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50
00650 147. 생존자 =========================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른 대답한 것과는 달리 보호와 균형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형진이 내민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게다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미는 걸 형진이 얼른 잡아 버리자 화들짝 놀라기까지.
깜짝 놀라서 오들오들 떠는 손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살짝 겁먹은 모습을 보면 괜히 괴롭히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다.
“갈까요.”
“네, 넷!”
손을 잡고 거짓된 천국으로 들어선다. 곧바로 길드성 건물 안쪽으로 진입하자,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스킬을 수련중인 왕족 나부랭이들의 힘찬 기합 소리가 전해져 온다.
뭘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호와 균형은 그 소리를 듣자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모습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어쩐지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형진은 억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오들오들 떠는 느낌이 전해져 오는 보호와 균형의 손을 꼭 잡은 채 계단을 오른다. 겨우 그것 뿐인데도 얼마나 긴장을 하는지 보는 이가 더 조마조마할 정도다.
마침내 계단을 올라 여성이 있는 방의 문이 보이는 위치에 서자, 문득 보호와 균형이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는 것이 느껴진다.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실망스러움을 뜻하는 의사 표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형진은 문가에 서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뭔가 후다닥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레이디를 당황하게 하는 건 신사의 당연한 권리겠지만, 역시나 슬쩍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시 기다렸다가 안쪽의 소음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물론 여전히 한손으로는 보호와 균형의 손을 잡은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의 여성 하나가 새침한 표정으로 침대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표정은 그렇게 새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상기된 볼이 그녀의 심정을 은연중에 대변하고 있었다.
“일어나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
형진의 말에 여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쩐지 처음 들어보는 억양인데, 자연스럽게 의미가 전달되니 놀라버린 것이다. 물론 단순히 억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지금 이곳이 본래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확하게 의사가 전달되어 오니 화들짝 놀라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까 창가에서 바깥을 내려다 볼 때도 어렴풋이 아래쪽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그렇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하지만 여성은 놀란 속내와는 별개로, 최대한 의연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바, 반갑… 습니다.”
물론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고 한들, 몸이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느낌으로 살짝 떨리고 더듬거리며 흘러나와 버렸다.
그런 자신의 대답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당황해 버렸지만, 형진은 별다른 기색 없이 의자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녀와 마주 보는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보호와 균형을 먼저 앉힌 다음에야 자신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서 직접 세공한 고급스럽고 고풍스런 양식의 의자가 툭 튀어 나와 바닥에 놓이자 하얀 색의 여성은 다시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상당한 문명을 구가하던 종족이 남긴 최후의 생존자였지만, 이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걸 직접 목격하는 일에는 그리 익숙하지 못했다.
“우선 자기 소개부터 할까요. 전 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보호와 균형님.”
진은 이 상황에서도 보호와 균형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여신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앞에서 손을 꼭 잡고 있다니, 그야말로 자신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연인이라니. 연인이라니!
그 감미로운 단어를 되새기다가 그만 머리 속에서 뭔가 펑 하고 터져버리는 느낌에 이미 보호와 균형은 반쯤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여성이 보기에 그런 보호와 균형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했다. 이름도 이상하고, 들어와서부터 저렇게 손을 꼭 잡고 있는 행동이라든가, 자신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하는 모습 같은 것도 이상하다.
혹시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남자가 일부러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형진은 형진대로 그런 여성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보통 그녀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보일 만한 반응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종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이 살아가던 곳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런 식의 의문이나 그런 의문의 증폭을 통한 공황이나 두려움 같은 것을 지금 눈앞의 여성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울며 불며 난리 치는 것을 달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역시나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여성은 보호와 균형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다가 형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릴이라고 합니다.”
“릴. 좋은 이름이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형진은 낚싯대에서 줄 감는 용도의 도구를 떠올렸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먼저 간단하게나마 당신이 어떤 분인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질문 그 자체대로의 의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기억이나 의식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 이를테면 혼란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필요한 부분이었다.
“저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성녀?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녀… 입니까?”
“뜻이 통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떠올리시는 그 의미가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성녀라. 형진은 어쩐지 자신이 성녀와 인연이 많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유아는 말할 것도 없고, 별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요안나 역시 공포와 죽음의 성녀가 아닌가. 하기야 그녀들의 신까지 취한 마당에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성녀라면 신을 모시는 분이셨겠군요. 어떤 신을 모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엘리시온의 신이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릴은 고개를 저었다.
“신… 은 모시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저 스스로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신은 모시지 않는데 성녀라는 얘긴가. 게다가 그녀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었다니. 현인신 같은 종류의 얘기는 지구에서도 심심치 않게 그 예를 찾을 수 있지만, 링월드를 만들어 낼 정도의 문명을 일궈낸 종족들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견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당신의 어떤 부분이 그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의 말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에 순순히 대답한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아니,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마저 던지고 있었다.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여자야 아까부터 자신과의 대화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고.
“저희들… 그러니까 저희들은 스스로를 움리드라고 불렀습니다. 움리드들은 극단적인 순혈주의자들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들의 혈통을 고귀하게 여기고 가장 순수한 혈통을 찾아 신격화하는 식이었죠. 제가 성녀로 일컬어지며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런 제 외모가 그들이 원하는 가장 순수한 혈통의 발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릴의 외모는 처음 봤을 때 느꼈듯이 온통 하얀색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눈동자나 손톱, 그리고 입술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모든 부분이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 살짝 혈색이 돌 때 홍조가 잠시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색깔을 느낄 수도 없는, 어떻게 보면 자연적인 외모라고 보기조차 어려운 그런 모습이다.
형진은 그런 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피며, 그녀의 외모에 뭔가 인공적인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유전자 같은 것을 조작하는 식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링월드 같은 것을 만들 정도의 종족이라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기분이랄까.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라고 스스로 밝히기는 했으되, 그런 직책에 별로 미련이 없는 듯한 태도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해 하는 듯한 그런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형진이 자신의 말을 딱히 이상하게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는 것에 감사하는 듯한 느낌 또한 전해진다.
“별로 성녀라는 위치를 좋아하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슬쩍 찌르듯 질문을 던지자, 릴은 바로 답했다.
“네. 말씀대로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상당히 소중하게 대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 역시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릴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옷이란 것을 입어본 적조차 없습니다.”
“네?”
“저는 가장 완벽한 존재이기에, 옷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릴 필요조차 없었던 거죠. 이곳에도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를테면 미술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감상당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존재이유는 다른 것이었습니다만.”
“어떤?”
“유전자의 보존입니다. 저는 가장 완벽한 존재이기에, 제 유전자는 저와 닮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제공되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강제적인 생식 활동 같은 것이 이루어지거나 한 건 아닙니다. 그저 제 몸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체조직 같은 것을 가져다가 복제하는 식이죠.”
“…”
순혈주의가 극으로 치닫다 보면 이런 일까지 생기는 것일까. 확실히, 태어나서 기억하는 매순간이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면 동족이나 문명 자체에 별 미련이 남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당장 형진 본인만 하더라도 그런 마네킹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다 때려 부수고 뛰쳐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니까.
“이번엔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릴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형진이 순순히 답하자, 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이곳에서는… 자손을 어떤 식으로 낳습니까?”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형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고,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보호와 균형마저도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당황스러운 질문이군요. 그런 질문을 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그것이… 움리드들은 자연적인 수태나 분만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움리드들은 인공자궁을 통해 태어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움리드에게 필요한 능력들이 유전자 레벨에서 조성됩니다.”
형진은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모든 움리드가 그렇게 태어난다면, 자연적인 수태나 분만 같은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기 어렵지 않은지.”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움리드의 최고 지배자였던 자가 자신과 저 사이에서 그런 식으로 자손을 보고자 준비를 했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
종종 그런 일이 있다. 권력에 미친 최고 지배자가 현인신으로 추앙받는 자와 합일하여 스스로 신의 지위를 얻으려는 경우가. 링월드까지 만들어낸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그런 식의 협잡으로부터는 별로 자유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인공자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자손의 탄생은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신이라 해도.”
“그렇군요.”
릴은 납득했다는 듯이 작게 대답하다가, 문득 뒤에 붙은 단서를 깨닫고는 의문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지금, 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형진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다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밤의 신이며, 여기 부끄러워하고 계시는 분은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의 여신이십니다. 당신이 머물고 있는 이곳은 저희들처럼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