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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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잠식
어쨌든 뒤에서 그런 소리가 오가고 있는 건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형진은 두 여신을 데리고 이제는 거의 공장 수준으로 아이템을 뽑아내는 장소가 되어 버린 사교도의 은신처에 들어섰다.
“슬슬 이곳도 질리네.”
“네? 뭐가요?”
형진이 인던의 입구를 바라보며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자, 어느 틈엔가 하엘의 등에 올라탄 채 커다란 배낭을 꺼내서 등에 메고 있던 보호와 균형이 얼른 그에게 묻는다. 그냥 조용히 따라오는 줄 알았더니, 형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이 들락거려서 좀 질린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하.”
다른 파밍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막상 지금처럼 급히 아이템을 구해야 할 때는 역시 길드성에서 가까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뭔가 특별한 아이템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길드원에게 챙겨줄 아이템 정도는 이곳을 빠르게 두세 번 정도 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갖출 수 있으니 굳이 다른 파밍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던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구로 다가서는데, 먼저 와서 파밍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구에서 나오며 나누는 대화소리가 얼핏 전해진다.
“그새 패치라도 한 건가.”
“뭐… 딱히 상관없잖아. 보스들 대사가 바뀐 것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세세한 설정 같은 것이 바뀌면 메인 스토리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하긴. 잠수 패치라니. 좀 기분 나쁘긴 하네.”
잠수 패치?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는 보스들이 말을 할 기회도 안 주고 속전속결로 때려 잡아서 뭔가가 바뀌었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괜히 궁금증이 일었다. 어쩔 수 없다. 인던을 2분컷으로 돌아야 하는 상황에서 보스 놈들이 중얼거리는 대사까지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냥 지껄이는 대로 말하도록 내버려 뒀다간 2분은커녕 20분컷도 불가능 할 테니까.
한 번쯤 천천히 돌아볼까.
코어 일만 개를 모아야 하는 상황에서야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한 번쯤 뭐가 바뀌었는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번엔 좀 천천히 가겠습니다. 쉬엄쉬엄 따라오세요.”
“넵!”
“열심히 할게요.”
주먹을 불끈 쥐며 눈빛을 빛내는 보호와 균형, 그리고 몽롱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각오를 다지는 꽃과 바람의 모습을 보니 무엄하게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유아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상황이라 지금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누군가도 이렇게 귀여웠다면 조금은 정상참작을 해줬을 텐데. 그래봐야 풀어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입장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다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전에는 캐시를 지불하고 인던으로 들어서면 그것이 고스란히 허세와 망상이나 희망과 생명에게로 가버렸지만,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빼앗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여전히 그들에게로 공헌도가 가는 걸까. 아니면 이미 공포와 죽음이 손을 써서 모조리 꿀꺽하게끔 바뀐 것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구에 들어선 형진은 앞서 여신들에게 말한 것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인던 공략을 시작했다.
길가에 매복하고 있던 몹들을 쓰러뜨리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지만 딱히 뭔가 바뀌었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자 마침내 첫 번째 중간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으으… 감히 허세와 망상의 성전에 침입하다니 겁도 없구나! 나 니첼 언프가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풉!”
순식간에 쫄들을 쓸어버리고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형진은 중간 보스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뿜어 버리고 말았다.
“에? 에엣? 어떻게 된 거죠?”
“이건…”
이전과 비교하면 소풍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사냥을 이어가는 형진의 뒤를 하엘의 등에 탄 채 쭐래쭐래 따라오던 보호와 균형은 물론이고, 처음으로 중간 보스의 대사를 들은 꽃과 바람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저 위에 계신 누군가가 손을 쓰신 모양입니다. 정말 어지간히 이 녀석들이 마음에 안 들었었나 보네요.”
“헤에…”
보호와 균형이나 꽃과 바람은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것은 이미 공포와 죽음이 이 게임을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장악해 버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다른 걸 손보기 전에 이것부터 후다닥 고쳐 버린 것인지도 모르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사교도의 은신처에 등장하는 보스들의 이름과 대사를 고치고 있는 공포와 죽음이 연상 되어서 피식거리며 다시 인던을 진행하고 있는데, 문득 요란한 팡파레 소리와 함께 공지사항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상자 하나가 형진의 시야에 나타난다.
“응?”
“이건?”
“…”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는 이 연출. 딱 봐도 공포와 죽음 버전이라 집행자들에게 전해지는 공지사항인가 싶었지만, 여신들까지 동시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집행자를 넘어 엘리시온에 접속한 모든 이에게 전해지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보이십니까?”
“네. 공지사항이라고 적힌 거 말이죠?”
“저도 보여요.”
“흠…”
형진은 잠시 사냥을 멈추고 일단 공지 사항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설마 스팸 메일처럼 여는 순간 뭔가가 펑 하고 터져 나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공지사항] -지금부터 엘리시온에 업데이트가 실시됩니다.-이 업데이트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므로, 게임을 종료하거나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업데이트 진행 중에 다소의 노이즈가 시야에 나타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예상 업데이트 시간은 5분 내외입니다. 감사합니다.
업데이트라…
사교도 인던처런 단순히 현재 존재하는 것을 약간 바꾸는 식이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공지를 내려보낼 필요도 없이 그냥 슬쩍 고쳐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엘리시온에는 없었던 무언가를 새롭게 추가한다는 얘기다.
빠르다.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진님! 진님!”
“네?”
갑작스런 업데이트 공지를 보고 공포와 죽음이 새롭게 추가하려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던 형진은 옆에서 보호와 균형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말씀하십시오. 여신님.”
“저기요. 업데이트가 뭐에요?”
“…”
뭐랄까.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모습이 어쩐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는 건가요 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라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꽃과 바람 역시 내색은 않고 있지만 역시 궁금한 표정이다.
“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이를테면 토너먼트 비슷한 공간이란 건 아시죠?”
“넵!”
“토너먼트도 보면 새로운 규칙을 정한다든가, 싸움 장소를 늘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추가할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추가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업데이트라고 합니다.”
“아하!”
여신들에게 대답을 해주다 보니 혹시 이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공포와 죽음은 허세와 망상이 걸어올지도 모르는 토너먼트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것을 치루기에 합당한 무언가가 이 게임 안에 존재해야만 할 터. 아마도 이번 업데이트는 그 준비의 일환이 아닐까.
[아닌데.]“헛!”
“진님?”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으익. 깜짝이야. 말을 하실거면 좀 기별이라도 하시던가.
[불만이냐?]아하하. 설마 그럴 리가.
형진은 곧바로 저자세로 돌아섰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천벌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니라니. 그럼 무엇을 위한 업데이트라는 얘긴가.
[글쎄.] “…”어째서일까. 빙글빙글 웃으며 어디 한 번 맞춰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나는 듯한 착각이 느껴지는 이유는.
“끙…”
형진은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영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엘리시온을 장악한지 하루도 안 되어 바로 업데이트 해야할만한 내용이 과연 뭐란 말인가 혹시 이제껏 허세와 망상, 그리고 희망과 생명에게 돌아가고 있던 공헌도에 빨대도 아니고 운하를 연결해서 몽창 뽑아 먹기 위한 패치인가. 하지만 그거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지금부터 빨대 꼽습니다라고 공지를 날릴 이유가 없을 텐데.
[물론이지.]공지사항이란 것이 내려오고 난 뒤 제 자리에 선 채 혼자 끙끙거리는 형진의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 것일까. 두 여신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하엘의 등에서 내려와 형진의 양 어깨에 자리잡고는 각기 균형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을 베풀어 준다.
“하하…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자 보호와 균형은 부끄러운지 살짝 볼을 붉히며 답하고, 꽃과 바람은 말 없이 배시시 웃어 보인다. 쳇. 누군가도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이 얼마나 모범적인 여신의 모습이란 말인가.
[시끄러.]형진은 어쩐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공포와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그의 눈앞에 다시금 상자 하나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끙. 시끄러우니 이거나 먹으라 이건가.
투덜대며 다시 상자를 열어 보니 다시금 공지사항이 눈앞에 드러난다.
[공지사항] -새로운 업데이트가 적용되었습니다.-양방향 퀘스트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양방향 퀘스트 시스템은 유저 스스로 퀘스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당신이 퀘스트를 발동한다면, 다른 유저나 게임 내 존재하는 여러 단체에서 이것에 응할 수 있습니다.
-양방향 퀘스트로 발동할 수 있는 의뢰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물자조달: 자신이나 길드가 필요한 물품을 의뢰를 통해 수급할 수 있습니다.
2.긴급운송: 먼 거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품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3.수배자 체포: 범죄자에게 현상금을 걸어 체포할 수 있습니다.
4.수배자 처형: 범죄자에게 현상금을 걸어 처형할 수 있습니다.
5.암살: 게임 안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한 은밀한 살해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6.복수: 원한이 있는 자에 대한 사적 제재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7.채권 추심: 빚을 받아내도록 부탁할 수 있습니다.
8.용병: 일정 기간 동안 필요한 무력을 공급하는 용병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9.호위: 위험한 지역을 지날 때 호위를…
“헐…”
형진은 공지 사항을 보는 순간 이 패치의 의도가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모를 리가 있는가. 그가 저쪽 세계에 가서 수행했던 의뢰들 대부분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모습인데.
이것은 단순한 의뢰 시스템이 아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예비 심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러한 의뢰들을 수행한 실적 등을 통해 집행자로 받아들일 자를 선별하기 위한 시스템인 셈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러한 의도를 알기 어렵다. 사실 진정한 롤플레잉 게임이라면 이것은 꼭 필요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단순히 정해진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유저 스스로 퀘스트를 발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얘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무한한 자유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악용될 수 있는 소지 역시 다분하다. 임의로 퀘스트를 발동해 그것을 통해 어뷰징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일일이 퀘스트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어뷰징 행위를 걸러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게임들이 이런 양방향 퀘스트를 시도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신이라면? 그냥 신도 아니고 무려 관음증 성향을 가진 신이라면?
[뭐라?]크흠. 어쨌든 그런 신이 퀘스트 내용을 일일이 검수한다면 이 시스템이 악용될 소지는 최소한 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공포와 죽음은 자신의 추종자에 어울리는 이를 찾아낼 것이며, 이런 식으로 검증된 집행자들은 허세와 망상이 걸어올 토너먼트에서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드높이게 될 것이다.
어쩐지 허세와 망상이 불쌍해진다. 하필 이런 신을 상대로 싸움을 걸다니. 아니, 반대인가. 이 정도 신이란 걸 잘 알면서도 싸움을 걸 생각이라면 그만큼의 대비를 해야 할 테니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