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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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인 등극
잠깐.
곰곰 생각해 보니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집행자들은 상관이 없다. 적당히 칸이 나누어진 용기에 내용물을 규격화시켜서 담으면 아무리 많은 양이라도 인벤토리 한 칸이면 충분하고 무게가 되는 한도 내에서 양껏 쟁여 넣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행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는 어찌한단 말인가. 무게야 그렇다 치더라도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식고 맛이 없어지게 마련이고,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면 상할 수밖에 없다. 모처럼의 버프가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즉, 보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도시락은 집행자 전용의 아이템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칸에 있는 집행자라고 해봐야 앞서 페스타에 참여하지 않은 인원들을 고려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을 터. 이래서는 장사가 되질 않는다.
뷔페도 애로사항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성문 근처에 식당을 열고 던전 탐사를 떠나는 모험가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요리를 해놓으면 역시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리가 식고 맛없어지면서 버프 효과 또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계속 붙어 있으면서 요리를 끊임없이 보충하거나 살펴야 한다는 얘긴데, 이건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요리점만 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곤란하다. 물론 요리로 돈을 벌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것을 천직으로 삼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여러 가지 일에 필요한 종자돈을 만들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도핑용 요리를 자급하는 것이 목적이지, 요리로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보관인가.”
유아는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오귀스트는 바로 알아듣고 말을 받았다.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문제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형진이 답하자 오귀스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말했다.
“그 문제라면 미엘에게 도움을 받으면 될 겁니다.”
“미엘이요?”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던 유아는 그냥 음식이나 먹으려다가 갑자기 여자의 것이 분명한 이름이 언급되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형진도 오귀스트도 그런 그녀의 반응은 무시한 채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미엘은 인챈트 마법에 능통합니다. 버프나 마법 부여 같은 분야를 말하는 것이죠.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말입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하긴 여섯 명에게 한꺼번에 적외선 시야를 걸 때부터 뭔가 특별하다고 알아보긴 했지만, 이렇게 또 연결이 될 줄이야.
그러고 보면 요리를 통해 버프를 발동시키는 것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보였던 것도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있어서였던 모양이다. 그것 참.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이래서 참 무섭다.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형진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렇게 말하자 오귀스트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따로 연락하지 않더라도 조금 있으면 아마 제 발로 찾아올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제라님이 티타임 즈음해서 방문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녀와 함께 올 겁니다. 둘은 세트니까요.”
“세트요?”
“만나 보면 무슨 뜻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그건 잠시 뒤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도록 하지요.”
“…”
유아는 귀를 쫑긋 세운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또다시 새로운 이름이 언급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도대체 이 남자가 자기 모르게 어디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직 둘은 공식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어쨌거나 식사를 마치자 유아의 타는 속도 모른 채 형진은 다시 요리 수련을 시작했다. 오귀스트는 온 김에 자신도 좀 보고 갈 사람이 있다면서 잠시 더 머물렀다 가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대로 티타임 때가 되었다.
“유아.”
“네?”
“손님 올 때 됐다. 나가서 누가 나 찾으면 가서 문 좀 열어줘.”
“네…”
보나마나 바로 그 제라와 미엘이라는 사람들 얘기일 거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늘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유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택 앞에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는 헛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헉!”
그럴 수밖에 없다. 척 보기에도 귀족임을 나타내는 문장의 깃발을 앞세운 기사들이 호위하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느닷없이 저택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주 제대로다. 척 봐도 가려 뽑은 새하얀 백마 네 마리가 끄는 화려한 마차에 손질하는 데만도 시간 깨나 걸릴 법한 아름다운 갑주를 두른 훤칠한 기사들까지. 동화속에 나오는 공주님의 행렬이 있다면 딱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니겠지. 그냥 근처를 지나던 귀족이 잠시 쉬어가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과 너무 괴리가 있는지라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지만, 불행히도 유아의 그런 작은 기대는 단숨에 뭉개지고 말았다.
“거기 있는 메이드. 이곳이 진이라는 분의 저택이 맞느냐?”
유아의 모습은 척 보기엔 일단 메이드라 깃발을 든 기사가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미처 유아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로부터 작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래시포드 경.”
“네, 공녀님.”
방금 전 자신을 향해 조금 고압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보이며 말을 걸던 그 기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릿하게 얼른 자세를 바로하며 답하는 모습이라니. 유아는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례하군요. 경은 제대로 상대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하대하라 배웠습니까?”
“네? 하지만…”
“내 분명히 중요한 만남이 있어 방문하는 것이니 그 집의 누구에게도 무례하지 말라 일렀던 것 같은데, 그새 잊으셨습니까?”
래시포드라고 불린 기사는 그제서야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곧바로 말에서 내려 마차를 향해 무릎을 꿇고는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공녀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지만 그의 말은 이번에도 허리가 잘려나갔다.
“당신이 먼저 사과를 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그 아가씨입니다. 당신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군요. 그랙커스경이 그렇게 가르치더이까?”
“그, 그건…”
“듣기 싫습니다. 깃발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돌아가 근신하십시오. 당신의 처우는 돌아가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래시포드라는 기사는 결국 들고 있던 깃발을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는 말에 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삐를 잡고 터덜터덜 어딘가로 걸어갔다.
멍…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유아로서는 알 수가 없다. 기사가 그녀를 향해 말 한 마디를 던진 순간 뭐라 끼어들 틈도 없이 갑자기 상황이 막 흘러가 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곧바로 다른 기사가 한층 조심스러운 태도로 유아에게 말을 건넨다.
“동료가 무례를 끼쳤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저택의 주인이신 진님께 꽃중의 꽃, 왕국 제일가의 공녀이신 제랄딘 라스미어 브라드로슈님께서 방문하셨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네? 고, 공녀님이요?”
공녀라 함은 공작의 딸을 말하는 것이고, 왕국 제일가 브라드로슈라면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왕국 최고 귀족 가문을 말한다. 세상에, 그럼 저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이?
“자, 자, 자, 잠시만요! 그, 금방 말씀드리고 올게요.”
당황한 유아는 거의 구를 듯이 달려서 한창 요리 삼매경에 빠져 있는 형진에게 달려가 외쳤다.
“저, 저기. 브라드로슈의, 그러니까 왕국에서 제일 가는, 아니 제일가의…”
뭐라는 거야.
“유아.”
“네?”
“정신 좀 차려라. 내가 손님 올 거라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유아는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형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온다는 손님이 여자 맞아요?”
“맞지.”
“헉! 그럼 그 여자 손님이 제랄딘 공녀였단 말이에요? 그런 건 진작 말해줬어야죠!”
“뭐? 제랄딘 공녀?”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제라와 제랄딘. 이름이 비슷하기는 한데.
집 구경을 하고 있던 오귀스트가 소란을 눈치 채고는 다가와 말했다.
“왔나 보군요. 제가 가서 문을 열어줘도 되겠습니까?”
“네. 뭐… 그런데 공녀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믿기 어렵죠? 저도 처음 알았을 때 상당히 놀랐답니다.”
오귀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더니 유아 대신 밖으로 나가 정문을 열고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기사들을 맞이했다.
형진은 일단 하던 요리를 간단히 마무리 짓고는 서둘러 손을 씻은 다음 유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방의 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마차의 문이 열리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참이다.
“와아…”
유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감탄을 터뜨리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막는다. 형진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두 명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날렵한 체구를 돋보이게 만드는 슬림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조금 차가운 분위기의 미녀였고, 또 한 명은 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귀여운 인상의 꼬마 아가씨였는데, 아인종인지 동물의 귀와 같은 것이 머리에 솟아있었다.
“아직 계셨군요. 오귀스트님.”
“만나볼 사람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랙커스는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랙커스 경은 수도에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아, 그랬군요. 미리 알아보고 기다릴 것을.”
“중요한 일이라면 사람을 보내 기별을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좋은 음식이 있으니 모처럼 그 친구와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랬군요.”
제랄딘은 오귀스트와 그렇게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는 미엘의 시중을 받으며 형진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군요.”
“어, 아니…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형진은 그제서야 제라와 미엘이 세트라는 오귀스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엘은 바로 제라의 시녀였던 것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테라스에 자리를 마련해 마주 앉자, 미엘이 유아를 대신해 차를 내온다. 유아는 그제서야 진작 차에 대해서도 좀 배워둘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놀랐습니다. 설마 공녀님이실 거라고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대체 왕국 최고 가문의 공녀쯤 되는 사람이 어째서 공포와 죽음의 성도를 하고 있는 걸까.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형진은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제라는 그런 형진의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공녀씩이나 돼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 묻고 싶으신 거겠죠?”
“네? 그게… 그렇습니다. 일단은.”
그러자 옆에 서서 차를 따르던 미엘의 손이 잠시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테이블 주위에 간단한 결계 하나가 생겨난다. 형진은 미처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바로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결계였다.
결계가 생겨나자 제랄딘은 비로소 지금껏 숨겨왔던 차가운 미소를 내보이며 대답했다.
“간단해요. 만약 정략결혼 따위로 날 엮으려는 놈이 나타나면 그 자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