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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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순회공연
서로 다른 사념체 백 개.
이것을 바꿔 말하면, 엘리시온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보스급 몬스터 백 마리를 처리하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냥 아무 보스급 몬스터나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초보존의 족제비 보스 같은 경우는 보스급 몬스터여도 사념체를 드랍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보스에게만 해당된다고 봐야 한다.
“죄송합니다. 쉬고 계셨을 텐데.”
“아뇨. 진님이 필요하시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심히… 할 게요.”
세 여신들은 쉬는 동안에도 형진의 일을 돕기 위해 아이템 줍는 연습을 충실하게 해 두었다. 물론 황혼과 망각 같은 경우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실전을 뛴 일이 전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한 연습이라면 어느 정도 해 둔 상태다.
“일단 먼저 거래소를 가볼까 합니다.”
“네.”
사냥해서 모으든 돈을 주고 사든 어차피 마찬가지이므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먼저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사념체를 구입하기로 했다.
여신들은 얼른 형진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어쩐지 다르다. 이전과는 달리 풍성한 꼬리가 그녀들의 모습을 감춰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의 미엘은 정기를 지속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형진의 목을 계속 감사고 있어야 했지만, 출산이 끝난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모습으로 다닐 필요가 없었다.
여신들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옷깃을 잡은 채 어깨에 앉자, 형진은 피식 웃더니 스스로 꼬리를 꺼내어 마치 외투처럼 자신의 몸을 둘렀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여신들은 그제서야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꼬리 속에 폭 안기는 듯한 느낌으로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형진은 마침내 길드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전과는 달리 길드성을 감시하는 눈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주위를 지나칠 때마다 형진의 모습을 한 번씩 흘깃거리는 것이 묘하게 거슬린다.
“흠…”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간다. 길드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 나름 유명인이 되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아니면 지금 그의 어깨에 자리잡은 꽃과 바람의 존재감을 은연중에 느낀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흘깃거리는 시선이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형진은 모르는 척 인파가 붐비는 시내로 접어들었고, 지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런 식으로 흘깃거리는 시선도 많이 줄어들었다.
형진은 곧바로 거래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자…”
일전에 형진이 일만 개의 사념체를 모으기 위해 거래소를 싹쓸이 했던 일 때문인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념체들이 올라와 있었다. 새로 사념체를 구해서 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 사념체를 싹쓸이하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재기를 했다가, 결국 더 이상 사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용도도 발견되지 않자 그냥 손절매에 나선 것이 아닐까. 하긴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사념체들만 하나씩 골라 구매하니 모두 서른일곱 개가 모였다. 새로운 목표를 부여받기가 무섭게 벌써 삼분의 일이나 달성해 버린 것이다.
“역시 돈은 있고 볼 일이야.”
형진은 잠시 더 거래소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이번에는 파티를 찾는 유저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형진은 딱히 현실의 지구에 대해 아쉬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저쪽 세계에서 한 나라의 왕까지 되었다. 게다가 집에는 여우같은, 혹은 진짜 여우인 마눌들과 자신을 보면 빠아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귀여운 자식들까지 있다. 입고 먹는 것이 부족하지 않으며 돈은 써도 써도 넘칠 정도다. 문명의 이기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것도 최근 왕성을 지으면서 어지간한 건 다 갖춰졌다.
없는 건 고작해야 텔레비전이나 그것을 통해 전해지는 미디어 정도지만, 애초에 지구에 있을 때도 그런 건 별로 즐기지 않았고 꼭 필요하다면 엘리시온에 와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딱히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조차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에서 굳이 지구의 일에 대해 아쉬운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반드시 꼭 하나 아쉬운 점을 꼽으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무언가 지구쪽의 정보가 필요한 시점에서는 한번쯤 인터넷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어디…”
지금 형진이 찾고자 하는 것은 보스의 정보였다.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다면 검색창에 ‘엘리시온 보스’라고 한 번 치면 끝날 일이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광장을 살펴 보다가, 마침 길드성에 있는 신입 길드원 사인방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은 무리라도 그녀들이라면 충분히 정보를 모아다 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수빈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일단 네 명의 길드원 가운데 가장 어른스러운 느낌의 수빈에게 귓말을 넣었다.
[네? 네! 물론이죠. 무슨 일이세요?] [죄송하지만 부탁을 하나 드릴까 해서요.] [무슨…] [엘리시온에 존재하는 보스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너무 자세할 필요는 없고, 이름이 뭐고 어디에 있는지 정도만 간단하게 목록을 뽑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아요. 바로 찾아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형진은 수빈에게 그렇게 일을 맡기고는 다시 광장을 돌아보았다. 목록을 받는 건 받는 거고, 그녀가 조사를 마칠 때까지 그냥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사인방 중에 아무나 하나 길안내로 데리고 올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렸지만, 이제 와서 다시 길드성으로 돌아가기도 귀찮다.
주욱 돌아보던 그는 문득 간판 하나를 들고 있는 유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간판에는 ‘헬리오베스 인던! 당신만 오면 바로 출발합니다. 탱커 급구!’라는 글귀가 써져 있었다.
“탱커 구하십니까?”
다가가서 그렇게 말을 걸자, 간판을 들고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유저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넵! 탱커 구해요! 탱커세요?”
“네.”
약간 맹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유저는 얼른 형진의 옷차림을 살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의미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꾸미기 아이템 등을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외양만으로는 어떤 장비를 착용했는지 알아보기 어려운 탓이다.
“잠시만요. 일행들이 다른 곳에서 쉬는 중이라.”
“먼가요?”
“아뇨. 바로 요앞이에요.”
“그럼 가봅시다.”
“네!”
남자는 곧바로 광장 앞의 찻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탱커님 오셨다고?”
“네. 여기.”
“오, 반갑습니다. 전 천둥검박달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아, 잠깐 그 전에… 장비를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편하신 대로.”
실력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장비를 맞추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할 테니까. 물론 현질로 그냥 비싼 장비를 산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도 나름 노력인건 마찬가지고 최소한 장비 빨은 있을 테니 꿔다 놓은 보리자루는 되지 않으리라는 계산인 셈이다.
형진은 대충 인벤토리에서 아무 방어구나 꺼내 보여주었다.
“헙!”
천둥검박달재라는 이름의 검사는 형진이 거래창에 올려놓은 장비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교도 인던의 진귀급 방어구인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게 무려 +10으로 강화까지 되어 있으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커흠. 제가 미처 모르고 실례를 했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다른 파티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형진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귓속말로 방금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모양이다.
“파티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와는 달리 급공손해진 모습. 형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얕보이는 것보다는 이쪽이 편하다.
“주십시오.”
형진이 파티를 수락하자, 그들은 곧바로 워프 포인트를 타고 인던이 있는 곳 근처의 마을로 이동했다.
헬리오베스 인던. 정확히는 헬리오베스 요새 공략전 이라는 이름의 인스턴스 던전을 일컫는 말이다. 내용상으로는 정규군이 요새를 공략하는 사이 요새의 비밀 통로를 돌파해서 반란군 수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쫄들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탱커님께서는 보스만 맡아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형진의 목표 역시 보스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인스턴스 던전에 입장하자, 파티원들은 곧바로 도핑을 하더니 파티장의 신호에 맞추어 앞 다투어 눈앞에 자리 잡은 동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형진의 시야에 10분이라는 시간이 표시되더니 곧바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타임 어택이었군.”
어쩐지 처음 집행자가 될 때 받았던 퀘스트가 떠오른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건만, 어쩐지 굉장히 오래 전에 겪었던 일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꽉 잡으세요.”
“네”
형진은 여신들에게 그렇게 한 마디를 건네고는 곧바로 전율의 질주를 발동했다.
[탱커님? 헉!]앞서가던 파티장이 그렇게 귓말을 걸다가 갑자기 형진의 모습이 확 하고 다가오자 기겁을 했다.
“네?”
“아, 아뇨. 그냥… 왜 안 오시나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좀 딴 생각을 하느라.”
“그랬군요.”
파티장은 뭐라 따져 묻지도 못한 채 혀를 내둘렀다. 탱커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니, 도대체 얼마나 고렙이길래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싶었다.
“누구냐! 컥!”
병사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파티원 가운데 두 명이 동시에 화살을 쏘자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린다.
“쳐!”
“으라차!”
뒤이어 두 명의 격수가 각기 좌우로 달려 나가며 무기를 휘두르자, 병사는 참혹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제법이다. 비록 잡몹에 불과하기는 해도 현실과는 달리 화살이나 검에 맞는다고 단숨에 죽어 넘어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화살 조심!”
첫 번째 몹은 신속하게 처리했지만, 비명 소리를 들은 목책 뒤에 자리잡고 있던 다른 적들이 아군을 인식하고는 화살을 쏘았다. 파티원들은 그냥 무시하고 돌격하려는 태세였지만, 형진은 슬쩍 앞으로 나서며 꽃과 바람에게 부탁했다.
“화살을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네!”
꽃과 바람은 형진의 부탁을 듣자 곧바로 동굴 안에 한 줄기 바람을 일으켜 날아드는 화살들을 치워 버렸다.
“마법?”
“아닌데?”
파티원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화살들이 바람에 휩쓸려 튕겨나가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목책을 넘어가 적 궁수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어 굽이진 동굴 너머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십여명의 병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숫자가 꽤 많다.
형진은 그냥 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볼까 하다가, 공연히 시간 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흡!”
단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앞으로 달려 나가며 주먹을 한번 휘두르자, 곧바로 강렬한 회오리 바람이 뿜어져 나오며 달려오던 병사들을 단숨에 휘감아 주변의 벽에 내동댕이 쳐버린다. 용오름이 작렬한 것이다.
본래 용오름은 상대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기술이다. 하지만 형진은 지금 이 순간 살짝 기술을 변칙적으로 응용해 돌개바람이 전면을 통해 쏘아져 나가도록 만들었고, 병사들은 그것에 휘말리는 순간 저항하지 못하고 일제히 길을 비키듯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넵! 맡겨주세요!”
“가자!”
“힘 낼게요!”
형진의 말이 떨어지자 여신들은 급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그 순간 몸을 감싸고 있던 꼬리들이 날카롭게 바뀌며 내동댕이쳐진 병사들의 약점을 찔렀다.
[인스턴트 킬! ‘반란군 하급 병사’가 죽었습니다!] [인스턴트 킬! ‘반란군 하급 병사’가 죽었습니다!] [인스턴트 킬! ‘반란군 중급 궁수’가 죽었습니다!] [인스턴트 킬! ‘반란…뒤따르던 파티원들은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앞으로 뛰쳐 나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병사들이 죽어 넘어지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 틈조차 없었다.
그런 파티원들에게 형진의 말이 들려왔다.
[저, 실례입니다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실은 제가 이 인던은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길 안내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보통 인던에 들어오기 전에 탱커가 이런 얘기를 하면 파티원 가운데 몇 정도는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형진의 뒤를 멀거니 바라보며 따르는 이들은 감히 그런 식의 불만을 입에 담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문득 파티원 가운데 한 사람이 길드챗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 기억났어!] [뭐가?] [저 사람… 길드성의 주인이야!] [헉!]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눈앞에서 등을 드러낸 채 자신들을 앞질러 달려가고 있는 사내가 이전에 불사신 길마를 박살낸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