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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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인 등극
자신감.
제랄딘이 이 순간 형진에게서 느낀 것은 바로 그러한 감정이다.
분명 형진의 요리는 스스로 자부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이것은 현재의 무언가가 아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자신감으로 비춰진다.
그게 뭘까.
궁금해진다.
“알겠습니다. 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유가 있겠죠. 그럼 사흘 뒤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의외로 깔끔하게 물러나는 제랄딘의 모습에 형진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표정의 변화조차 거의 없이, 속을 내비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은 숙련된 정치가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완벽한 포커페이스. 단순히 상대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는 것을 넘어, 표정 하나 몸짓 하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흘 뒤 다시 이곳을 찾으셨을 때, 그 잠시 동안의 기다림이 전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기대하겠어요.”
형진의 말에 제랄딘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응대하고는 미엘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오귀스트 역시 사흘 뒤 다시 만나 얘기하기로 약속을 하고 그 뒤를 따른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마차가 저택을 떠나자, 근처의 주민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리는 모습이 비친다.
“정말 멋진 분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제라와 미엘이 오귀스트에 의해 언급되었을 때만 해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주제에 어느새 팬이 되어 버린 건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마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과연 호구신의 사제답다.
제랄딘의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은 남자가 보기에도 꽤 멋진 면이 있긴 하다. 다만 너무 완벽한 포커페이스라 계속 마주하며 대화하기가 좀 무섭다는 것이 흠이랄까. 하기야 계속 대담을 해야만 했던 형진과는 달리 유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슬금슬금 훔쳐 보는 게 다였으니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아마도 실감을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왜 사흘 뒤라고 하신 거에요?”
“글쎄, 왜일까.”
형진은 빙긋 웃고는 남은 해를 잠시 살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군. 신성한 식충이 메이드여. 저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의 혼과 정열을 요리에 담아 보자꾸나.”
“엑? 오늘은 끝 아니었어요?”
“끝이라고 했을 때가 비로소 진정한 시작인 법이지. 후후후후.”
“…”
이때까지만 해도 유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형진이라는 남자가 정말로 혼과 정열을 불태우면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
마침내 형진이 언급한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제랄딘은 미엘의 시중을 받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앞서 약속한 시간이 되었기에 다시금 형진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머리를 정리하고 화장을 한다. 제랄딘은 화장을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수단보다는, 스스로가 지닌 자신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녀의 외모는 분명 다른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무기였고, 그런 훌륭한 무기를 쓰지 않고 버려두는 것은 낭비에 불과한 일이다.
“오늘은 어떤 드레스로 하시겠어요?”
미엘의 말과 함께 시녀들이 몇 번의 드레스를 선보인다. 허리로부터 넓게 퍼지는 A라인 드레스부터, 상체로부터 풍성하게 퍼지는 엠파이어 드레스 등 여러 가지 스타일의 옷들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저걸로.”
“어머.”
제랄딘의 손이 가리킨 것은 막 내린 눈처럼 새하얀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가슴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에서 무릎까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고, 무릎 아래에서 비로소 넓게 퍼지며 인어의 지느러미처럼 하늘거리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드레스다.
미엘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제랄딘은 분명 이 드레스를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몸매를 지녔다. 그러나 비장의 무기는 아껴 두어야 하는 법. 때문에 그녀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지 않는다.
즉, 머메이드 드레스는 제랄딘 나름의 승부 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엘은 물론이고 다른 시녀들 역시 그녀를 어렸을 때부터 모신 이들이기에, 머메이드 드레스가 어떤 의미인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녀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그녀를 단장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이곳 그리칸에 자리한 브라드로슈 공작가의 별장으로부터 형진의 저택까지는 마차로 달려 약 이십 분 정도의 거리. 물론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통행에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달리는 것이라 실제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편이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첫 방문 때보다는 그래도 좀 익숙해진 듯한 느낌으로 유아가 그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려서면서 보니 사흘 전에 봤을 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약간 포동포동해진 것 같은 느낌이면서도 눈가에는 거무스름한 기운이 서려있다. 얼핏 보면 잘 먹어서 그새 살이 더 찐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얼굴을 물론이고 신체 동작 하나 하나에 스며 있는 느낌이랄까.
유아의 그런 모습을 보자 제랄딘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던 기대감이 슬금슬금 다시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지난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서 오십시오.”
그렇게 마차에서 내려서는데, 그제서야 주인인 형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제랄딘과 미엘을 맞이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사흘 전에 봤을 때와 별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제랄딘은 형진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혈색이 좋아졌다든가 하는 식의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후광 같은 것이 얼굴 전체에 옅게 드러나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옆에 선 미엘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눈을 비비고 다시 형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 역시 제랄딘과 마찬가지로 형진의 모습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둘이 받았던 그런 느낌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다시 본래의 느낌으로 돌아온 것이다.
제랄딘의 눈빛이 문득 심유해졌다. 자신과 미엘이 동시에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면, 이것은 단순히 눈의 착각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진의 안내를 받아 제랄딘은 응접실로 들어섰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해진 탓에 전처럼 테라스에서 대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형진이 이쪽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벽난로에서 불꽃을 머금은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제랄딘과 형진은 테이블을 마주한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뭔가 달라지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게 제랄딘이 운을 띄우자, 형진이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역시 공녀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그동안 작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진전이라. 그것 때문에 사흘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하지만 솔직히 조금 의문이다. 고작 사흘 만에 얼마나 큰 진전이 있었기에 이렇게 분위기 자체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일까.
“진전이 있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형진은 그녀의 축하를 담담히 받아들이고는 유아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것을 가지고 오도록.”
“네.”
유아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나가더니 작은 손수레를 끌고 와서 몇 개의 접시를 테이블 위에 벌여 놓기 시작했다.
“이것은…”
은은하게 전해지는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킨 제랄딘은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살짝 당황했으나 표정으로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공녀님의 말씀을 듣고, 제 나름대로 메뉴를 구성해 봤습니다. 변변치 않은 솜씨입니다만, 시식을 부탁드립니다.”
“아… 그랬군요.”
옆자리에 앉은 미엘은 아직 먹으란 말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꼴딱꼴딱 군침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다. 솔직히 제랄딘도 참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생전 처음 맡아 보는 기이하고도 강렬한 향기가 어느 순간 그녀의 감각을 마치 멱살 쥐듯 움켜잡은 채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제랄딘은 조금 떨리는 손길로 포크를 집어 들고는 요리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그녀 앞에 우주가 펼쳐졌다.
수많은 별들이 휘황하게 빛나며 그녀 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녀는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신발을 벗고 그 아름다운 은하수 속으로 들어가 발가락 사이로 흐르는 별빛의 감촉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름답고 조용하게 흐르던 은하수는 갑자기 격렬하게 변주를 시작하더니, 거대한 해일처럼 그녀의 전신을 덮쳐오기 시작한다.
아아, 그것은 격정이었으며, 또한 환희였다.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는 별의 홍수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거대하게 불타오르는 태양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뜨거우면서도 격렬한 그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 속에서 제랄딘은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허우적거렸다.
“고, 공녀님?”
그렇게 잠시 딴세상으로 빠져들었던 제랄딘의 정신은 옆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본래대로 돌아왔다.
“어? 어어?”
제랄딘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방금 전에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대단해요?”
“뭐?”
미엘의 말에 제랄딘은 그제서야 자신이 취한 행동의 전모를 깨닫고는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랄딘은 음식을 먹자마자 그대로 뿅 가버렸다. 상당히 저속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녀의 상태를 표현할 방법도 없다. 문자 그대로,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엑스터시라는 상태를 체험한 것이다.
미엘이 놀란 표정을 지은 건 단순히 제랄딘의 포커 페이스가 깨진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그녀가 터뜨린 탄식은 차라리 교성과도 같은 것이어서 같은 여자인 미엘이나 유아마저도 듣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질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도 음식을 먹고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인데, 하물며 철혈이라 불리워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제랄딘이 그랬으니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랄딘은 경악과 수치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눈앞에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며 빙긋 웃고 있는 형진을 향해 물었다.
“당신… 도대체 음식에 무슨 짓을 한 거죠?”
비약 중에는 이성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그런 종류의 것도 존재한다. 혹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먹인 것이라면 공포와 죽음에 맹세코 이 남자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형진은 제랄딘의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이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한순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버린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렇게 대답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요리에 혼을 담았을 뿐.”
“혼… 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혼을 담아낼 수 있는 경지. 저는 그것을 장인이라고 부릅니다.”
제랄딘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을 담아내는 경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약 단순히 요리 실력만으로 자신에게 그런 실태를 보이게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일이 분명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랄딘을 바라보며 형진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사흘을 기다린 댓가로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제랄딘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