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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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인 등극
꿀꺽.
조금 떨어진 곳에 오도카니 서 있는 유아는 갑자기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게 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형진은 자신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머금는 미소와 그 뒤에 흘러나온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제랄딘은 그런 형진을 보며 잠시 미소를 유지하다가 이내 다시 본래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온 뒤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로 간이 큰 자는 없었어요. 최근에 파혼한 황자가 조금 그런 낌새를 보이긴 하는데, 어떻게 나올지 조금 기대가 되긴 하네요.”
최근에 파혼한 황자라면 형진도 잘 알고 있다. 본래 황자비로 예정 되어 있던 영애를 암살한 것이 바로 형진 자신이니 모르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제랄딘 역시 그 일을 떠올렸는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확실히 당사자들에게 있어 그 영애의 일은 결코 떠올리기 유쾌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물론이고, 그 불명예스러운 최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되요. 물론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긴 하겠지만, 제 성격엔 이쪽이 더 맞는 것 같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물론입니다. 더구나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면 그런 숨겨진 무언가는 은연중에 자신감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니까요.”
제랄딘은 형진의 대답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차가운 미소와는 또 다른, 친근감 어린 미소다. 같은 웃음인데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다니. 형진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일단…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해요.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일단 어떤 요리들이 가능한지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그건… 제가 설명 드리는 것보다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여자한테는 변변치 않은 언변으로 치장하느니 직접 확인시켜주는 것이 나을 듯 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는가.
제랄딘 역시 형진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수긍했다.
“아… 오늘도 요리 수련을 계속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죠? 그게 좋겠네요. 안내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형진의 안내를 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제랄딘과 미엘은 눈앞에 차려진 가지각색의 요리들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머!”
어제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차분하고 조용한 시녀를 연기하고 있던 미엘의 표정이 단숨에 무너지며 눈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꼬리가 있다면 아마 맹렬하게 흔들어 대고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표정이랄까.
“간단하게 시식을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유아, 접시를 가져다 드리도록.”
“네.”
허겁지겁 유아가 큰 접시를 둘에게 가져다주자, 딱히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랄딘과 미엘은 식탁을 누비며 이것저것 음식을 덜어서 맛을 보기 시작한다.
“후으으으응! 너무 맛있어요.”
“그러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유아처럼 꽃밭을 노니는 정도의 리액션은 아니었지만, 머리에 솟은 귀를 바르르 떨며 행복에 겨워하는 미엘의 반응도 꽤 볼만하다. 그에 반해 제랄딘의 경우는 살짝 볼이 상기된 정도 밖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 하기야 저 아가씨 성격에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반응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이거… 그냥 보고 있는 건 역시 고역이군요. 저도 끼어야 겠습니다.”
“하하, 얼마든지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오귀스트 역시 결국 참지 못하고 먹방 대열에 합류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황실 요리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겠어요.”
“요리의 신선도 역시 대단해요. 신성력 때문인가요?”
“아마도요. 저희 메이드가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실력이 대단하지요.”
“아… 호구, 아니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고 하셨죠? 역시 대단해요.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이렇게 대단한 신성력을 지니고 계시다니, 여신께서 특별히 아끼는 분이실 것 같아요.”
“아하하하…”
아무리 봐도 꼬맹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미엘이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자, 유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멋쩍게 웃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형진에게 물었다.
“제가 희망과 생명의 사제란 것까지 말했어요?”
“괜찮아. 이들은 네 후광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들이니까.”
“…”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또 뭔지. 유아는 어쩐지 자기만 따돌림 당하는 느낌에 볼을 부풀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공포와 죽음에 속하지 않은 인물은 오직 그녀 뿐이니 그 미묘한 동질감에 의해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지?”
“네, 아가씨.”
미엘은 제랄딘의 말에 그렇게 답하고는 예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가능한 요리의 전부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시도하지 않은 요리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직 인벤토리 안에 고이 잠자고 있는 송로버섯이라든가.
“세상에!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제랄딘은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접시를 내려놓고 형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좋은 요리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여기 계속 있다가는 음식만 먹어대다가 본론은 시작도 못할 것 같으니, 잠시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알겠습니다.”
다시 테라스로 이동한 제랄딘은 테이블에 마주 앉기가 무섭게 얘기를 꺼냈다.
“실은 이전부터 한 가지 계획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제랄딘이 진행 중이던 계획은, 간단히 말하면 기사단을 위한 전투식량에 대한 것이다.
물론 전투식량이라고 하면 건빵이나 보르츠처럼 야전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사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랄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것보다 좀 더 본격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방금 형진이 선보였던 것처럼 버프 효과를 가진 음식들을 적당히 구성해 본격적인 전투 직전에 기사들에게 배식하여 전투 능력을 상승시키는 그런 개념인 셈이다.
“과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단순히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만을 대상으로 생각했던 형진은 군납이라는 엄청나게 먹음직스러운 돈벌이 대상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하지만 이 계획은 생각처럼 실현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버프 능력치를 발현할 수 있는 요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그런 실력을 갖춘 요리사들은 자존심이 높아 대량으로 음식을 제조해 군대 같은 곳에 납품하는 일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더구나 한두 사람을 위한 요리를 만드는 것과 수백명의 인원에게 먹일 음식을 한 번에 만드는 것 자체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사회에서 된장국 좀 끓이던 사람이 군대 가면 똥국 밖에 못 끓이는 것과 같은 이유다.
“사실 제가 이곳 그리칸을 찾은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이전부터 모험가들의 노하우를 군사적인 분야에 적용한 사례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야전에서 흔히 쓰이는 도구부터 시작해서 먹을거리나 기타 여러 가지 분야에 이르기까지,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의 지식은 군사적인 분야에서 많은 도움이 되어왔다. 실제로 제랄딘이 계획한 기사단의 전투식량이라는 아이디어도, 모험가들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시도하는 도핑 등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계획이다.
모험가들은 음식만이 아니라 연금술을 통해 만들어진 비약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 도핑을 한다. 어떻게 보면 음식보다는 비약을 이용한 도핑이 더 보편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속시간은 길어야 십분 안팎 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극히 짧지만, 그만큼 강렬한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 투약하여 효과를 보는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던전 탐험과 전투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탐험 중에는 적과 조우한 시점에서 짧게 확 도핑을 하고 다시 전투가 끝나면 잠시 정비했다가 다시 전진하는 식의 행동이 가능하지만, 전투는 자칫하면 하루 종일 피 튀기는 혈전이 이어질 경우도 있다. 잠시 반짝 도핑을 하는 정도로는 그런 긴 전투에서 큰 효과를 보기 힘든 것이다.
때문에 제랄딘과 미엘은 비약을 요리에 섞어 섭취해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형진이라는 존재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수많은 요리를 오직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그 많은 요리들이 제각각 서로 다른 효과를 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제랄딘과 미엘이 고민해 왔던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를 오직 이 한 사람의 힘 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어찌 경이롭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저도 그런 용도로의 활용을 고민해 봤으나, 한 가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바로 보관의 문제죠.”
그 말을 들은 제랄딘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미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은 저희도 그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것들이죠.”
미엘이 그 말과 함께 꺼내 보인 것은 딱 봐도 도시락 용기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두 개의 사각 용기였다.
하나는 척 보기에도 황동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고, 또 하나는 나무로 만든 듯 하다.
“이것은 황동으로 만든 것이고, 이쪽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거에요. 황동으로 된 것은 기사단용으로 쓸 생각이고,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것은 병사들을 위한 것이죠.”
“차이를 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일단 황동이든 자작나무 껍질이든 음식물이 쉽게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성질이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차이도 분명히 있죠. 황동은 외부에서 충격이 다소 가해지더라도 쉽게 파손되거나 하지 않는 대신, 제작 단가가 비싸다는 문제가 있어요.”
“확실히 황동은 단가가 센 편이죠.”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자 미엘은 신이 나서 말을 잇는다.
“그에 반해 자작나무 껍질은 제작 단가가 싸지만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고 재활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지요. 사실 병사들에게 황동 재질의 용기가 지급될 경우 회수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단순히 회수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를 떠나서 그 많은 용기들을 전장에서 회수하고 다시 재활용하기 위해 세척 등의 과정을 거치자면 너무 많은 인력이 소모되기 때문이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작나무 껍질 용기는 회수에 인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필요할 경우 불쏘시개 등의 용도로 쓸 수도 있으니 훌륭한 대안인 셈입니다.”
자작나무 껍질은 악천후시에도 불을 지필 수 있는 훌륭한 불쏘시개다. 단순히 야전에서의 취사나 난방 문제 등을 해결하는 용도 뿐만 아니라, 화공 등의 용도에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음식 냄새 나는 불화살 같은 걸 맞으면 상대 입장에선 좀 기분이 더러울 수도 있겠다.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황동이나 자작나무가 부패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해도 그것이 몇날 며칠 동안 음식의 맛이 변하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게 해준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이에요. 그래서 이런 조치들을 취한 것이죠.”
미엘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용기를 열어 보였다. 그러자 바닥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 같은 것이 드러난다.
“이건…”
“룬의 조합을 통한 간단한 결계에요. 안에 든 음식을 보호하고, 처음 담겨진 시점과 같은 상태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죠. 실험 결과, 이 용기에 담은 상태라면 최대 6개월까지 보존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어요.”
“허… 대단하군요.”
멋지다. 이런 멋진 도구가 있다면 이 세계에는 통조림이나 병조림 같은 것은 발명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유효기간은 통조림이 훨씬 길지만, 이 도구는 요리사가 막 만든 상태 그대로 6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6개월이라는 것도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비용과 효과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정한 것일 터. 그렇다면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더 길게 연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세계의 운송 수단이 열악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하나의 국가를 대상으로 장사를 벌일 만한 도구가 된다. 아니, 다 집어 치우고 군납만 잡아도 형진은 단숨에 돈방석에 앉을 수 있게 된다. 굳이 음식점을 차리지 않고, 그냥 일주일에 한번 정도 요리에 혼을 실어 불태우는 것만으로도!
제랄딘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형진이 흥분한 기색을 보이자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저희와 함께 일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는 분명 형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다. 하지만 형진은 어찌된 일인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네?”
분명 분위기 상으로 봐서는 다 넘어온 걸로 보였는데, 어찌된 일일까. 제랄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가격이나 납품 조건이라면 저희들은 얼마든지 진님의 편의를 맞춰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에 형진은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 이유는 사흘 뒤, 다시 이곳을 방문하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