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51
00651 147. 생존자 =========================
릴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처음에는 뭔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대가 농담이나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이다. 신이란 일반적인 생물을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 그런 신과 둘이나 함께 마주 하고 있다고? 그런 신들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라고?
혹시 이 사람들은 신이라는 이름의 종족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떠올렸지만, 남자는 자신을 밤의 신이라고 지칭했고, 여자는 보호와 균형의 여신이라고 했다. 이것은 종족으로서의 신을 소개하는 말이 아니다. 각기 그러한 영역을 담당하는 신이라는 의미이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다고 보기엔 너무나 확고한 그런 의미 전달이다.
“저… 혹시 제가 죽은 건가요?”
“네?”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이 형진이 반문하자, 릴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혹시 제가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싶어서요.”
움리드라는 종족에게도 천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것인가. 형진은 꽤 흥미롭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은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그렇… 군요.”
형진의 말에 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다.
하기야 갑자기 신밍아웃 같은 걸 한다고 아 그렇구나 하면서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 여성의 경우엔 종족이 멸망하는 와중에 홀로 동면 상태가 되어 살아남았다가 깨어난 직후에 이런 얘기를 들어버렸다. 이런 얘기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면, 형진은 정말로 이 여성의 정신 상태나 두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으리라.
그런 릴의 모습을 보며 형진은 좀 더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조금 특별한 장소입니다. 신이 인간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현실과 가상의 중간쯤에 있는 그런 공간이죠. 본래 신이 사는 세상은 엘리시온이라는 이름의 장소이고, 그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능력에 제한이 생깁니다. 신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닌 거죠.”
“그, 그렇군요.”
“당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은 아시다시피 처음부터 외부 환경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을 경우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병원체라든가, 기타 우리들로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하지만 당신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환경 같은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죠.”
형진이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지만 릴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눈앞의 인물들이 신이 맞는지도 의문이고, 맞다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해야 하나. 가뜩이나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데 이런 저런 얘길 해봐야 겉돌기만 할 뿐 제대로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제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시군요.”
그거을 알아챈 형진으 말에 릴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 합니다.”
이래서는 얘기가 계속 헛돌기만 할 뿐이라, 형진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혹시 그런 것 없으십니까? 신이 있다면 이런 것을 한번 부탁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던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네? 그게…”
“움리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가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불가능했던,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일이 있다면 말해 보십시오. 문명의 높고 낮음을 무시하고 그런 일이 실현될 수 있다면, 저희가 신이란 것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생기겠죠.”
“…”
릴은 형진의 제안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이해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품고 있었던 소망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한 가지…”
“말씀해 보십시오.”
“제 몸을 바꾸고 싶습니다. 이런 몸이 아니라… 이곳의 다른 평범한 분들이 지닌 그런 몸을 가지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형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일이죠.”
“가능… 하다고요?”
“네. 간단하게 시범을 보여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형진은 그렇게 릴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혼자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보호와 균형에게 말했다.
“여신님. 죄송하지만 잠시 작은 모습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네? 지, 지금요?”
“잠깐이면 됩니다. 이분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아, 예… 진님이 원하신다면.”
보호와 균형은 형진이 손을 놓아주자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모를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요정 사이즈의 몸으로 돌아갔다.
“…”
릴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혹시 뭔가 잘못 본 것이거나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으나, 분명히 방금 전까지 자신의 눈앞에서 부끄러움 가득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여성이 손바닥만한 작은 사이즈로 한순가에 변해 버렸다.
“됐습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셔도 됩니다.”
“네.”
보호와 균형은 다시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앞서의 인간 사이즈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릴은 한 번 더 눈을 비벼야만 했다.
“본래 이런 식으로 현세에 드러낼 신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오직 신에게만 허락된 기본적인 권능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다소의 편법을 사용한다면 평범한 인간도 비슷한 일이 가능해집니다. 당신은 이러한 일을 정말로 원하십니까?”
릴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합니다. 정말로 원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소망.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유사 신격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유저들에게 제공되는 아바타와 같은 것을 릴에게 제공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신들이 아바타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아바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신들과는 달리, 인간은 한 번에 하나의 몸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릴에게 아바타가 주어진다 한들, 본체나 아바타 가운데 하나는 휴면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과 신이 지닌 본질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그녀가 신격의 파편 같은 것을 얻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형진의 말을 듣고 있던 릴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존귀하신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제 어리석음을 꾸짖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사실 저희가 신이라는 사실은 인간들에게도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일입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저희들의 신분을 밝힌 건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니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감사… 합니다.”
형진은 일단 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앉히고는 다시 차분하게 대하를 이어갔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어디에서 구출했는지,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계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비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들 외에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다른 종족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해 본 일이 없거든요. 앞서 말한 새로운 몸의 경우는 당신이 이들과 위화감 없이 살아가는데도 꼭 필요한 일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 얘긴 그 정도로 해두도록 하지요.”
형진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말리고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당신이나 당신의 종족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세계를 돌아보며 서로 다른 여러 종족들을 만나왔습니다만, 당신들 정도로 앞선 문명을 지닌 종족은 만나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터라.”
물론 이건 형진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동차 등을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로서도 그것이 어떻게 동작하고, 어떤 원리로 움직이며, 어떤 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그것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맡은 공정 이외의 것은 대부분 모르는 쪽이다. 하물며 그보다 몇 단계는 앞선 문명이라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릴과의 대화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움리드라는 종족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현재의 지구인들에게는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만한 지식일 수도 있었다.
뉴턴의 물리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식들은 현대인들에게는 상식에 가까운 것이지만, 과거의 인류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대단한 지식들이다. 이런 식의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아주 작은 편린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형진으로서는 아바타 한두 개 정도는 그냥 지불하고도 남을만한 아주 커다란 이득이 된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 종일이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한 시간 정도 가볍게 이야기를 하고 나자 릴은 눈에 띌 정도로 피로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잠시만요. 보호와 균형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형진의 말이 떨어지자 보호와 균형은 가만히 릴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얹고는 균형의 권능을 사용했다.
“아…”
상쾌한 어떤 감각이 이마로부터 전신에 전해지자, 릴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여신의 권능 가운데 하나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귀엽게 웃는 여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주 미소를 지어 버린다. 미처 몰랐는데,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운 분이다. 스스로를 밤의 신이라고 소개한 남성도 그렇고, 이 여신도 그렇고, 이곳의 신들은 모두 이렇게 좋은 분들인 걸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분에게 무리를 시킨 것 같아 죄송하군요. 다른 얘기는 차근차근 시간이 날 때마다 이어가면 될 것 같으니 우선은 푹 쉬십시오.”
“네.”
“요정들을 몇 명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그들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한번 딱 튕기자, 허공으로부터 메이드복을 입은 귀여운 요정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롬, 룸. 너희들은 당분간 이 손님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주변을 살펴 드리도록 해라.”
-네. 맡겨주세요.
릴은 눈앞에 나타난 작고 귀여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 넘치는 요정들의 모습에 다시 놀란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그들과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앞서 여신이 작은 모습으로 변한 것을 봤기 때문인지, 요정들을 대하는 릴의 태도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내일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릴은 둘이 방을 벗어나자 그제서야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뭔가 엄청난 세상에 도달했음을 실감했다.
방을 빠져 나오자 보호와 균형은 문득 형진에게 말했다.
“다행이에요.”
“그런가요?”
“네. 생각보다 그리 충격이 크지 않은 것 같아서요.”
“하하…”
자신들의 종족이 사멸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충격보다도, 깨어나서 처음 만난 대상이 신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놀라버리지 않았을까. 더욱이 그녀는 이전에 신적인 존재로 칭송받는 존재였으니, 진짜 신과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다른 보통의 사람보다도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보호와 균형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손. 다시 잡을까요?”
“…”
보호와 균형은 형진의 말에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잠시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그러고 보면 둘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낸 일이 없는 것 같군요. 오늘은 여유가 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은근한 말에, 보호와 균형은 감히 시선을 마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이 원한다면…”
============================ 작품 후기 ============================
두편째.
버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