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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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협상
허세와 망상이 옷깃을 툭툭 건드리며 손짓하자 아유무가 화들짝 놀라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서류를 집어들었다.
“으음…”
서류에는 시간제 근로 계약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신들이 사용하는 계약서인지라 아유무는 봐도 무슨 글이 써져 있는지 알 도리가 없고, 오직 허세와 망상만이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허세와 망상은 미라지 코어라는 거대한 기업을 소유하고 그것을 경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시온 구현 외의 부분의 모두 인간에게 맡겨 두었었다.
인간의 법규 같은 걸 익히고 그것에 맞게 경영을 하는 식의 행동을 허세와 망상처럼 무책임한 신에게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고, 당시만 해도 신으로서 충분한 위엄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헐렁하게 회사를 이끌어 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특히나 당시에는 희망과 생명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힘의 원천이 있었고, 이것은 그런 식의 막무가내 경영이 통했던 중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엘리시온의 운영권이 털리고, 뒤이어 물주였던 희망과 생명 또한 사라져 버리자 그런 식의 경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공포와 죽음이 언제 자신을 찾아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회사 경영 따위를 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는 결국 회사를 내팽개치고 손수 파편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런 식이다 보니 허세와 망상은 막상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보고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크흠. 설명을 좀 부탁해도 되겠나.”
“어려울 것 없습니다.”
형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허세와 망상에게 건네진 것과 같은 계약서를 띄워올렸다.
“와아…”
“음…”
아유무는 눈앞에 나타난 마법 같은 광경에 탄성을 터뜨렸지만, 허세와 망상은 침음성을 삼켜야만 했다. 지금 보여지는 계약서의 영상이 마법이 아닌 자신의 권능 가운데 하나인 환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바로 알아본 탓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권능 일부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상대가 이전에 자신이 떨궜던 신격의 파편을 완전히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형진의 이 시범은 그것을 은연중에 허세와 망상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인 셈이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 드리자면, 이 계약서는 허세와 망상님께서 엘리시온이라고 이름 붙이신 거짓된 천국에서 근로를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적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기 보면 근무 장소에 거짓된 천국 괄호 치고 엘리시온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엘리시온? 나 보고 그곳에서 일을 하라고?”
자기들이 기껏 강탈해 간 엘리시온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허세와 망상이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형진은 웃음 띤 얼굴로 그 말에 답했다.
“거짓된 천국은 처음부터 허세와 망상께서 하나 하나 정성 들여 완성하신 또다른 세계입니다. 저희들이 비록 운영에 대한 권한을 획득하였다고는 하나,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신 것은 당연히 허세와 망상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아유무는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상에! 신님이 엘리시온을 만든 거였어요? 정말로?”
“그래.”
“와! 그냥 돈만 많은 식충이가 아니었던 거네요? 충격! 진짜 깬다.”
“풉!”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형진과 요안나는 아유무의 거침없는 말에 그대로 뿜어 버리고 말았다. 돈만 많은 식충이라니. 아무리 허세와 망상이 무책임하기로 유명한 신이라도 이렇게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아유무.”
“네?”
“후… 일단 어른들 얘기중이니 잠자코 있어 주겠니. 네가 끼어들면 얘기가 괜히 복잡해질 것 같아서 말이지.”
“치. 이럴 때만 어른이래.”
“…”
별로 납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유무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입을 다물었다. 허세와 망상은 한번 더 한숨을 푸욱 내쉬었고, 형진은 그런 신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동안 허세와 망상도 그리 편안한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계속해 주겠나.”
“네.”
형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아래쪽에 기재된 것은 담당 업무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거짓된 천국의 관리와 새로운 요소의 구현입니다. 이전에 하시던 일을 그대로 이어가시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이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서 한다고는 해도 과거와는 역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현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형진이 앞으로 어떻게 엘리시온을 활용할 것인지에 따라 그 업무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부분은 임금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본적으로 임금은 시간급으로 계산되며, 이것은 신앙과 공헌도로 환산되어 원하시는 쪽으로 지급을 할 예정입니다. 주휴 수당, 연장 근로 수당, 근속 수당, 명절 상여금 또한 모두 법규에 따라 정상적으로 지급됩니다. 추가로 업무 성과에 따라 성과급은 물론 인센티브도 책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허세와 망상이 화들짝 놀라버렸다.
“신앙이나 공헌도를 임금으로 지급한다고?”
“물론입니다. 신께서 가장 필요로 하시는 것이 역시 그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받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지급한다. 협상의 기본이죠.”
“오오…”
허세와 망상이 지금 이렇게 꼬맹이 모습으로 철부지 여고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신앙과 공헌도를 형진과의 싸움에서 다 털어먹은 탓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충할 수단을 주다니. 신도나 추종자들을 귀찮게 관리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이 만든 거짓된 천국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어, 얼마나?”
허세와 망상이 고개를 내밀며 묻자, 형진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미라지 코어의 지사가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시간당 최저 임금은 10.50 USD입니다. 하지만 허세와 망상께서 처리하시게 될 업무는 이 세상에서 오직 허세와 망상님 외에는 공포와 죽음님, 그리고 저만이 대신할 수 있는 일. 당연히 보통의 인간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책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래서?”
“열 배. 일단은 열 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헉! 열 배면… 시간당 105달러? 대, 대박! 신님! 저, 신님 비서 하면 안 될까요? 그냥 최저 시급만 줘도 좋으니까요. 네?”
허세와 망상에게 주의를 받고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유무가 비명 같은 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원래부터도 실리콘 밸리의 영향으로 시급이 센 캘리포니아 기준으로 열 배의 시급이라니. 한 시간만 일해도 일만 엔이 넘는 돈이 들어오는 셈이다. 용돈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던 아유무로서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실 이건 미라지 코어 같은 세계급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인물의 시급으로는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다. 참고로 전 세계 운영체제 시장의 9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작고 부드러운 회사의 창업주였던 어떤 분의 시급은 무려 1억 6450만원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에 비하면 11만원 조금 넘는 금액은 지구 기준으로도 미라지 코어 정도의 기업을 좌우하는 존재의 시급으로는 오히려 적은 규모다.
당연한 얘기지만, 허세와 망상의 능력이라면 적어도 엘리시온에 있어서는 사실상 치트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시간당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 열 개씩만 뽑아낸다고 계산해도 최소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수익은 간단하게 뽑아낼 수 있다. 그나마도 아직 허세와 망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소로 추산한 것이 그 정도이고, 제대로 그의 능력이 확인된다면 이 배율은 천 배, 만 배로 뛰어 오를 수도 있다.
허세와 망상은 엘리시온의 물품을 현실에 판매한다는 식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터라, 기존에 캐시템을 팔 때 어느 정도의 수익이 나는지 밖에 알지 못했고, 그것도 어렴풋이 추산하는 정도였다. 딱히 요안나나 희망과 생명처럼 현실에서 금전을 써서 뭔가를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금전 감각도 상당히 희박할 수밖에 없다.
희망과 생명이라도 있어서 이 상황을 지켜봤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며 따졌겠지만, 지금 허세와 망상에게 그 역할을 할 인물이라고는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철부지 여고생 뿐이었고, 그녀에게는 현재 제시된 금액만으로도 충분히 놀라 기절 초풍할 만한 액수다. 게다가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 시급이고, 각종 수당에 상여금까지 나온다지 않는가.
“신님! 뭐해요! 얼른 도장 찍어요! 이런 기회는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고요!”
“크흠! 알았으니 조용히 해. 그럼 다음 내용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형진은 근로시간과 근무일, 그리고 휴일과 휴가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고, 복리후생에 대한 것 또한 추가로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숙식은 모두 무료로 제공됩니다. 다만 장소는 안전을 위해 저희가 제공한 장소로 제한합니다.”
“그건 좀… 그런데.”
“글쎄요. 그것도 직접 보시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잠깐 실례하도록 하죠.”
형진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어딘가로 연결된 통로를 만들어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편이 빠를 겁니다. 자, 같이 가실까요.”
아유무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겁이 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요안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보이자 머뭇거리며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겁 먹을 필요 없어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니까, 직접 보면 마음에 들 거에요.”
“정말요?”
“정말요. 어찌 신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겠어요.”
“…”
아유무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골에 파묻힌 모습의 허세와 망상을 바라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질끈 감고는 통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
순간 청량한 바람에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뜨자, 아유무는 자신이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해안가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뒤로 돌아보자 이내 자신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궁전의 테라스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입만 쩍 벌리고 있다고 겨우 그렇게 한 마디 감탄사를 내뱉은 것이 고작이었다. 꿈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뺨을 꼬집어 봤을 정도다.
“허세와 망상님을 위해 새로 지은 별궁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다면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하… 하하… 궁전. 궁전이라니…”
호화 맨션에서의 생활만으로도 꿈결을 노니는 것 같았던 여고생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는 장소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허세와 망상도 조금쯤은 기분이 흡족해지는 느낌이다.
“크흠… 신경 써줘서 고맙다.”
“별 말씀을. 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거처를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해주니 기쁘군.”
공주님이 된 기분에 들떠서 어쩔 줄 모르던 아유무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형진은 다시 말을 꺼냈다.
“다만, 이 계약을 성사하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바로 아유무양이 보유하고 있는 파편의 회수입니다. 이것은 차후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회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아, 물론 아유무양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파편이라…”
허세와 망상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에 대해서 말이지만, 사실 내가 지금 이런 꼴로 이 아이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신격에 손상을 입은 것 때문이십니까.”
“맞아. 그래서 지금 이 아이에게서 파편이 회수되면 나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흠…”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신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차선책을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어떻게?”
“아유무양이 보유하고 있는 파편을 신께서 흡수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손실된 신격이 보충되어 안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나야 그러면 좋지만, 그렇게 되면 그쪽이 손해일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제가 신께 한 일도 있으니 그 정도는 양보해야죠. 본래대로라면 신께 얻은 파편을 돌려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완전히 흡수되어 버려서 그것이 어려운 상태인지라.”
“그런가.”
허세와 망상은 입맛을 다셨다. 형진의 말대로 자신의 신격을 되찾는 것이 가장 좋지만, 파괴와 재생의 파편 또한 충분히 강력한 신격이니 그것으로 보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파괴와 재생이 지닌 강력한 권능의 일부가 자신에게서 발현될 수도 있으니 확실히 훌륭한 차선책이다.
“알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진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아유무에게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가 그녀의 몸으로부터 파편을 뽑아냈다.
“커흑!”
아유무는 갑작스러운 형진의 행동에 작은 비명을 터뜨리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형진은 그렇게 뽑아낸 파편을 허세와 망상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다.”
계약서를 허세와 망상에게 내밀었다. 허세와 망상은 파편을 받아들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그것을 받아들였다.
“후우우…”
작은 탄성과 함께 파편을 받아들이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다시 허세와 망상에게 말했다.
“그럼, 서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허세와 망상은 처음과는 달리 자신을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이 흡족했는지, 이름처럼 조금 허세까지 부려가며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마침내 그렇게 서명이 완료되고 계약이 발효되자 형진은 공손하게 허세와 망상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계약 감사합니다. 협조해 주신 보답으로 허세와 망상께서 쓰실 아바타를 선물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단치 않은 성의이니 괘념치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다. 잘 쓰도록 하지.”
아바타 하나 살 공헌도가 없어서 꼬맹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허세와 망상으로서는 반색할 만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시급으로 받는 공헌도를 모아서 구할 수는 있지만, 가뜩이나 쪼들리는 처지에서는 그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용이다.
형진은 아바타를 건네주고 난 뒤, 허세와 망상의 거처로부터 빠져 나왔다.
일단 입구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나자, 요안나가 불쌍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좀 심했던 것 아닐까요.”
“뭐가?”
“모른 척 말아요. 그거… 사실상의 종신 계약서였잖아요.”
“흠… 그랬나?”
형진은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요안나의 말대로다. 물론 대놓고 종신토록 일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퇴직 절차의 항목에 사직하고자 할 경우 갑에게 이것을 미리 통보해야만 하며, 갑의 승인이 있기 전까지 성실히 근무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을 뿐이다. 얼핏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 승인 없이 위법한 퇴직이 이루어질 경우의 항목이 포함되면 얘기가 제법 심각해진다.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퇴직 절차가 진행되지 않는데다, 그 상태에서 임의로 일을 그만 두면 추가된 항목에 따라 지급된 모든 형태의 신앙과 공헌도가 몰수되며 다시 그 두 배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여된다. 이런 식으로 과징금이 부여되면 허세와 망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근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형진은 계약서를 설명하면서 이 항목에 대해 통보도 없이 무단으로 그만 두거나 할 경우만 아니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허세와 망상도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있는지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으나, 사실은 이처럼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었다. 형진쯤 되는 사람이 공짜로 아바타까지 주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백만 이상의 공헌도를 빚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허세와 망상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형진은 뻔뻔한 표정으로 요안나의 어깨를 안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크흠. 허세와 망상 정도로 무책임한 신에게 그 정도 안전장치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렇긴 하지만요.”
분명 자업자득인건 틀림없는 사실. 요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형진에게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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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