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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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잠식
“아, 배고프네.”
“그러게요.”
그렇게 한나절 동안 열심히 땀을 뺀 부부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한 것은 때가 되자 어김없이 찾아온 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제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도대체 임산부를 데리고 뭔 짓을 하는 거냐고 기겁을 하며 놀랐겠지만, 원래부터도 유아는 석 달이 다 되어가도록 안정기고 뭐고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들로서는 당연하고도 평범하며 또한 격렬한 부부생활을 해왔었다.
그건 유아가 그만큼 엄청난 곰탱이란 뜻도 되지만, 또한 신녀로서 각성한 그녀의 몸이 그 정도로 튼튼하다는 의미도 된다. 게다가 그들 나름대로 배가 눌리지 않도록 조심한다든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두하지는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심한 것도 있으니 큰 문제가 일어날 소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조금 느긋한 느낌으로 일을 치렀다 해도, 이런 식으로 장시간에 걸쳐 일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허기 외에는 딱히 문제가 없는 건 역시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음… 역시 그래서인가.”
“뭐가요?”
“아니, 그냥… 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원래부터도 곰탱이인 유아야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형진은 역시 여신의 힘이 둘에게 전이되어서 이렇게 체력이 강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참고로, 여신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둘에게 질려버렸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말 하는 것을 멈춘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날아가 버린 것인지는 모를 일. 하지만 명색이 여신인데 고작 이 정도로 정신줄을 놓을까. 역시 질려버린 쪽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형진은 살짝 적신 물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유아의 몸을 닦아 주었다. 이런 식으로 몸을 닦아준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유아는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애정을 음미하며 가만히 몸을 맡겼다.
형진이 다시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내자, 이번에는 유아가 그의 몸을 닦아 준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닦는 일을 마친 부부는 그제서야 옷을 챙겨 입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집 밖으로 나오자, 마침 식재료를 준비하고 있던 사제들이 반긴다.
“그냥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식사 정도는 저희들이 알아서 준비를 할 것인데.”
따지고 보면 형진과 유아는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서 여신 다음 가는 위치를 지닌 인물들이다. 여신은 실제로 본다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고려한다면, 이들 부부는 사실상 사제들이 가장 극진하게 보살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더구나 이 세 명의 사제들이 이 섬에 온 이유 또한 애초에 신녀의 출산을 돕고 그녀를 보살피기 위함이다.
“괜찮아요. 그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일인걸요.”
사실은 나오기 전에 식사 준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썼지만 괜히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가 사제들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긴, 조금쯤은 몸을 움직여 주는 편이 산모와 태아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하지만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드시면 바로 멈춰 주십시오.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사제들의 허락을 받은 유아는 곧바로 식재료 다듬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해왔던 일이고, 지금 일하고 있는 사제들 역시 식재료를 다듬고 신성력을 부어 넣는 방법은 유아에게 배웠다. 어떻게 보면 식재료 다듬기의 원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어?”
“이, 이건…”
하지만 유아가 막 다듬은 식재료에 신성력을 부어 넣는 순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제들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당사자인 유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단순히 식재료를 신선하게 만드는 용도라고는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과도한 신성력이 갑자기 터져 나온 탓이다. 누가 보면 야채들에게 부활의 기적이라도 선사하려는 건 줄 알겠다.
“어? 이, 이게 왜 갑자기…”
유아는 여느 때의 감각으로 신성력을 부어 넣으려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막대한 힘에 깜짝 놀라며 얼른 힘의 강도를 줄였다.
“과연… 과연 신녀님.”
“세상에.”
사제들은 그냥 신녀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납득해버리는 모양이었지만, 유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왕좌왕하다가 빙긋이 웃고 있는 형진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어요?”
“글쎄? 누군가의 가슴처럼 우리들의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 낸 거 아닐까?”
“으익! 장난치지 말구요.”
“하하.”
물론 형진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바로 유아의 몸에 감금되어 버린 여신 때문이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힘을 두 사람이 나누어 쓸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물론 여기서 극히 일부란 건 어디까지나 신에게나 해당되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엘리시온에 갔던 인원들이 돌아왔다.
“와아! 맛있는 냄새!”
“여신님.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너도 얼른 이리 와.”
“응.”
형진은 화덕의 불을 살피다가, 얼른 자기 자리라는 듯이 식탁 한켠에 자리잡는 자그마한 두 여신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었습니까?”
보호와 균형에게 그렇게 묻자, 그녀는 마치 해가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은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제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승희님을 괴롭혔던 나쁜 병이 깨끗하게 나았어요. 사제님! 다시 한 번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별 말씀을요. 다 자신의 신도를 아끼시는 여신님의 아름다운 마음 덕분입니다. 저야 그냥 그 마음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조금 힘을 보탠 것 뿐이죠.”
이렇게 보니 역시 보호와 균형이 더 호구신의 사제들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호구는 호구끼리 통한다고 해야 하나. 이미 호구신이라 불리는 누군가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느낌이다.
[서, 설마… 너… 혹시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얼른 식재료 손질을 마치고 다른 사제들을 데리고 식탁에 냉큼 앉은 유아로부터 비로소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유아와 떨어져 있으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는 건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설마… 설마… 내 교단을 저 바보에게 넘겨 버리려는 수작이야?]수작이라니.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게다가, 애초에 방치하고 있었던 교단 아닌지. 설마 이제와서 아까운 기분이라도 들기 시작한 겁니까.
[으으으…]사실 교단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잘한 것이 형진에게대리자의 자격을 내리고 교단의 관리를 맡긴 것이지만, 그나마도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반강제에 가까웠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기에 평소에 좀 더 잘 하지 그랬습니까.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화덕 위에 웍을 올리고는 요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파와 당근, 애호박, 버섯을 잘게 다진 다음 버터를 두른 웍에 넣고 볶아낸다. 잘게 다진 야채들을 강한 불에 빠르게 볶다가, 역시나 잘게 다진 햄과 살짝 식혀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 밥을 넣고 볶는다. 야채와 햄, 그리고 밥이 적당히 섞이면 굴소스로 간을 한 다음 마무리하면 볶음밥 완성이다.
엘리시온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면서 좋아진 것은, 타나토스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소스류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르카 지부장 프리이에게 하청을 주고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양산하도록 만든 것이 사실은 이런 소스류의 숙성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무척이나 큰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가장 흔하고 많이 쓰이는 조미료 가운데 하나인 식초만 해도 기본적인 숙성기간이 최소 한 달은 걸리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용도로 긁어모은 일그러진 시간의 돌이 코어 제작의 부재료로 사용되고, 다시 그렇게 대량 제작된 코어가 엘리시온을 통째로 강탈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니, 좀 비약을 하자면 희망과 생명이 지금 저 꼴이 된 건 요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어쨌건 일단 그렇게 볶음밥이 완성되자, 접시들을 펼쳐 놓고 길쭉한 형태를 지닌 그라탕용 그릇에 일인분씩 볶음밥을 담은 다음 접시 위에 엎어서 모양을 만든다.
보호와 균형은 그렇게 볶음밥이 접시 위에 일인분씩 놓여지자 요리가 다된 건가 하고 안절부절하기 시작한다.
“아직입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세요.”
“크흠. 넵. 알겠습니다.”
“쿡쿡쿡.”
[휴우… 저런 녀석에게…]
얼른 딴청을 피우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옆에 앉은 카트린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뒤에 얼핏 들린 말은 아마도 희망과 생명인 것 같지만, 형진은 모르는 척 계속해서 요리를 이어갔다.
팬에 버터를 넉넉히 두른 다음 계란을 풀어서 알끈을 제거한 것을 부어 넣고 약한 불에 천천히 익히기 시작한다. 요리사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요리로 중식에서 볶음밥을 꼽는 다면, 양식에서는 단연 오믈렛이다.
물론 혼자서 대충 만들어 먹는다면 그냥 대충 휘저어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도 맛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믈렛이 어려운 것은 깔끔하게 모양을 내면서도 겉과 속을 적당하게 익히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조리사 시험을 준비하려고 3년동안 오믈렛만 만들다가 결국 때려쳤다는 전설마저 전해질까.
오므라이스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결코 쉽지 않은 요리인 셈이다. 실력 측정기나 다름없는 볶음밥과 오믈렛이라는 두 가지 요리가 결합된 셈이니까.
어느 정도 몽글몽글하게 익었을 때 한번 접어서 뒤집고, 이음새를 살짝 익혀준 다음 재빠르게 한 번 더 뒤집어 이음새가 위로 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형태가 잡히자 곧바로 미리 담아 놓은 볶음밥 위에 오믈렛을 얹는다.
“자아, 우리 유아 먼저.”
“감사합니다.”
형진은 그렇게 만들어진 오므라이스를 유아의 앞에 먼저 내놓았다. 유아는 자신에게 먼저 음식이 전해지자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앞에서 풍겨지는 맛있는 향기에 얼른 스푼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
“네?”
“이 요리는 이게 끝이 아니야. 잠깐만.”
“…”
뭐가 더 남았다는 건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유아의 눈앞에서, 형진은 칼을 들어 밥 위에 올려진 오믈렛의 가운데를 천천히 갈랐다.
“우와아아아아…”
“아우…”
오믈렛의 배가 갈라지자 버터향이 확 터져 나오며 반숙된 계란이 좌우로 갈라져 접시를 채운다. 노란 달걀 반숙이 접시를 덮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유아는 스푼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휘둥그래진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형진은 계란 반숙이 뒤덮고 남은 공간에 데미글라스 소스를 살짝 끼얹은 다음 유아에게 권했다.
“자, 다 됐어. 먹어봐.”
“…”
유아는 대답할 겨를조차 없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스푼을 움직여 입가로 가져갔다.
“우으음!”
[아아…]
촉촉하고 포들포들한 반숙 오므라이스를 입 안에 넣는 순간, 유아는 두 다리를 바둥거리며 격한 감동을 표현했고, 그와 동시에 유아의 감각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여신에게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급적이면 형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반응을 억누르고 있던 여신으로서도 이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맛은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 맛있겠다… 후릅.”
“흐릅.”
대놓고 군침을 마구마구 흘리고 있는 보호와 균형, 그리고 옆에서 아닌 척 하면서도 연신 흘러나오는 침을 주체 못하고 있는 꽃과 바람까지. 카트린조차도 이번에는 그런 여신들을 보며 웃지 못한 채 유아가 맛있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됩니다.”
“넵!”
형진은 오므라이스를 하나씩 완성해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과식은 좋지 않다며 유아를 말리는 사제들이 고생이었지만, 어쨌든 모두가 행복한 저녁 식사였던 셈이다.
[으으…]오직 한 명. 유아를 통해 미각이라는 또 하나의 감각을 개척당해 버린 희망과 생명만이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 음성은 이 자리에서는 형진 이외의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