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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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인 등극
형진은 다른 접시를 내밀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자, 이쪽의 음식도 살펴보십시오.”
제랄딘과 미엘은 그제서야 테이블에 벌여진 음식들이 모두 세 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앞서 공녀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감안해서, 제 나름대로 요리들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아, 물론 맛도 고려를 했지만, 가급적 전투식량으로 사용될 것을 감안해서 같은 효과의 중첩을 피하고, 용도에 따라 필요한 효과들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도록 선별했습니다.”
가장 먼저 형진은 방금 제랄딘이 맛을 보았던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근접전을 수행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체력, 방어, 회피, 상태 이상 저항, 회복 속도 증가, 지구력 같은 방어를 위한 능력 상승이 주된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진은 다른 접시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쪽은 궁수와 같은 원거리 무기 사용자들을 위한 요리입니다. 명중률, 치명타 발생 확률, 치명타 피해, 저항 무시 등의 공격적 성격의 버프와 이동 속도 증가 같은 보조적인 요소가 주를 이룹니다.”
마지막은 미엘 옆에 놓여진 접시다.
“그리고 이쪽은 마법사들을 위한 것입니다. 최대 정신력, 정신력 회복속도, 적중력, 집중력, 마법 공격력 증가, 지구력 같은 요소들을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이것은 구성된 요리의 종류와 그 요리들을 섭취했을 때의 효과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확인해 주시고 가감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면 말씀 주십시오.”
“…”
미엘은 형진이 건넨 종이를 받아들더니 그것을 제랄딘과 함께 살폈다.
놀랍다. 장인이란 말을 듣긴 했지만 한 사람이 이 정도 가짓수의 요리들을 이처럼 엄청난 완성도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비록 자신들이 요리를 통한 도핑 효과를 얻기 위한 전투 식량 개발을 추진하고 있기는 했어도 고작해야 버프 효과를 지닌 요리 한두 가지 정도만이라도 대량생산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 남자는 자신들의 계획은 물론이고 상상력마저 완전히 넘어서 버렸다.
“저… 이것 먹어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잠깐…”
도저히 못 참겠는지 결국 미엘이 그렇게 말하고 접시에 손을 뻗자 종이에 적힌 내용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랄딘이 화들짝 놀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미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크를 쥔 미엘의 손은 번개같이 움직여 접시 위의 음식을 입안으로 옮겼다.
근데 미엘은 마법사 아니었나. 무슨 마법사의 손놀림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람.
형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릴 찰나, 미엘의 입에서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
그것은 마치 언덕 위에서 외로운 늑대 한 마리가 밝게 뜬 보름달을 등 진 채 터뜨리는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미엘은 그렇게 고개를 한껏 쳐든 채 몸을 바르르 떨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위, 위험해요. 이건.”
그렇게 제 정신으로 돌아온 미엘은 식은땀마저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도핑한답시고 이 요리를 먹었다가는 부대 전체가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거에요. 어쩌죠?”
자못 진지하기까지 한 말투를 보니 정말로 이 음식을 위험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럴 법도 하다. 제랄딘은 물론이고 미엘마저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릴 정도라면, 그녀들과 같은 강자가 아닌 보통의 병사들이 이 음식을 섭취했을 때의 모습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하지만 형진은 그렇게 잔뜩 긴장한 미엘의 모습에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소규모 부대 단위로 순차적으로 섭취하면 되니까요. 어차피 취식 중에는 따로 경계병도 두지 않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미엘의 모습을 보면서 제랄딘은 자신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더 굉장했다. 단순히 그냥 굉장했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아마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모든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웃으며 지켜봤던 형진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크흠. 그나저나 오귀스트님도 다시 방문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오귀스트마저 자신의 실태를 보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핑하고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다.
“그게…”
하지만 형진과 유아는 오귀스트의 이름이 나오자 쓴웃음을 지으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불길한 예감에 제랄딘이 그렇게 묻자, 형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그게… 맛을 잠깐 보시더니 자제심을 잃으시는 바람에… 과식으로 인해 지금 손님용 침실에 누워 계십니다.”
“그 오귀스트님이요?”
“말도 안 돼!”
형진은 미처 모르는 일이지만 오귀스트는 한 때 꽤 잘 나가는 기사였다. 제랄딘의 기사 중 하나인 그랙커스와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기사로서 활동할 당시의 인연 때문이다. 참고로 그랙커스는 제랄딘을 호위하는 기사들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상급기사이고, 수도에서도 특히 명성이 높은 열 명의 기사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지금은 모험가로서 활동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사가 되기 위해 단련했던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오귀스트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고, 그런 요소들 중에는 절제 같은 미덕도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런 오귀스트가 자제심을 잃을 정도라니. 도대체 이 음식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사실, 아무리 장인급의 실력이라도 이 정도로 엄청난 효과를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히 맛있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기사가 자제심을 잃고 포커페이스의 공녀가 교성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리면서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도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겨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유아가 재료를 손질하며 퍼부은 신성력, 바로 그것이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주된 원인이었다.
보통 희망과 생명이라고 표현되기는 하지만, 이 여신이 관장하는 것에는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친화력 증가나 매료 같은 낙인의 효과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료든, 사랑이든, 어쨌거나 그런 종류의 신성력이 듬뿍 들어간 식재료를 무려 장인의 손길로 버무려 음식으로 재탄생시켰으니 그 증폭된 효과가 얼마나 엄청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더구나 이것은 정신이 아니라 미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전달된 효과이니 집행자들이 지닌 낙인으로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신 공격에 대해 면역에 가까운 효과를 지닌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이것은 바꿔 말하면 자연적으로 경험을 통해 개발될 수 있는 저항 능력의 성장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든 낙인의 효과를 우회하게 되는 경우 보통 사람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오귀스트나 제랄딘, 그리고 미엘이 그랬던 것처럼.
“이건 정말로 위험해요.”
“응. 맞아.”
이미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버린지 오래인 제라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미엘의 의견에 동의한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오귀스트가 자제심을 잃을 정도라면, 평범한 병사들에게 먹일 경우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제랄딘이나 미엘처럼 잠시 딴나라를 노닐다 오는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전투 직전에 자제심을 잃고 서로 더 먹겠다고 싸움질이라도 벌이기 시작하면, 자칫 부대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형진은 당황해서 얼른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까지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정말요?”
제랄딘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유아가 얼른 말을 받았다.
“네. 실은 이미 신전의 아이들에게 먹여 봤거든요. 맛있다고 난리가 나긴 했지만, 더 먹겠다고 싸우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음…”
아이들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욕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직 정서적으로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상태라서 자제심 같은 부분이 성인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탓이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무조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희망과 생명이라는 신에게 속해 사제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별 문제가 없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유아의 말에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형진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비로소 자신들이 가진 공통점, 바로 집행자라는 신분에 생각이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위험해요.”
“그렇군.”
집행자들에게만 이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독과 같은 형태로 작용할 수도 있는 문제다. 잠시 동안이라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멍청한 호구신의 능력이 공포와 죽음의 성도들에게 비수와도 같은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니, 세상일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건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네요.”
미엘의 의견에 형진과 제랄딘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곧바로 미엘이 지닌 도시락 용기 시제품에 근접전 사양의 전투식량을 담은 뒤, 그것을 마차 호위로 같이 온 기사들에게 지급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긴장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지만, 이게 웬 걸.
“대단합니다. 힘이 막 불끈 불끈 솟는 느낌이군요.”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막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몸에 막 좋은 느낌인데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네요.”
“이런 멋진 성찬을 내려 주시다니, 제 이 한 목숨 공녀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공녀님 만세!”
마지막에 이상한 대답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호위 기사들의 반응은 호평이긴 해도 딱히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인다. 살짝 흥분 상태가 된 듯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맛 때문이라기 보다는 버프 효과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역시… 우리에게만 더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 같네요.”
“어쩌죠?”
잠시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이 문제를 자신들 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데 의견을 함께 했고, 지부장인 기젤에게 이 내용을 보고했다.
“음… 그럼 잠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부장 기젤은 신사다운 몸짓으로 가만히 포크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오…”
“역시 기젤님…”
별다른 기색 없이 우물우물 음식을 씹고 있는 모습에 감탄하던 세 남녀는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씹고 있다. 마치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문득 외알 안경 안쪽으로부터 굵은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
울고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근엄한 신사의 모습을 유지하던 저 지부장 기젤이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건… 대단한 요리로군요.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회한들이 단숨에 밀어닥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
역시나 집행자가 문제였던 셈이다.
기젤은 깊게 심호흡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이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이해했습니다. 바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대책이 돌아올 거라 생각합니다.”
기젤의 말대로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형진의 저택에 모였던 집행자들에게 낙인의 기능이 업데이트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황금 상자가 하나씩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