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14
00714 161. 대면 =========================
아이라니.
그와 관계를 가지긴 했어도 자신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별다른 대책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그렇게 되어도 할 말은 없다. 게다가 이 남자라면 자신이 아이를 낳아도 잘 키워줄 거라는 생각까지 떠올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그 모든 일이 현실이 되어 버리자,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식의 일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 알았으면 일단 밥부터 먹어.”
“응…”
너무도 갑작스러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스푼을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 형진은 깨끗하게 비어버린 그녀의 접시를 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얼른 설거지를 마치고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까 같았으면 혼자서 할 수 있다면서 바둥거렸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치 포대기에 안긴 아이처럼 얌전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어버린 탓이다.
“몇 가지 조치를 취해놓긴 했지만, 아이를 가졌을 때는 처음의 몇 달이 가장 중요해. 그러니 항상 조심하도록 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아, 알았어.”
“좋아. 착하군.”
형진은 앞서의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은 채 푸근한 표정으로 그녀를 시트째로 안아 욕실로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시트를 벗기고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
무언가를 물에 타 놓았는지 약간 뿌연 느낌의 물이긴 했지만, 누군가의 눈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목욕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생소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능숙하게 이런 저런 준비를 마치고 그녀의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역시 아내가 많은 탓일까. 아니다. 아내가 아무리 많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쪽이라면 이렇게 능숙할 수가 없다. 이건 역시 많이 해본 탓이라고 해야겠지.
“다른 아내들한테는 가보지 않아도 돼?”
얘기를 꺼내놓고도 아차 싶었다. 스스로도 밝힌 내용이었지만, 그의 아내들 중에는 인간은 물론이고 여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포트니아 테론의 추종자였다는 것을 빼면 그저 평범한 사냥꾼에 불과한 여자. 외모는 물론이고 여성스러움에서도 도저히 다른 아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다. 하룻밤 불장난에 어이없게 아이가 덜컥 들어서버린 그런 상황이니 입장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아,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마.”
“어째서?”
“신에게는 여러 가지 편리한 능력이 있지.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어.”
씨익 웃는 형진의 모습에서 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놀라지마.”
갑자기 주위의 공간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른 몸을 가리며 바라보던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는 형진과 똑같은 모습의 형진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떻게.”
“아바타라는 거야. 또다른 나라고나 할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형진의 새로운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어느새 일곱이나 되는 형진의 아바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으으…”
저마다 다른 옷차림의 형진이 일곱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 느낌에 여자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하나도 감당 못하는 판에 일곱이라니. 만약 이 모든 형진이 한꺼번에 덤비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아찔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형진은 서둘러 다른 아바타를 돌려보냈다.
“미안. 장난이 좀 심했나 보네. 괜찮아?”
“괘, 괘, 괜찮아.”
다른 아내들에게 가보지 않아도 되느냐는 말에 걱정하지 말라고 답한 건 결국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아홉이나 되는 아내들 곁에는 또 다른 그가 항상 붙어 있거나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 시간에도 또다른 그가 다른 여자와 달라붙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밀어를 속삭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버렸지만, 최소한 혼자 남겨진 채 그가 지금 누구와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그런가.
지금 자신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는 이 친절한 남자도 결국은 또 하나의 그라는 얘긴가. 그를 온전히 자신만의 사람으로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일부나마 독점할 수 있으니 그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어때, 시원해?”
“응.”
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카락을 조물거리는 능숙한 그의 손놀림을 감상할 틈은 없었지만, 어쨌든 개운한 건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음은 손.”
“혼자 할 수 있는데.”
“나중에 가서 해달라고 투정부리지 말고, 해준다고 할 때 그냥 모른 척 맡겨둬.”
“응.”
어차피 거부한다고 말을 들을 남자도 아니다. 게다가 사실은 이렇게 시중을 들어주는 그의 모습이 조금 기쁜 것도 사실이고.
팔을 씻고 다리도 씻었다. 등까지는 어떻게 견뎠지만, 앞을 닦을 때는 부끄러워서 감히 얼굴을 마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됐다. 그럼 나도 씻어볼까.”
대충 그렇게 몸을 씻기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 한쪽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속옷을 훌렁 벗을 때는 얼른 눈을 돌렸던 그녀였지만, 뒤돌아 선채 샤워를 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은 자신도 모르게 훔쳐보고 말았다.
“조금 옆으로 가봐.”
“…”
샤워를 마치자 형진은 거침없이 그녀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를 등 뒤에서 가만히 안아 주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그냥,.. 뭐…”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형진의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감촉 때문에 다른 건 생각할 틈조차 없다. 혹시나 이대로 또 덮쳐지는 건 아닌가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의외로 그는 가만히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자 형진은 가운을 걸치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 낸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시트로 몸을 감싸 침대로 데려다 놓았다.
“이 정도면 올 때가 되었는데… 아, 왔군.”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메이드복을 입은 요정들이 열려진 공간으로 우르르 날아들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림. 말한대로 옷은 잘 만들어졌겠지?”
-물론이죠.
곧바로 요정들이 이런 저런 옷들을 걸어놓은 긴 옷걸이를 가지고 나타난다. 어쩐지 생소한 느낌의 형태를 지닌 옷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는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꽤 세련된 옷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보자. 일단 오늘은 이게 좋겠군.”
형진은 편안한 느낌의 속옷과 약간 헐렁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몇 가지 고른다음, 직접 그녀에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호, 혼자 할 수 있어.”
“어허. 해준다고 할 때 가만히 있어. 이것도 언제나 해주는 서비스가 아니라고.”
“…”
그녀는 난감해졌다. 아까 몸을 씻는 건 그렇다 쳐도 지금은 요정들까지 있지 않은가. 제랄딘처럼 귀족의 삶에 익숙한 여성이었다면 시중드는 사람들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겠지만 그녀는 그런 쪽도 아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인형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손이며 발을 내밀어 옷이 입혀지고 있는데, 문득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야?”
“이름?”
“응. 아르테미스라는 건 포트니아 테론이 붙여준 별명 같은 거잖아. 본래 이름을 알고 싶어.”
“…”
본래 이름. 그녀는 그 말을 듣자 씁쓸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런 건… 없어.”
“이름이 없다고?”
“있기야 하지만, 좋은 기억이 없는 이름이라… 사냥꾼 시절에는 그냥 틴이라고 불렸어.”
“틴?”
뭔가 여자 이름으로는 애매하다. 그럴 만도 하다. 틴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녀가 근거지로 삼던 지방에서 활을 부르는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냥 활잡이 정도로 불린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럼 나도 그렇게 부르면 되나?”
“그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새로 이름을 지어줘.”
“이름을?”
“응.”
토너먼트에서도 져버렸고, 아이까지 생겨버렸다. 원래는 포트니아 테론에게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해져 버렸다. 강제 개종을 당하는 바람에 추종자로서의 지위도 상실한 상태. 결국 앞으로는 계속해서 그의 포로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포트니아 테론에게 이름을 받았던 것처럼 새로 이름을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곤란한데. 난 이름을 짓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터라.”
“괜찮아.”
“음… 그럼 다이애나는 어떨까.”
“다이애나?”
“응. 내가 살던 세계에서 아르테미스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로서 숲의 여신을 가리키는 이름이야. 아, 물론 여자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기도 하고.”
“그래. 그럼… 앞으로는 다이애나로 불러줘.”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다이애나라는 이름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귀족적이고 우아한 느낌인데다 본래 여신의 이름이었다니 그와도 격이 맞는다. 더구나 아르테미스의 다른 이름이므로 포트니아 테론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계승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러모로 그녀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이름인 셈이다.
옷을 갈아입히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그녀를 다시 번쩍 안아들었다.
“자, 이제 우리 집으로 가야지.”
“우리 집?”
“그래. 우리 가족들이 있는 곳.”
“…”
형진의 말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말했다.
“나는… 역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어.”
“어째서?”
“전에 말했잖아. 나를 네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같이 둘 수는 없다고.”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달라. 이제는 너도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될 몸이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형진이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르지 않아. 지금도 나는 심정적으로는 위대한 어머니를 따르고 있는 입장이야. 물론 너… 아니,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귀가 솔깃해지고 말거야. 그건…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 되겠지.”
“…”
사실 왕성 라이언하트는 포트니아 테론이 인지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본래 자신이 모시던 신과 접촉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어찌보면 그녀는 그와 같은 위험성보다도 자신으로 인해 기존에 화목했던 그의 가정에 문제의 소지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난… 그냥 여기에 계속 있어도 괜찮…”
“아니, 그건 안 돼. 너를 위해서도 아기를 위해서도 그건 좋은 일이 아니야.”
하긴 이 남자는 그런 남자였다. 아이를 위해서는 뭐라도 할 수 있는.
“그럼… 그냥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그런 곳이 좋겠어. 기왕이면 작은 숲이 있는.”
“알았어. 맡겨둬.”
형진은 곧바로 공간을 열고 어딘가로 향했다. 다이애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새롭게 눈앞에 드러난 풍경을 보고는 감탄하고 말았다.
“아…”
정말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담하고 예쁜, 하얀 빛의 작은 궁전.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며 반딧불 같은 작은 빛 덩어리가 날아다니는 작은 숲. 궁전의 뒤편으로는 작은 산이 솟아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흘러내린 차갑고 시린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넓고 푸른 파다와 작은 해안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솜털 구름 몇 개가 흐르는 하늘 위에는 희미하게 비치는 하나의 커다란 달이 보이고 있었다.
“어때?”
“굉장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실 저기 보이는 별은 달이 아니야.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저 행성의 달이지. 뭔가 신기하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그런가. 하하.”
물론 그렇다고 지구의 달은 아니다. 은염랑이 찾아내고 그의 소유가 된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나 할까.
“원래 이곳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지만, 네 이름을 따서 다이애나라고 부르도록 할게. 이곳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너의 것이야. 문자 그대로 너의 왕국이라고 해도 좋겠지. 어때. 마음에 들어? 다이애나 여왕님.”
“노, 농담하지마.”
“신이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야. 농담일 리가 없잖아.”
“…”
다이애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한 번 더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의 포로가 된 것인지 깨달았다. 이런 남자와 싸우려고 들었다니, 얼마나 가소롭게 느껴졌을까 싶어 얼굴마저 화끈거릴 정도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