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78
00578 131. 각성 =========================
“젠장!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만!”
앞서 지휘관의 근원에 강제로 힘을 주입했을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데카스에게도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심문을 했던 것인데, 예상 외의 일이 일어나 버렸다. 아마도 일반적인 부하들과는 달리 기밀을 접할 기회가 많은 상급 지휘관급에는 일종의 금제가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데카스는 순식간에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린지 오래. 하지만 스하의 팔에 옮겨 붙은 검은 불꽃은 오히려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추종자가 스스로의 몸을 태워 강림을 시도하던 미친놈의 속성이 어디 가지는 않았던 걸까. 딱 봐도 이건 자신의 추종자를 일종의 부비트랩 같은 것으로 만든 것임을 형진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하아아.
스하아아아!
스하는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무언가를 뿌리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검은 불꽃은 더욱 맹렬하게 불길을 키워가고 있었다.
형진은 눈을 부릅뜨고 스하의 팔을 기어오르듯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노려 보았다. 이것이 파괴와 재생의 권능으로부터 발현된 불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상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일반적 불도 한 점을 잘 노려 찌르면 끄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인화점이 한정되어 있는, 이를 테면 촛불 같은 것에 한정되지만. 파괴와 재생의 권능으로 발현된 불은 일반적인 불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형진은 판단하고 있었다.
라이언하트를 극성으로 불러일으키자 회오리가 피어올라 형진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눈에 힘을 주자 마침내 스하의 팔에 엉겨 붙은 불꽃의 실체가 그에게 인지되었다.
형진은 검은 불꽃 속에서 웃고 있는 파괴와 재생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놈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꺼 볼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나의 파편으로부터 비롯된 네 녀석이 이것을 끄고 네 동료를 구할 수 있겠는가… 라고.
동료라.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영혼포식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 채 그것을 찔렀다.
스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형진이 자신이 공격하려는 것을 알았는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온 무언가가 검은 불꽃을 찌르는 것을 알아보았다.
팍!
마치 물풍선이 허공에서 터져 버리는 듯한 느낌으로 검은 불꽃이 확 하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형진은 혹시라도 불씨가 남아 다시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을까 하고 계속 노려보았으나, 다행히도 스하의 몸을 태우던 검은 불꽃이 자신의 일격에 단숨에 파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우우…”
갑작스런 사태가 벌어져서 얼마나 식겁했던지. 만일 스하가 아닌 자신이 데카스를 잡고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일이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바타 상태이므로 목숨을 잃는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았겠지만, 파괴와 재생의 권능에 의해 아바타를 잃게 되면 이전에 허세와 망상이 그랬던 것처럼 융합되어 합쳐진 신격의 일부가 부서지는 상황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시온으로 가서 치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도, 그것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만약 자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파괴와 재생이 그 파편을 손에 넣기라도 하면 그 자체로 놈의 힘을 더 키워주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자신은 잃고 상대는 그만큼 얻으니 실질적인 피해는 배가 되는 셈이랄까.
갑작스런 사태는 일단 진정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모두 마무리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중간에 불을 끄기는 하였으되, 신의 권능으로 인해 촉발된 불이 몸 일부를 태웠다. 온통 시커먼 형상이라 어느 정도의 부상을 입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불이 붙었던 팔 일부에서 희미한 연기가 새어 나오는 모습이라든가, 필사적으로 억눌러 참듯 파들파들 떨고 있는 스하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인간의 경우에도 가장 끔찍한 고통은 불에 타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하물며 타락한 신의 원념이 섞인 저주의 불꽃이 원인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신을 도우려다 이런 꼴이 되었으니 어떻게든 치료를 해주고 싶은데, 막상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인벤토리에 포션이 가득하게 담겨져 있으면 뭐하나. 그것은 저쪽 세계의 일반적인 생명체에게는 만병통치약이나 마찬가지의 성능을 지닌 기적의 약일지는 몰라도, 이쪽 세계에서는 독이나 다름없다. 방금 전 데카스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그런 식으로 강하게 생명력이 농축된 무언가가 스하에게 도움이 될 지는 역시 미지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하아아아…
견디기 어려웠는지, 불에 탔던 팔을 감싸 쥔 채 스하는 결국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형진은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위계는 얻었으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격은 얻지 못한 상태. 자격이 있다 한들, 그것은 본래 다른 신의 파편으로 비롯된 것이기에, 그가 비록 다른 신들의 동의를 얻어 반신의 경지에 올랐어도 제대로 된 신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상황.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손 쳐도, 지금처럼 막상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하아…
잠시 주저앉아 있던 스하는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괜찮다는 듯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녀석의 모습을 보던 형진은 마침내 입술을 깨물더니 스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로 인해 입은 부상이니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너의 상처를 낫게 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미안하다.”
스하아아…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임을 형진은 이해할 수 있었다.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신의 위계에 올라선 자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우글거리던 놈들의 주인과 싸우고 있지. 이번 일로 인해, 이곳에 나의 행적이 남았음을 저들이 알게 되었으니,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규모로 적들이 몰려올지도 모르겠다. 이것 또한 미안하다.”
더 많은 적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스하도 이번만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 막사들에는 너와 같은 동족들이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저들은 너희들을 그런 식으로 사로 잡아 나와의 싸움에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려 했을 터. 만약 전장에서 그런 너희들과 마주쳤다면, 나는 방금 전에 이곳에 있던 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차 없이 소멸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인연일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는 너희들과 만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런 자신의 생각은 물러터진 것인지도 몰랐다. 공연히 복잡하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 이쪽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그저 적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쪽이 훨씬 간단한 해결책일지도 몰랐다. 그냥 적으로 나선 존재는 모조리 쓸어버리는 편이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제단에 나타났던 그림자 종족을 아무 생각 없이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해버리면 머리 아플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형진은 저들이 마을을 이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모습마저 보았다. 타락하여 죽음으로부터 불러 일으켜진 채 살아있는 자를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그런 언데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대칭점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평범한 부족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파괴와 재생이라는 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대로 놔뒀다면 서로에게 해를 끼칠 이유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존재임을 이미 알아 버렸다.
공포와 죽음께서도 계율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심심하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지 말라고. 비록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이끌어 주던 여신과 소통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그와 대화가 가능했다면 공포와 죽음은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함부로 죽여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고.
나의 공포는 오직 죄 지은 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그녀는 분명 그리 말했을 것이다.
“나의 존재가 너희들에게 재앙이 될지, 아니면 구원이 될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너에게 그럴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나누어 주고 싶다. 받아들이겠는가.”
스하는 잠시 대답 없이 형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나고 자란 곳이 다르고 종족 또한 다르지만 이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종족에게 얼마나 커다란 갈림길이 될지 이해한 것이리라.
“받아들이겠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아니라면 고개를 저어라.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너희들을 부정하지 않겠다.”
형진이 그렇게 한 마디 말을 더 건네고 나서야, 비로소 스하는 반응을 보였다.
스하아아…
물론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한데 뭉쳐 있던 낙엽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쓸려가며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녀석의 고개는 분명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팔에 입은 화상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스하는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 형진은 그런 스하의 반응에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너희들은 워낙 특이한 경우라서.”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다친 팔을 이리 내봐.”
스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친 팔을 그에게 내밀었다. 형진은 그 팔 위에 닿을락 말락하게 손을 내민 상태로 말했다.
“스하. 이 세계에 살고 있던 그림자를 닮은 종족이여. 나를 너의 신으로서 섬기고 따르겠는가.”
그러자 스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형진을 뜻하는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형진은 갑자기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째깍거리던 초침의 소리가 느려지다가 천천히 멈춰서는 것처럼, 작은 둔덕 하나를 마저 넘지 못하고 멈춰서는 수레의 바퀴처럼 그렇게 세상이 소리없이 멈춰서 버린다.
그 속에서 형진은 어떤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무한정 넓게 펼쳐진 검은 공간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새카만 암흑의 공간 속에서 형진은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무엇일까. 혹시 자신도 모르게 망상구현이라도 시작한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형진은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환상 따위가 아니다. 허세와 망상이 만들어낸 그런 환상과는 무관한, 자신의 의지가 만들어낸 모습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표상. 상상. 상징. 형상. 초상. 화상. 양태. 형체. 모습. 양상. 자취. 모양. 인상. 심상.
심상.
그래. 심상이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것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 심상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주위를 에워싼 암흑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천천히 어디선가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매우 작아서 처음에는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형진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안에 어느 새인가 수많은 빛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 하나는 그저 작은 빛에 불과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내 거대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며 형진이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 빛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형진은 그것이 반딧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그것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나자, 이내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심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밤하늘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상에서 맑게 개인 하늘 위를 올려다 본 적이 있는가. 먼지 하나, 구름 한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맑게 개인 밤하늘 위에서 흐르고 있는 별의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태양처럼 세상 모두를 비추고 있지는 않아도,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별들의 향연.
태양이 밝게 비출 때는 모습을 숨기고 있으나, 언제나 하늘 저편에 소리 없이 자리잡고 있는 무수한 별들의 바다.
하지만 알고 보면 태양 또한 그 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형진이 보고 있는 것은 결국 우주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그 우주 전체가 이 어둠 속에 모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곧 처음을 의미하며, 또한 끝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휴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누군가에게는 꿈 속을 헤매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
그 모든 것을 보는 순간 형진은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자신이 지니게 될 무언가를 상징하는 심상이라는 것을 그는 마음을 통해 이해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영혼 속에 하나의 단어가 새겨졌다.
그 단어는, 바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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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