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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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도발
제랄딘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셋이서만요?”
슈트라이허는 암계로 엘 파르드 왕실을 몰살시킨 전력이 있는 자이다. 만약 이쪽에 허점이 보인다고 생각하면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저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물. 이쪽이 신의 힘을 빌어 사용하는 추종자임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해두었을 테고, 만약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된다면 바로 허점을 찌르고 들어올 것이다. 최대한 힘을 끌어 모아 방비를 해도 부족할 판에, 고작 세 명이서 찾아가겠다니?
하지만 형진은 그런 제랄딘의 말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셋이라니? 정확히는 여섯이지.”
그 말이 떨어지자, 형진의 목에 몸을 두르고 잠이 들어 있던 미엘의 풍성한 꼬리 속에서 작은 머리 둘이 불쑥 튀어나온다. 보호와 균형, 그리고 꽃과 바람이다.
형진은 그런 두 여신에게 흘깃 시선을 주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쪽은 무려 신이 둘이나 동행하고 있는 걸. 게다가… 허튼 수작을 부려서 미엘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그거 꽤나 볼 만한 일이 될 것 같은데.”
“아…”
미엘은 스스로도 산 하나쯤은 가뿐히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 환수다. 게다가 형진의 힘을 끌어다 쓸 경우엔 대비할 틈조차 주지 않고 브레스를 갈겨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이라면 설령 성이 가로 막고 있다 해도 의미가 없다.
게다가, 형진은 이제 희망과 생명의 힘마저 끌어다 쓸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형진에게 그럴 의도가 있다면 여신의 힘을 끌어다가 미엘의 브레스를 마치 기관포 쏴대듯이 날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모르긴 해도 이쯤 되면 보호와 균형이 지닌 권능으로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신의 권능이라도 뒷받침되는 힘의 크기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나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랄딘은 그런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형진이 아무런 대비조차 없이 무작정 대공을 참칭하고 있는 반역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형님. 설마 일부러 빈틈을 보이시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할의 말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하지만 빙긋 웃는 그의 표정을 본 제랄딘과 할은 그것이 사실상 긍정의 뜻임을 이해했다.
신전의 입장상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상대의 비열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면 누구도 그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럼, 출발해도 좋은 거지?”
“네.”
“이거 좀 떨리는 군요. 하하.”
형진은 요정의 문을 열고 일단 요정의 나라에 들른 다음, 다시 자칭 대공이 지정한 약속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리자님.”
그들이 요정의 문을 통해 도착하자, 제랄딘에게 미리 기별을 받은 최고 사제가 나와 그들을 영접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피해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큰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군세에 놀라 도망치는 와중에 아이 몇이 무릎이 까지고 물건이 조금 부서진 것이 전부였지요.”
“그것 참 불행중 다행이군요.”
어지간한 생채기 같은 건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손을 쓰면 이내 깔끔하게 나아버리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희들이 다녀올 동안,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식량과 식수는 넉넉하겠지요?”
“물론입니다. 신선한 야채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요정님들이 도와주고 계시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최고 사제가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자, 둘러서 있던 사제들 역시 경건하게 그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만약 유아의 몸 안에 갇혀 있는 희망과 생명이 지금의 모습을 보았으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모두 걱정마세요…”
문득 보호와 균형이 미엘의 꼬리 속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채 작은 목소리로 균형의 권능을 그들에게 베풀어 준다. 형진은 그런 보호와 균형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전에 제가 듣기로는 새로 저를 찾아올 신이 서너명 정도는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확히는 세 명이에요. 한 명은 좀 문제가 있어서 많이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다른 한 명은 이미 도착했어야 하는데 좀 이상하기는 하네요.”
“그런가요.”
문제가 있다는 말에 형진이 무슨 문제길래 많이 늦어진다는 건가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꽃과 바람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쩌면… 이미 도착해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러자 바로 보호와 균형이 맞장구를 친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저도 요새 워낙 이런 저런 일이 많아서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게 무슨…”
형진은 두 여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착했으면 도착한 거지,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무슨 말인지.
“그게… 걔가 좀… 워낙 존재감이 없는 애거든요. 저희들도 가끔 얘기를 나누다가 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
역시나 제대로 된 신은 아닌 모양이다. 신들조차 그 정도라면 평범한 인간은 눈앞에서 알짱거려도 못 알아보는 상황 아닐까. 그 정도로 희박한 존재감이라면 정말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확인해 봐야겠군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도와드릴 게요!”
“제가 같이 가면 도움이 될 거에요. 꽃의 권능을 써주면 그나마 다른 이들도 알아볼 수 있을테니까요.”
꽃의 권능은 부작용이 심해서 어지간해서는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권능인데, 그걸 써줘야 간신히 다른 이들도 알아볼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존재감이 없다는 건지.
“그 신은 어떤 이름입니까. 존재감이 희박하다는 분.”
“황혼과 망각이에요.”
“…”
이름만 들어도 그런가 싶은 느낌이 딱 든다. 다른 걸 잊게 만들다 못해 자신조차 잊혀져 버리는 타입인건가.
형진은 슬슬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존재감이 강해서 문제인 꽃과 바람에 이어 너무 존재감이 약해서 문제인 황혼과 망각이라니. 무슨 수로 신도를 끌어모아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끙… 일단 면접을 봐야겠지만, 이번엔 저로서도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두 분이 죄송해 하실 일은 아닙니다. 하하…”
그런 얘기를 나누며 신전의 입구를 통과한 그들은 이내 마을 밖에 진을 치고 있는 한 무리의 군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제법 많이 끌어 모았군.”
“그러게요.”
이런 식으로 모여든 병력의 수를 가늠하는 기술 따위 형진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제랄딘도 군무에 다소 관여한 경험이 있긴 해도 적의 병력수를 확인해 본 일은 없다. 오직 집행자로서만 활동해 왔던 할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 쌓여있는 돈의 액수를 가늠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사람 수는, 글쎄다.
하지만 이 순간 형진과 제랄딘, 그리고 할이 모여든 군세를 보며 떠올린 생각은 모두 같았다. 이 와중에도 저렇게나 많이 모았나. 형진이 보자마자 중얼거린 말 그대로였다.
봄은 눈이 녹는 계절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동안 얼어붙었던 대지들이 녹아 질척한 상태로 바뀐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가 잘 마련된 도시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길은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와 맞물려 진탕으로 변하기 때문에 군사의 이동이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도 사실상 엘 파르드 전역에서 병력을 일으켜 신전을 포위하는 일을 해치우다니, 꽤 노력한 느낌 아닌가.
“훌륭하군.”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당연하지.”
형진은 제랄딘을 끌어 당겨 어깨를 안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윗놈이야 그냥 해라 하면 그뿐이지만, 그 명령을 받드는 위치에선 절대로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거든. 저 정도 되는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운송 수단을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언제 출발해서 언제 밥 먹고 언제 숙영지를 만든 다음 언제 자고 누가 불침번을 서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전부 그 아래 사람들의 역할이야. 그뿐인가. 사람이든 말이든 뭐든 먹어야 살잖아. 식량부터 시작해서 이동 중에 소모한 물 같은 걸 수급하는 일까지. 제라도 잘 알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숫자를 계산하고 확인하고 집행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
“…”
말을 전해 듣는 것 만으로도 제랄딘은 표정이 일그러졌고, 할은 낯빛이 핼쓱해졌다. 하지만 형진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길 가능성이 다분하다거나, 후한 보상 같은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런 것에 대한 기대로 이런 귀찮고 짜증나면서 피곤한 일들로 인한 피로감 같은 건 희석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저들에게 과연 그런 기대감이 있을까.”
“과연… 그렇군요.”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는 결국 두 가지다. 절대로 이길 자신이 있거나, 최후의 발악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경우. 하지만 지금 저들은 누가 봐도 이길 자신이 있어서 쳐들어 온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을 선점해서 그것으로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내기 위해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한 것 뿐이다.
보통은 이런 식의 사정은 수뇌부만 알고 휘하의 이들에게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바람을 넣는다. 그게 안 통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지면 다 죽는다는 식으로 겁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병사들도 사람인데 질 게 뻔한 전투에 불려가는 것이 달가울 일이 없으니까. 싸우기도 전에 마음이 다 흩어져 버려서야 싸울 건덕지도 없으니까.
문제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먹혀들 소지가 없다는 점이다.
이길 가능성? 성역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신전 안의 이들에게 해를 끼칠 방법은 전무하다. 안에 들어갔다가는 토끼들에게 두들겨 맞고 나올 뿐이다.
그렇다고 지면 다 죽는다는 식으로 얘기를 만들 수도 없는 것이, 신전이 얼마나 호구스러운지 굳이 선전을 하고 말고도 필요 없을 정도로 거의 고정 관념마냥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얘기가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결국 저기 모인 병력들은 이길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황에 처한데다, 그나마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수 있는데도 호구 사제들한테 진 빚을 갚기 싫다고 소리 빽빽 지르는 지배자 때문에 이렇게 억지로 끌려 나와 있는 셈이다. 사기가 높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이거 쓰고 있어.”
“네.”
형진은 제랄딘에게 심연의 눈가리개를 건네주고는 자신도 그것을 착용했다.
“저는요?”
할이 그렇게 기대어린 표정으로 물었지만,
“넌 써도 의미가 없을 것 같지 않아?”
“그거야…”
할은 체구나 체형이 워낙 눈에 띄어서 눈가리개를 써도 의미가 없다. 게다가 제랄딘처럼 저들에게 감춰야 할 신분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렇게 서두르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마치 길 옆에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마냥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칭 대공이 세워 놓은 군영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리 만들어서 조립식으로 세워 놓은 듯한 마방책과 책문이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곳에 도달하자, 책문을 지키고 있던 병력들이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오신 누구요! 신분을 밝히시오!”
지구로 치면 일단은 수하 같은 걸 시도하는 셈이다. 수화가 아니라 수하. 경계중인 보초가 접근하는 상대를 확인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보초로서는 자기 할 일을 하는 것 뿐이지만, 형진으로서는 그런 것에 일일이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할. 날려버려.”
“네. 형님.”
형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은 앞으로 나서더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마방책을 향해 그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쾅!
기마 부대의 돌진을 막기 위해 통나무를 지면에 박아 넣는 형식으로 만들어 둔 튼튼한 장애물이었지만, 할의 무지막지한 주먹질을 버텨 내는 건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힉!”
“마, 말도 안 돼!”
주먹질 한방에 통나무를 엮어서 땅에 박아 넣은 마방책이 수수깡처럼 부서져서 나뒹굴자, 책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기겁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형진은 그렇게 기가 완전히 질려버린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부른다길래 왔다. 문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