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46
346====================
73. 정벌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유분수고, 뜬금없는 것도 정도껏이지 신나게 싸우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 역시 바로 희망과 생명 때문이었다.
미엘은 환수이고, 그 중에서도 흑요호라고 불리는 존재다. 때문에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잉태의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다.
흑요호의 신체는 정기를 기반으로 하고, 이 때문에 형태를 취하는 것이 자유롭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후손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충분한 정기를 흡수해야만 한다.
형진이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미엘이 잉태와 출산에 필요한 정기를 습득하는 데만 한 평생이 걸렸을 것이다. 흑요호의 힘은 형진이 드래곤에 비유할 정도이고, 그런 생명체를 단순히 인간의 정기만으로 잉태하고 출산하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까지 미엘이 출산의 의무를 기피했던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흑요호의 삶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을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차라리 형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형진을 반려로 삼는 과정에서 미엘은 이런 것들을 감수하기로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무리 잉태를 시작한 상황이라 해도, 그녀처럼 깊은 잠에 빠지거나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흑요호가 잉태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 명의 남자와 평생을 같이 한다는 뜻. 그 과정에서 정기의 공급이 끊기거나 하면 이전까지 애써 잉태의 과정을 밟았던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그건 다시 말해, 흑요호가 잉태의 과정을 시작하는 순간 반려로서 맺어진 남자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흑요호들은 일단 잉태가 시작되면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꾸벅꾸벅 조는 수준의 상태를 유지한다. 절대로 미엘처럼 천벌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푹 잠이 들어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가.
이유는 간단하다.
형진이 지닌 정기의 양이 일반적인 인간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잉태의 과정이 보다 급격하게 일어났고, 그 부하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미엘 자신이 최대한 신체의 기능을 잉태에 집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엘을 그렇게 깊게 잠들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잉태의 기간이 크게 줄어든다는 뜻이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빨리 출산을 시작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생이 반생이나 그보다 더 짧은 정도로 바뀌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유아의 몸에 희망과 생명이 갇히게 되면서 여신의 힘을 형진과 유아가 뽑아 쓸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방금 전의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계약자에 불과한 형진이 미엘의 본신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위력을 보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형진은 그런 막대한 위력을 경험하고서도 미처 잉태의 과정을 진행 중인 미엘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다. 미엘과의 계약으로 허락 받은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미엘에게 어떤 파급효과가 일어날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 급해요. 일단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알았어. 잠시만!”
희망과 생명으로 인해 전해진 막대한 양의 정기는 잉태의 과정을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 결과, 본래대로라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을 출산의 시간이 이렇게 도래해 버린 것이다.
형진은 허겁지겁 환수 강령의 스킬을 해제하며 지면에 내려앉더니, 도망쳐 버린 자칭 대공이 있던 자리를 보며 혀를 차고 있던 할에게 외쳤다.
“나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간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 있어. 나중에 찾으러 올테니.”
“네? 형님, 그게 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지만, 할의 입에서 그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형진은 급히 요정의 문을 열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헐?”
할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형진이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다가,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흠칫.
덤빌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수가 좀 줄긴 했지만 근 일만에 달하는 병력이 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할은 그런 병사들을 돌아보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최소한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할지는 말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니냐고…”
그렇게 할을 버려둔 채, 형진은 생각나는 대로 일단 발디프스 대산맥으로 향했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이면 돼? 뭔가 더 필요한 건 없어? 사제들이라도 불러올까?”
미엘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흑요호가 아이를 낳을 때 뭐가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하니 형진으로서는 더욱더 허둥댈 수 밖에 없다.
“정신없으니까 조용히 해욧!”
“아, 알았어.”
결국 도끼눈을 뜬 미엘의 소리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형진을 침묵시킨 미엘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햇빛이 따뜻하게 비치는 풀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본신으로 돌아가 버렸다.
“엇? 나랑 떨어져도 돼?”
“이젠 괜찮아요.”
미엘은 잠시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나기 시작하는 풀밭에 자리를 잡더니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
“…”
형진과 제랄딘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그렇게 웅크려 있는 미엘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아?”
“네.”
미엘은 살짝 눈을 뜬 채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안아줘요.”
“지금?”
“네. 그냥… 내 몸에 기대는 정도만이라도 좋으니까.”
“알았어.”
형진이 가만히 얼굴 옆에 몸을 기대자, 제랄딘 역시 조심스럽게 그 옆에서 미엘의 몸을 안아 주었다.
“으으으…”
미엘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끝났어요.”
“응?”
잠시 형진과 제랄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사이에 아이를 다 낳았다는 뜻?
“끝났… 다고?”
“네. 보실래요?”
미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리더니 꼬리 부근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어쩐지 상당히 힘들다 싶더니 일곱이나 되네요.”
“뭐?”
“안 보여요? 제 꼬리 부근에 나 있는 작은 꼬리 일곱.”
“…”
보인다. 보이긴 보이는데…
“설마… 저 꼬리가 아이들?”
“네.”
“…”
보통의 아이처럼 응애거리며 우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코입도 없는, 커다란 미엘의 꼬리 아홉 개에서 털이 조금 삐쳐 나온 것 같은 작은 꼬리 일곱이라니.
미엘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형진과 제랄딘을 향해 피식 웃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지만 조금 더 자라면 제 몸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개체가 되거든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라나 저처럼 꼬리 아홉 개를 지닌 모습이 되면, 비로소 성인이 되는 거죠.”
“아…”
뭔가 이해는 가는데,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기는 어렵다. 형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지식 안에서 지금 상황과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려 했다.
예전에 이런 식의 번식 방법에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출아법이었던가. 히드라, 말미잘, 산호… 끙…
형진은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난 건 기쁘지만, 그 아이가 말미잘과 비슷한 방식으로 태어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단 말인가.
“크흠. 지금은… 아직 안아볼 수 없겠지?”
미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 한 일주일?”
“아하… 그럼 생일은 오늘로 잡아야 하는 건가.”
“생일이라… 그건 편할 대로 하세요.”
미엘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흑요호는 독립심이 강해서 성인이 되기가 무섭게 부모를 벗어난다. 사실 이건 그들의 번식 방법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아이가 태어날 즈음이 되면 이미 아버지가 되는 인간은 늙어서 죽어가는 중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즈음이 되면 흑요호는 반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잠적을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가는 길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경우에 따라서는 흑요호가 그렇게 붙어 있었던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출산의 의무 때문에 반려를 정한 것이라면 특히 이런 경우가 많다. 지금 형진과 미엘이 처한 상황 자체가 일반적인 흑요호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례인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에요?”
“뭐가?”
“깜짝 놀랐다고요. 갑자기 그렇게 엄청난 양의 정기가 쏟아져 들어와서. 화들짝 깨보니 아이는 태어나기 직전이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자칫하면 미엘이나 그녀의 아이에게도 큰 악영향이 갈 수 있었던 일이니까.
결국 형진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희망과 생명이라는 강대한 신이 관련된 일이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망설여진 탓이다.
어쩌죠. 아무래도 얘기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마음속으로 속삭이자 바로 응답이 왔다.
순간 형진은 말문을 잃었다.
공포와 죽음께서 하신 말씀대로다. 애초에 그분께서는 희망과 생명의 일을 비밀로 하라 말씀하신 적이 없다. 유아가 신녀이기 때문에 형진 스스로 자율규제 중이었을 뿐.
결국 형진은 괜히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들에게 여신의 일에 대해 말해도 좋을지에 대해서.
바로 그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나 흑요호 아기는 처음 보는 것 같아. 아우, 귀여워라.”
“정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두 꼬마 여신들이었다. 그녀들은 미엘의 엉덩이에 작게 돋아난 꼬리들을 어루만지며 이것저것 축복을 전해 주고 있었다. 여신들 눈에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형진이 보기에는 그냥 복슬한 털뭉치 같을 뿐인데.
형진은 여신들의 그런 모습에 피식 웃으며 메시지로 두 마눌에게 말했다.
[이거…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거든. 특히 유아한테는.] [그게 무슨…] [실은 말이지. 유아의 몸 안에 지금 희망과 생명이 갇혀 있어. 내 힘이 갑자기 늘어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네?] [그럴… 수가.]일반적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라 두 마눌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보이지? 이 흉터.] [네.] [여신이 내 몸을 빼앗으려다가 남은 흉터야. 하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신 덕분에 오히려 여신 쪽이 유아의 몸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 [세상에…] [그럼, 봉인된 건가요?] [봉인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 이외엔 그 누구와도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상태이니 그것과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그것조차도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면 불가능하거든.]제랄딘은 그렇다쳐도 미엘은 항상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으면서도 미처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 기색이다.
[그런 일이…] [다시 말하지만, 유아한테는 비밀이야. 미엘도 아는지 모르는데, 그녀석도 지금 임신중이니까 신경 써 주길 바래.] [알았어요.]어쨌든 예상치 못했던 미엘의 출산은 그렇게 무사히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형진으로서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실감 따위 요만큼도 들지 않는, 그런 기이한 출산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미엘이 말한 일주일이 지나, 아이들이 꼬리가 아닌 독립된 개체로서의 모습을 갖춰야 좀 더 또렷하게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
형진은 일단 미엘과 여신들을 섬으로 돌려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내버려 뒀던 할을 찾아 나섰다.
“뭐냐, 이거.”
“그게… 하하하하…”
형진이 도착했을 때, 할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는 병사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복한다는데 일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그냥 다 때려죽일 수도 없고 해서요.”
“…”
자칭 대공 녀석이 귀환 주문서로 튀어 버리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이 모조리 떡이 되어 죽어버리자, 무모한 도박은 포기하고 바로 항복을 해버렸던 모양이다.
“이거 참.”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던 병사들은 그가 고개를 돌리자 얼른 눈을 깔고 고개를 숙였다.
“일단 오귀스트님부터 불러와야겠군.”
할 수 없다. 아직 실감은 안 나더라도 내 아이가 태어난 기쁜 날에 일만이나 되는 자들을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게 아니어도 이들을 다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풀어주거나 할 생각은 아니다. 일만이나 되는 병사를 아무 대책 없이 그냥 풀어 놓는 건 산적이 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무력을 지닌 자가 욕구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결국 약탈이고, 패잔병들이 마치 굶주린 메뚜기처럼 주위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어차피 잘 됐다. 날도 따뜻해졌으니 슬슬 운동이나 하라고 삽이나 하나 쥐어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설마 군인인데 삽질도 못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