 다시 무언가를 부탁하려니 염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단순히 히어로를 동경해서라기 보다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달리는 자신을 그녀는 무엇보다도 깊이 마음 속으로 염원하고 있었다. 수퍼 히어로는 그런 그녀의 염원을 투영시킨 대상이었을 뿐이다.
카트린은 그녀의 말을 듣자 자신의 오빠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승희 언니한테도 이동 스킬 가르쳐줘.”
“알았어.”
아름과 새름 자매에게도 이미 알려준 것이고, 수빈이라는 여자에게는 형진이 직접 자신의 스킬을 가르쳐 주기도 했으니 승희에게도 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아니겠는가.
“손을.”
“네…”
자신보다도 작은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승희는 찍 소리도 못하고 크루그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수빈이 그렇게 대하는 것을 봐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역시 최근의 크루그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알 수 없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축하합니다! 스킬 ‘그림자도약’ lv.0을 습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스킬 ‘그림자질주’ lv.0을 습득했습니다!]스킬 두 가지를 전수하는 일이 끝나자, 크루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혼자 연습해도 상관없지만, 있다가 형이 오면 말하고 연습을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것저것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줄 테니까.”
“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뒤뜰을 마구 뛰어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은 크루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자, 형진이 여신들을 데리고 접속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형진은 접속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는 승희의 모습에 빙긋 웃어 보이더니, 카트린에게 무언가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이런 저런 일이 좀 있어서 승희님과 수빈님에게 드릴 물품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네? 무슨…”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승희의 모습에 형진은 씩 웃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말 나온 김에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일단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도핑용 음식을 승희에게 잔뜩 떠안겨 버린다.
“이, 이건…”
“부스터 없이는 역시 효과가 좀 떨어지겠지만, 아직 스킬 레벨이 높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꽤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바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아니, 저기…”
승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형진은 두 여신을 데리고 쏜살같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승희를 향해 카트린이 웃으며 말했다.
“승희 언니. 저랑 같이 연습해요. 저도 이동 스킬이란 걸 배워보려고 하는 중이거든요.”
“정말요?”
“네. 다른 분들이랑 같이 움직이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저도 오빠한테 배우려던 참이에요.”
따지고 보면 승희와 카트린은 닮은 꼴이라 할 수 있었다. 승희가 천식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해왔다면, 카트린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걷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승희는 그런 카트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곧바로 연습을 위해 뒤뜰로 향했다.
그렇게 타나토노트10 길드는 오늘도 평화로운 일상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주위의 분위기는 어제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나왔다.”
“저쪽은… 사교도 인던 쪽인가.”
길드성에서 형진이 나와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몇 사람이 급히 어딘가로 연락을 취한다. 그들은 괜히 길드성을 공격했다가 박살이 나버린 불사신 길드와 함께 이슬라 인근에서 3강으로 군림하던 길드 중 하나인 별바람 길드의 인원들이었다.
바이러스와 별바람 길드는 길드성의 싸움 이후 약화되고 분열된 불사신 길드를 박살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을 흡수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3강 중 하나가 박살나 버렸어도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2강으로 자칭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작 몇 명의 인원만으로 불사신 길드에게 항복을 받아낸 타나토노트10 길드의 침공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이 다른 약소 길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들의 길드 하우스를 약탈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사신 길드를 정리하는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을 보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비를 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아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막말로, 지금 상황에서 타나토노트10이라는 길드와 동맹을 맺는다면 과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일단 길드 운영진에게 연락을 취하고 나자, 문득 한 사람이 이런 말을 꺼낸다.
“그런데… 역시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렇게 확 차이가 날 수 있나 싶어서요.”
그거야 그 싸움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렸을 법한 얘기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일전에 그런 일도 있었잖아요. 아머 브레이커였나. 버그로 막 갑옷 부수고 그랬던 사람.”
“버그 사용자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게 아니라면 운영자라든가… 최근은 아니지만 예전에 실제로 다른 게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들은 적도 있는 것 같고.”
“흠…”
확실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누가 봐도 타나토노트10 길드에 속한 이들의 강력함은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실제로 과거에 그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명 노X리우스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거라면… 불사신 쪽에서 움직이는 것 같던데요.”
“불사신이?”
“어떻게 보면 그쪽이야말로 가장 큰 희생자니까요.”
“하긴.”
먼저 건든 것이 잘못이긴 해도, 고작 몇 사람을 감당 못해서 잘 나가던 길드가 박살나버렸으니 억울할 법도 한 일이다. 아마도 버그든 밸런스 붕괴든 이유를 붙여서 이슈화 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들로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일지도.
“괜히 우리가 나서서 척을 질 필요는 없지. 그 녀석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자고.”
“네.”
하지만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불사신 길드든 뭐든 아무리 회사에 이런 저런 얘기를 찔러 넣어봐야 이미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지금 접속해 있는 게임이, 다른 세계의 신에 의해 이미 강탈되었으리라고 누가 있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