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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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경계
“허억… 헉… 헉…”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미라지 코어 지사의 총괄 개발 팀장 프리츠 베커는 접속이 끝나는 순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다. 그저 잠시 게임을 했을 뿐인데, 그의 몸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게임을 하는 동안 누군가가 그의 몸에 물을 뿌리고 간 것이 아닐까 싶은 느낌.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땀이다.
“세상에…”
프리츠는 무중력 의자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의자로부터 몸을 일으키다가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그가 사용하는 개발자용 접속기는 일반적으로 시판되는 접속기와는 다르게 훨씬 감도가 높다. 개발 중에는 이런 높은 감도가 큰 도움이 되지만 지금처럼 격렬한 게임 플레이를 하고 난 뒤라면 실제로 몸을 움직인 것과 같은 격렬한 체력 소모가 따르게 되어 있다.
엘리시온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심혈관 같은 곳에 병을 가진 이들도 있고, 감각에 가해지는 강렬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 때문에 시판되는 접속기는 그런 식으로 위험이 초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리미터가 장착되어 있다.
접속을 해제하고서도 프리츠는 잠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몸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붉은 안광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프리츠는 개발의 과정에서 현재 엘리시온에 마련되어 있는 거의 모든 컨텐츠를 섭렵했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것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라면, 역시 공포다.
리미터가 해제된 상태여서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보스가 진면목을 드러낸 시점에서 그것이 뿜어내는 붉은 안광을 접한 순간 프리츠가 느낀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그냥 단순히 두렵다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거대한 포식자를 눈앞에 둔 연약한 초식동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그런 공포였다.
“후아…”
프리츠는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시온에는 공포라는 이름의 디버프 효과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의된 디버프에 지나지 않는다. 공포란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도 위험한 감정이고 함부로 유저들에게 개방되었을 때의 파급 효과 역시 강렬하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임의로 조작하는 행위는 가상 현실이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프리츠는 보스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마 그러한 제약마저 풀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기괴한 음식 공격의 예를 떠올려 보면, 상대는 이미 유저들의 감각을 혼란시키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엘리시온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 상태이고,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임의로 특정한 감정을 뽑아낼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전투에 접어들자, 프리츠는 이것이 조작된 감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느꼈던 것은, 임의로 프로그래밍된 감각이나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정말로 무섭고 강대한 포식자를 눈앞에 두었을 때 생물로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엘리시온은 어떻게 보면 거대한 환상의 세계다. 그것에 접속하는 자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 같은 것을 건 상태로 게임에 임하게 된다. 엘리시온은 너무나도 현실과 근접한, 문자 그대로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일컬어져도 충분한 수준의 세계이기에, 이런 자기 최면은 현실과 게임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안전 장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프리츠는 그런 최소한의 안전 장치마저 무력화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위험하다. 이것은 정말 위험하다.
리미터가 해제된 접속기를 사용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면 레이드에 참가한 유저들 중에서도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칫 그런 이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서버가 털린 일로 신뢰도가 떨어져 버린 회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치명타가 될 것이다.
프리츠는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화되자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휘청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한 잔 마시자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무중력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폰으로 유저 커뮤니티를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오늘 있었던 이벤트 던전의 일로 떠들썩하다.
-미쳤어. 그걸 무슨 수로 잡으라는 거야?
-하지만 쉽게 잡혀도 곤란한 일 아닐까.
-하긴 보상이 워낙 대단하니.
-애초에 못 잡을 걸 감안하고 그렇게 보상을 건 것일지도.
-난 포기.
-나도. 그건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보스가 아니야.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보너스 개념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 이젠 월드 보스도 그럭저럭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전설 세트라… 가지고 싶긴 한데.
-전설 세트는 그렇다 쳐도 에픽템 먹은 사람은 나왔나?
-없을 걸. 진귀급은 꽤 많이 나온 것 같던데.
개중에는 조금 더 심층적인 토론을 나누는 곳도 있었다.
-적어도 단순한 해커는 아닌 것 같아.
-그냥 게임을 장악하고 그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지는 그런 인물은 아니라는 얘기지.
-알고 보니 엄청난 거물이었다던가.
-그럴 수도. 해놓고 보니 그냥 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지.
한편으로는 제작사를 비난하는 쪽도 있었다.
-난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왜 미라지 코어는 서버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거지?
-제작사가 서버 위치를 모르면 누가 안다는 얘기야?
-사실은 다 거짓이고 계획된 음모 같은 것 아닐까?
-또 나왔네. 음모론자.
-근데 딱히 음모로만 치부하기도 힘들어. 생각해봐. 해커한테 털려서 운영권을 말아먹은 게임이 지금까지 버젓이 계속 살아있는 것도 웃기고, 그런 게임의 주가가 계속 치솟는 건 더 웃긴 일이지. 아무리 봐도 지금 상황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문제는 그 회장이라는 자야. 아직도 행방불명이라며?
-혹시 자작극 아니야?
-그럴지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하러?
-듣자하니 엘리시온에 적용된 기술들은 세상을 확 바꿔버릴 정도라던데.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압박이 들어오지 않겠어?
-하긴, 그럴 만한 자들이 있긴 하지.
-프리메이슨이라든가.
-음모론은 좀 집어치우지?
-잘하면 장미십자회도 나오겠네.
-나 그거 알아. 로젠크로이츠!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카드캡터?
-그건 크로우 리드 아닌가?
-진짜다! 여기 진짜가 있어!
프리츠는 유저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현재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솔직히 자신조차도 회장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주장에 귀가 솔깃한 걸 부정하기 어렵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유저들의 얘기는 금새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렸지만, 그중에는 이런 얘기도 있었다.
-어째서 죽음의 천사였던 걸까.
-글쎄.
-확실히 그건 상당히 인상 깊은 일이긴 했지.
-솔직히 나로선 좀 불쾌한 일이지만, 살펴보면 죽음의 천사는 이미 꽤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긴 해.
-모티브로?
-그런 것도 있고. 보니까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경우도 있더라고.
-아, 나 그거 봤어. AV치고는 꽤 대단했지.
-맙소사. AV라고?
-참…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인간들의 적응력이란.
-진짜 죽음의 천사가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천벌을 내리지 않을까.
-그쯤 되면 정말 용감하다는 말도 하기 어렵네.
-그야말로 목숨 건 짓 아닌가?
-일부러 누군가가 부추긴 걸 수도 있지.
-누가 그런 미친 짓을?
-그런 식으로라도 죽음의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길 원하는 누군가.
죽음의 천사에 대해서는 프리츠도 궁금한 점이 많았다. 정말 신이나 천사 같은 초월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렇게 보이도록 교묘한 눈속임을 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었고, 프리츠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렇게 휴대폰으로 커뮤니티들을 살펴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문득 메시지가 전해져 온다. 확인해 보니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개발팀 동료다.
-뭐해?
-쉬고 있지.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왜?
-테스터 가운데 몇 명이 나가 떨어졌어. 계속 하려면 결원을 보충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없지. 부탁해.
-알았어.
그렇게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생판 모르는 번호다. 누구지.
“네.”
“실례합니다. 프리츠 배커씨 맞습니까?”
“맞습니다. 누구신지?”
“아이리스 인터내셔널의 제이콥 퍼넬입니다. 회사의 일로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아이리스 인터내셔널? 처음 들어보는 회사 이름이다. 혹시 헤드 헌터인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리츠 역시 앞길이 막막한 건 마찬가지라 일단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조만간 임시 주총이 열리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야 뭐…”
“회사의 경영권이 어딘가로 넘어갈 거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죠?”
“네.”
“제가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은, 프리츠 베커씨에게 새로운 미라지 코어에서 최고 기술 책임자(CTO)의 역할을 맡으실 의향이 있으신지 타진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네?”
프리츠 베커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경영진이 교체되면 영락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직장을 찾아봐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프리츠 베커씨?”
“네? 네!”
“어떻습니까. 의향이 있으십니까?”
“자, 잠시만요.”
이게 뭐지. 신종 사기 같은 건가. 갑자기 이게 무슨.
프리츠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상대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주소와 일시를 보내드릴 테니 방문해 주십시오. 의뢰인께서 간단한 면접을 거치길 원하십니다. 조금 급박하게 연락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아시다피시 임시주총까지 시일이 촉박해서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면접… 이라고요?”
“네. 그럼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자, 잠깐…”
프리츠는 급히 상대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이게 뭔 일인가 하고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노트북의 메일을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샌프란시스코의 주소와 함께 일시가 적혀 있었다.
“내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혹시 이런 식으로 자신을 꾀어 뭔가를 벌이려는 속셈인가. 이를테면 서버의 위치 같은 거라든가. 하지만 자신을 털어봐야 나올 만한 것도 없는데.
하지만 역시 지금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자신에게 제안된 최고 기술 책임자(CTO)의 직책이다.
솔깃한 일이다. 개발 총괄 팀장이라는 허울 좋은 직책이 아닌, 제대로 된 권한과 의무를 지닌 경영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현재 엘리시온의 모든 운영권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해커에게 장악되어 있는 상태. 과연 최고 기술 책임자의 직위를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단순히 허수아비에 불과한 그런 직책인건 아닐까.
여러 가지로 의문스러운 일이지만, 역시 자세한 것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 프리츠는 만약을 대비해 가족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려두고는 다음날 면접 장소로 가보았다.
“…”
주소에 적힌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번화가로 이름 높은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고층 빌딩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안내 데스크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직원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공손한 표정으로 직접 어딘가로 안내했다.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전용 엘리베이터라도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히더니 뭘 누르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슬슬 불안해지려고 할 때, 처음 작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멈춘다. 프리츠가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자,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 하나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한다.
“프리츠 베커씨,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
엉겁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어느 틈엔가 몸을 돌려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머쓱해진 프리츠는 괜히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앞서서 걸어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통로를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사무실이 아니라 금문교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였고, 찻잔을 쥔 채 바다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그를 돌아보았다.
쿵!
어째서일까. 프리츠는 그 순간 심장이 주저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기이한 형태의, 눈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 뿐인데도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프리츠를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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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