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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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페스타
뭔가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는 듯한, 엄연히 불굴의 의지와 강건한 정신 같은 낙인 효과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정신을 파고드는 듯한 그 기이한 소리에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밴시입니다.] [또 그 미친 헛소문에 현혹된 놈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남자들 탓으로 몰고 갈 얘기는 아니지 않나요? 제라 누나.]하지만 그런 형진과는 달리 다른 집행자들은 곧바로 그렇게 메시지를 통해 의견을 교환한다. 형진은 멀쩡해 보이는 다른 집행자들의 모습에 약간이나마 불안을 느낀 자신이 부끄러워졌지만, 사실 이제껏 별 말 없다가 그런 식으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심령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엘. 결계를 부탁합니다.] [네.]밴시는 레이스와 함께 대표적인 비실체 타입의 언데드이다. 이런 형태의 언데드는 지형지물이나 장애물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결계로 가두지 않으면 추적은커녕 전투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미엘이라고 불린 꼬마 마법사는 기젤의 요청을 받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망령을 가둘 광역 결계를 설치한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하자, 곧바로 집행자들이 전투를 벌이기 용이하도록 크기를 조절한다.
[완료되었습니다. 지속 시간은 30분. 비상주 형태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결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상주형과 비상주형이다. 상주형은 결계를 펼친 자나 집단이 계속 한 자리를 지키며 결계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고, 비상주형은 처음의 설치 외에는 따로 신경 쓰지 않는 방식을 의미한다. 차이는 결계의 지속시간과 강도. 당연히 상주형이 비상주형에 비해 훨씬 강력하다.
형진은 다른 집행자들이 나누었던 미친 헛소문이 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밴시와의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발걸음이 급해진다. 그리고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 역시 더 강렬해진다.
처음에는 웃음소리처럼 들렸던 것이 가까워질수록 흐느낌과 같은 소리로 변해간다. 물론 들을수록 소름끼치는 소리라는 건 마찬가지. 아마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집행자가 아닌 다른 자들이었다면, 그 소리만으로도 미쳐 날뛰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포와 죽음이 자신의 추종자인 집행자들에게 강건한 정신이나 불굴의 의지 같은 능력을 부여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마침내 탁 트인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야가 넓어지는 바로 그 순간, 무언가 바람 같은 것이 그들을 향해 확 불어 닥친다.
[오귀스트!] “오우!”메시지가 아닌 육성으로 화답하며 중갑 사내가 대열 선두로 튀어 나오더니 방패를 내밀고 그 바람 같은 것을 정면으로 맞받는다.
쩌엉!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창 같은 것이 방패 앞에서 깨지는 듯한 소음이 들리며 오귀스트의 거구가 뒤로 주욱 밀려난다.
[막았다!] [제라! 크루그! 시체부터!]다시금 기젤이 이름을 호명하자 검은 옷의 여자와 소년이 좌우로 갈라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그제야 형진은 밴시라는 존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 여인의 망령이었다. 눈에서는 쉴 새 없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고통와 저주가 담긴 목소리로 무언가를 우는 듯 웃는 듯 흐느끼는 소리를 계속해서 내지르고 있었다,
밴시 근처에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작은 제단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헐벗은 모습의 여자 하나가 심장에 불길한 느낌의 단검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제물로 바친 당사자로 보이는 모험가들은 제단 앞에 널브러진 채 오공으로 피를 쏟아낸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무슨 헛소문에 심취해 이런 미친 짓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밴시의 울음소리를 코앞에서 듣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이미 에러다.
검은 옷의 여자 제라와 날렵한 소년 크루그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우선 제단과 그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공격했다. 밴시와 같은 망령 부류를 비롯한 강력한 언데드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언데드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으므로 시체를 미리 처리하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네 상대는 나다!”
중갑 사내 오귀스트는 앞으로 나서며 다시 한 번 그렇게 소리를 쳤다. 지금껏 메시지로 조심조심 의사소통을 하던 것과는 대비되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좌우로 갈라져 나가 시체들을 처리하고자 하는 제라와 크루그로부터 밴시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밴시는 다른 집행자들과는 달리 탄탄한 갑주를 걸친 오귀스트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분노하는 기색을 보였다. 형진은 아마도 발밑에 쓰러져 있는 모험가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떠올렸다.
쩡!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힘의 파동이 밴시로부터 발사되어 오귀스트의 방패에 맞고 부서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라의 손이 번뜩이자 검은 촉수와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제단 밑에 나뒹구는 시체의 몸을 찢어 놓았고, 크루그 역시 번뜩이는 듯한 움직임으로 몸을 날려 잽싸게 다른 시체 하나의 목을 잘라내고는 뒤로 빠졌다.
[미엘!] [눈 조심 하세요!]기젤의 호명과 함께 미엘의 경고가 전해지더니 번뜩이는 뇌전이 천둥소리와 함께 날아가 밴시에게 명중한다.
형진은 미엘의 경고를 듣기가 무섭게 단검을 든 손을 앞으로 뻗어 눈을 가리며 은신을 펼치고는 막 마법을 사용한 미엘의 옆으로 다가섰다.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으로서는 끼어들 여지조차 별로 없는 듯 해서 차라리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선 것이다.
미엘의 뇌전이 명중되는 순간 밴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 분노하며 자신을 뇌전으로 공격한 미엘을 바라보는데, 어느 틈엔가 앞으로 뛰쳐나간 기젤이 붉은 불꽃으로 감싸여진 주먹으로 그런 밴시의 머리를 후려친다.
[끝이다!]시체를 처리하고 물러나 있던 크루그가 그렇게 외쳤다. 누가 봐도 그 일격은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되었고, 명중한다면 아무리 비실체 능력을 가진 밴시라도 단숨에 분쇄되어 버릴 위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명중한다면.
“!”
하지만 기젤의 강렬한 일격에 명중하는 듯 보였던 밴시는 문득 모습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미엘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이동?”
예상치 못한 밴시의 순간이동에 방어를 맡고 있던 오귀스트가 놀라 소리를 질렀고, 미엘은 급하게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 했지만 밴시 쪽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바로 그 때, 형진이 움직였다.
밴시의 흐릿한 몸이 미엘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옆에서 숨죽인 채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형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가슴에 꽂혀있는 그것의 형상은 다름 아닌, 제물이 된 여자의 가슴에 꽂혀있는 단검.
형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서 비명을 터뜨리고 있는 밴시와 제단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그 단검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밴시의 진정한 약점이라는 사실을.
형진은 곧바로 미엘과 밴시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내뻗어 밴시의 약점을 찔렀다.
“앗!”
급하게 마법을 발하려 했던 미엘은 갑자기 자신과 밴시 사이를 막아서는 형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뭔가 번쩍 하는 섬광이 터지며 밴시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더 크게 놀랐다.
[인스턴트 킬! ‘저주받은 단검의 제물, 통곡하는 망령’이 죽었습니다!]갑자기 형진이 밴시와 미엘 사이에 끼어들 때만 해도 사람들은 뒤이어 들려올 형진의 비명 소리를 예상했다. 형진이 조금 느릿한 손놀림으로 단검을 찌를 때만 해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단검이 밴시의 흐릿한 몸과 맞닿는 순간, 짧은 섬광과 함께 밴시가 소멸하자 그것을 지켜본 집행자 모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와! 아저씨, 한 방이 있었군요?”
어느 틈엔가 코앞으로 다가온 소년이 그렇게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느릿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당사자로서는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움직임이었기에 형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단 땅에 떨어진 룻부터 주웠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인스턴트 킬로 죽인 몹으로부터 떨어진 룻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다.
“후…”
어느새 이마에 송글 송글 솟아난 땀을 닦고 있자니 기젤이 자신을 향해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제단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엘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형진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실 그녀의 마법 실력이라면 기습적인 밴시의 공격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누군가의 앞을 막아서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더구나 형진은 아직 하급 성도에 불과한 초짜이기까지 했다.
물론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그렇게 나섰다면, 자칫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자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동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형진은 단 일격으로 밴시를 쓰러뜨림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만용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였다. 때문에 미엘은 그 용기가 마땅히 치하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냥 기회가 왔길래 움직였을 뿐입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러자 오귀스트가 다가와 말했다.
“하급 성도가 밴시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대단한 것 맞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형진이 그렇게 치하를 받고 있는 동안, 기젤은 제단으로 다가가 여인의 시체가 언데드화되지 않도록 처리한 뒤, 그녀의 가슴에 꽂혀 있는 단검을 살폈다.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기젤 선트의 말에 집행자들은 제단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마도 이번 사태의 원인은 이 제단과 단검, 두 가지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이 두 가지를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그렇게 운을 뗀 기젤 선트는 음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단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검의 경우엔 공포와 죽음께 바치는 것으로 처리가 가능합니다만, 이 제단은 형체를 찾을 수 없도록 부숴버려야 할 것 같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오귀스트가 허리춤에서 손망치 비슷한 것을 꺼냈고, 제라와 크루그도 비슷한 것을 꺼냈다. 모양은 장도리 비슷한데 끝이 뾰족한 것을 보니 손곡괭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용맹하게 싸우던 집행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손곡괭이로 제단을 톡톡톡 부수는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던 형진은 얼른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기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지부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기젤은 잊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진님께서 이런 부분에 조예가 있으셨지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젤의 허락을 받은 형진은 가만히 제단을 살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걸린 뒤에야 약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집행자들은 또 뭘 하려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주의 깊게 형진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 중 누구도 형진의 행동에 딴지를 걸거나 하지 않았다. 형진이 보통의 하급 성도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그들은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찾은 형진은 단검을 뽑아들고는 그곳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 그러자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은 마치 모래로 쌓은 성처럼 단숨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