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52
00652 147. 생존자 =========================
둘이 방을 나가자, 릴은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새 연습을 끝내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역시나 처음 느낀 그대로였다.
살갗이 검은 아이, 불그스름한 아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아이, 살짝 창백한 느낌이지만 역시나 건강한 혈색이 돌고 있는 아이. 어둡긴 하지만 완전한 검은 빛은 아니고 짙은 갈색 빛이 나는 아이. 단순히 피부색만 놓고 봐도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아이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다.
앞서 밤의 신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이에게는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 갔지만, 움리드들의 순혈주의는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병적인 면이 있었다.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움리드는 다른 대부분의 종족이 그러하듯 기나긴 투쟁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 기나긴 투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우뚝 선 시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우수성에 매료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이들에게 찾아온 종말의 서곡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승리한 움리드들이 다른 모든 종족보다 우월하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내부에서는 이내 폐쇄적인 순혈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했고, 다른 외모를 가진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종족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런 극단적인 순혈 주의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신보다도 스스로가 더 뛰어난 종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행성계의 다른 모든 천체들을 부숴서 링월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소모적인 일이었다. 만약 움리드들이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좀 더 나중, 이를테면 다른 항성계로 진출한 뒤에 했다면 그들의 역사는 좀 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몇몇 진취적인 자들에 의해 외우주 탐사가 실현되었으나, 이미 시작되어 버린 링월드 구축에 너무나 많은 자원이 소모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원할 여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건조하는 일은 다른 수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움리드를 제외한 다른 피지배 종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극심하던 자원과 인력의 소모를 가속시키고 말았다. 형진이 감탄하고 허세와 망상을 좌절케 만들었던 링월드는 그렇게 수많은 피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던 것이다.
피지배 종족과의 격렬한 투쟁은 그렇지 않아도 팽배하고 있던 순혈주의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낮아진 출산율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공 자궁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보다 강력한 움리드를 더욱 빠르고 많이 태어나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선사했지만, 막상 실용화되는 순간 도출된 결과는 처음 개발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극단으로 치달은 순혈주의가,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조성해 자손을 탄생시킬 수 있는 인공 자궁을 만난 순간 벌어질 일 같은 건 차라리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아이들은 한결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움리드의 모습을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 똑같은 모습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릴이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그녀의 탄생에 모든 움리드들은 크게 기뻐했다. 아무리 유전자를 조성하여 아이를 인공적으로 탄생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그녀처럼 완벽하게 모든 것이 새하얀 모습으로 탄생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움리드들은 그녀를 기적의 존재라 칭하기 시작했고, 이내 성녀로 받들기 시작했다.
이상적인 존재마저 드러난 마당이다보니 움리드들의 순혈주의는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아래 그녀의 체조직으로부터 유전자를 얻어 스스로의 유전자 조성을 변형시킨다거나, 그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아이를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들의 세상에는 성녀라는 이름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이 스스로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렇지 않아도 순혈 주의로 인해 사라져 가던 움리드들의 유전적 다양성은, 성녀 열풍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모든 움리드들은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서로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그들에게서 탄생할 수 있는 아이들 역시 같은 모습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보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움리드들로서는 이상이 실현된 것 뿐이니까.
문제는 그런 그들 아래서 웅크리고 있던 피지배 종족들이었다.
링월드의 구축으로 인해 피지배 종족들은 많은 희생을 강요받았고, 이것에 저항하던 자들은 대부분 무자비한 탄압 아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완성되어 가는 링월드는 그들에게 있어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와도 같은 상징이었기에, 처음 그들의 목표는 링월드의 완성을 막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목표는 이 모든 사태를 야기한 움리드 그 자체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피지배 종족들에게 릴의 유전자 샘플이 전해졌다. 그들은 그것을 확보하는 순간, 지금의 사태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움리드들을 목표로 한 생물 병기가 만들어졌다. 그들이 만들어낸 바이러스는, 오직 릴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 움리드들에게만 치명적인 독성을 발휘하도록 제조된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움리드 전용의 멸절 병기가 완성된 것이다.
마침내 링월드가 완성되었다. 이 거대하고 놀라운 구조물의 완성은 그렇지 않아도 인종적 우월주의를 넘어 강력한 순혈주의로 귀결되어 있던 움리드들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선사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업적을 축하하기 위한 대규모 기념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그 행사에서 바로 이 바이러스가 살포되었다.
바이러스는 사흘 정도의 잠복기를 가지고 느긋하게 움리드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흥청망청 웃고 즐기는 기념 축제의 도중에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발병이 일어났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 이 처참한 테러를 계획했던 자들은 단 하나의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을 넘어 백여 가지의 돌연변이들을 함께 살포했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들은 잠복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왕성하게 스스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이 생물 병기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유전적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상실한 종족에게 있어, 유전적 다양성으로 강화된 생물 병기의 위력은 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흥겨웠던 축제에는 순식간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휩쓸고 지나갔다. 자신들을 휩쓸고 있는 이 죽음이 생물 병기임을 알아채고 뒤늦게나마 방역을 시작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움리드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어 잠복기에 들어선 상태였다. 샘플을 채취해 백신이나 항생제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도 급격히 돌연변이의 수가 증가하는 바이러스의 위력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움리드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휩쓸리는 것을 보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피지배 종족들이 일시에 궐기했다. 하지만 움리드들은 그렇게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이런 지경으로 몰고간 자들에 대한 응징을 잊지 않았다.
곧바로 무인 병기들이 궐기하던 피지배 민족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링월드는 그 자체로 거대한 폐쇄 공간. 그 시스템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궐기는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종족들이 분전하여 거점 몇 군데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움리드들은 그들에게 몇몇 구역의 통제권을 상실했음을 깨닫자, 가차 없이 대량 파괴 병기를 사용했다. 이미 한 번 링월드를 만들었던 그들이기에, 어느 정도는 파괴되더라도 다시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물 병기로 인해 중요한 인력의 대부분이 중태에 빠지거나 사망한 상태에서 무분별한 대량 파괴 병기의 사용은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링월드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링월드는 뒤틀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손 쓸 틈도 없이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 버렸다. 싸우고 있던 와중에 격벽이 무너지며 그대로 한 구역의 생명이 모조리 죽어버리는 식으로 통제 불가능한 파괴가 수없이 벌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움리드들을 이끄는 최상층부의 지도자들은 그들 가운데 중요한 이들을 선별해 가장 안전하게 구축된 구역의 쉘터 안에 대피시켰다. 그 중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움리드 아이들을 비롯해, 중태에 빠져 위독한 상태지만 링월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등의 일에 절대로 필요한 인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이 인원들만 무사하면 다시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을 동면이라는 형태로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형진이 릴을 발견한 곳이 바로 그렇게 구축된 쉘터였다.
인원의 대피를 마친 움리드 지도부들은 감히 이 거대한 파괴와 살육을 야기한 버러지 같은 피지배 종족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거대한 학살이 뒤틀리고 부서진 링월드 안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일으킨 이 거대한 학살이 또다른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죽음들로 인해 응집된 사기로부터 다른 세계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접촉하는 모든 자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런 존재였다.
이름하여 망자의 군세.
이전에 형진이 유아와 미엘을 대동한 채 망자의 대지를 방문했을 때 출현했다가 유아가 발현한 성광으로 인해 순식간에 소멸해 버린 그 존재가 링월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남아있던 피지배 종족들을 쓸어버리고 승전을 자축하던 움리드들은 부서지고 망가진 링월드 안에서 자신들을 은밀하게 덮쳐오는 이 강력한 언데드의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뒤에 일어난 시체들의 모습에 크게 놀라며 그것에 대한 대비를 서둘렀을 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움리드들이 마침내 망자의 군세라 불리는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그나마 남아 있던 움리드의 반수 이상이 희생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움리드들은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망자의 군세를 비롯해, 놈이 거느린 망령들은 아무리 강력한 격벽으로 가로 막아도 소용이 없었고, 그 와중에도 피지배종족들이 살포한 생물 병기는 꾸준하게 그들의 숫자를 줄여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마침내 한 가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쉘터 안에서 보호되고 있는 인원만이라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식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무인 병기를 모두 집결시켜 쉘터의 경비에 돌리고, 그 주위의 광대한 영역을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로 비워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은밀한 학살자로부터 쉘터의 인원들을 보호하고,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놈과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이 계획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망자의 군세를 불러들여 그것을 소멸시킨 것만 두고 봤을 때는. 비록 그 과정에서 남아있던 움리드들이 공멸의 길로 들어서 버렸지만, 링월드가 남아있고 쉘터 안에 다음 세대를 짊어질 움리드들이 살아 남아 있으니 그들은 이 싸움이 자신들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망자의 군세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것이 나타난 원인은 제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링월드 안에서 살고 있던 수백억의 인구가 단숨에 죽어나가면서 생겨난 막대한 양의 사기는 끊임없이 그곳에 끊임없이 언데드들을 불러들였다. 그 언데드들은 그나마 남아 있던 생존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앰과 동시에, 자체적인 복구를 준비하던 링월드의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시스템에는 쉘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장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쉘터를 유지하는 시스템은 에너지의 수급에 문제가 생기자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인원 가운데 중요도가 떨어지는 이들에 대한 에너지 공급부터 차례로 줄여 나갔다. 그 결과 동면이 시작된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들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왜 죽는 줄도 모르고 생명이 끊겨 버렸다. 하지만 남은 이들의 운명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결국 얼마 뒤에 쉘터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설정된 릴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쉘터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으며, 동면으로 인해 희미해진 생명력 덕분에 다른 언데드의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수많은 세월을 그렇게 지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링월드를 감싸고 있던 사기들이 하나로 모여 마침내 티폰을 불러들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을 때, 그것을 타고 넘어온 형진을 통해 비로소 구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릴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종족이 그러한 결말을 맞이한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을 성녀라고 부르며 신봉하게 만들었던 순혈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절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오붓해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짜고짜 아이 낳는 법을 물어보았던 것도 그런 생각들이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구출한 자들이 자신의 종족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식의 말로 형상화된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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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