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15
00715 161. 대면 =========================
본래 그곳에 살고 있던 은염랑들과 함께 요정들 몇을 남겨 그녀의 시중을 들게끔 했다. 물론 형진이 계속 붙어 있겠지만, 모처럼의 아름다운 궁전에 사람 하나 없는 광경은 너무 썰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이애나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지은 형진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포트니아 테론과의 대담이었다.
지금까지 포트니아 테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런 존재였고, 몇 번의 접촉이 있긴 했지만 형진은 여전히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마침내 접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형진은 파괴와 재생과 관련된 신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포트니아 테론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나토스의 결계가 부서지고 난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신이 파괴와 재생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미친 짓을 벌이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형진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만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모든 것을 위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꼭 가야겠어?”
다른 여신들 역시 그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는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차피… 지금도 그리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니까 그냥 두어도 되지 않나 싶어서.”
형진은 자신이 애용하는 트렌치 코트를 든 채로 그렇게 말하는 공포와 죽음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야. 하지만 접촉해서 상대의 진의를 확인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불안한 기분으로 있어야겠지. 나는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미 확고하게 결심을 다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공포와 죽음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가만히 그에게 코트를 입혀 주며 말했다.
“조심해야 해.”
“걱정 마.”
그러자 옆에서 불퉁거리는 시선을 던지며 지켜보고 있던 희망과 생명이 한 마디 던진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우리는 같이 가면 안 된다는 이유는 뭔데.”
“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
“웃지마. 바보 녀석. 뭐가 좋다고 웃어.”
“뭐긴. 이렇게 날 걱정해주는 아리따운 여신의 마음 씀씀이가 기뻐서 웃는 거지.”
“쳇. 말이나 못하면.”
툴툴거리면서도 손짓해서 부르자 당연하다는 품에 안긴다. 그런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자 희망과 생명은 화를 버럭 내며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형진은 가만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정말…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이번엔 보호와 균형이다. 안 된다고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지만, 형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하지만…”
“만약의 사태가 생겨도 난 예비로 보충할 신격의 파편도 하나 마련해 둔 상태지만, 당신은 그렇지 못하잖아. 그러니 혼자 가는 편이 나아.”
“…”
형진의 말에 보호와 균형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형진은 그런 그녀 역시 품으로 끌어당겨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다시 말했다.
“상황은 계속 전해지도록 해둘 테니까, 걱정 말고 엘리시온에서 지켜보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여신들을 엘리시온으로 들여보낸 뒤에야 형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포트니아 테론이 제안한 장소로 이동했다.
황혼의 권능을 사용해서 공간을 넘어가 보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었다. 척 보기에도 티폰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뭔가 썰렁하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다른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낮다는 말도 된다. 물론 수작을 부리기로 한다면 어떻게든 부리겠지만, 적어도 첫 인상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기다리자 공간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늦었나. 미안하군.”
“별로. 나도 금방 온 참이라.”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이전에 보았던 레테처럼 넉넉한 인상의 아주머니 모습이었다. 물론 저 모습이 본신은 아닐 것이다. 레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몸을 빌린 것 뿐이겠지.
“그 아이는?”
“잘 있어. 아이를 위해서라도 안전하게 보살필 테니까 걱정 하지마.”
“그런가. 다행이로군. 참 잘 되었어.”
“…”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포트니아 테론에게 있어 매우 불쾌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추종자가 강제로 개종 당한 것도 모자라, 감금당한 상태로 능욕당해 아이까지 가지고 말았다. 물론 다이애나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그런 식으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건 뭔가 어폐가 있는 일이고, 관계 역시도 그녀가 먼저 형진에게 다가서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제외하고 그냥 원인과 결과만을 따진다면 그런 식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형진 자신이 포트니아 테론의 입장이더라도, 그것을 먼저 의심하고 화를 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자신의 추종자를 강제로 개종시켜서 감금한 시점에서 이미 화를 내고도 남을만한 일 아닌가. 게다가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다 한들, 한편으로는 다이애나가 포트니아 테론을 배신하고 형진에게 붙은 셈이니 그것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포트니아 테론은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너무나 연기력이 좋아서 형진마저도 속일 수 있을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양새다.
“이상하군.”
“뭐가?”
“보통은 이런 일이 생기면 불쾌해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어서.”
“호오, 그런가?”
“…”
뭔가 벽을 보고 얘기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미심쩍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형진의 반응에 포트니아 테론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녀가 마음이 통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남자는 아이를 끔찍하게도 아끼고, 여자는 다소 미숙한 면은 있지만 본성은 따뜻하니 좋은 어머니가 될 게야. 내가 어째서 불쾌해 하고 화를 내야 하는 거지?”
“그건…”
형진은 말문이 막혔다. 형진의 입을 다물게 하다니, 다른 신들이 봤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비명을 지렀을 지도 모를 만한 일이다.
“그 아이를 잘 아껴주게. 여러모로 힘들게 자라온 아이야. 이제라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바랄 것이 없는 일이지.”
“…”
괜히 위대한 어머니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로 이 존재가 타락한 것이 맞나 싶은 생각 또한 든다. 어찌 보면 결혼한 딸의 임신 소식을 가지고 온 사위를 맞이하는 듯한 느낌 같기도 하고.
뭔가 기분이 묘하다. 자신이 예상한 포트니아 테론과의 대담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예상과 다르군.”
“뭐가?”
“난 영락없이 네가 타락한 존재라고만 생각했거든.”
어떻게 보면 모욕적일 수도 있는 말. 하지만 포트니아 테론은 그럴 법 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때문인가.”
“물론.”
포트니아 테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에게도 이런 저런 사정이 있게 마련이야. 네가 그러하듯이.”
“그런가.”
하기야 안식과 동굴도 그런 신이다. 물론 그녀가 어째서 언데드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포트니아 테론 역시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형진의 말에 포트니아 테론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파괴와 재생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이 있나.”
하지만 어렵사리 나온 질문과는 달리, 대답은 아주 간단하게 나와버렸다.
“이름을 들어 보았다기 보다는, 직접 만나 보았다고 해야겠지.”
“뭐?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고 말고. 다만…”
“다만?”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기도 하지.”
“…”
형진은 흠칫 굳어 버렸다.
“그 말은…”
“소멸했다는 뜻이야. 완전히, 허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파괴와 재생이 소멸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자신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긴 했어도, 파괴와 재생은 엄연히 신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넉넉한 아줌마 모습의 존재는 아주 태연하게 신이 소멸해 버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가 보군. 그럼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지.”
포트니아 테론은 손을 펼치고는 그 위에 무언가를 드러내 보였다.
“헛!”
순간 형진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녀가 꺼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신격의 파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것도 같이 없애버릴까 했지만,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 듯 하여 남겨 두었어.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내저어 신격의 파편을 형진에게 건네주었다.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은 형진이 되물었다.
“이걸… 그냥 막 줘도 괜찮은 건가?”
“어찌 보면… 이건 파괴와 재생의 유골이나 다름없는 것. 너와도 무관하지 않은 존재이며, 또한 그쪽에는 그 아이의 누이도 있으니까.”
“…”
포트니아 테론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파괴와 재생이라는 이름의 신이 형진과 어떤 관계이며, 또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것까지 전부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다.
소멸 당시 파괴와 재생의 기억을 읽은 것일까. 아마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수많은 세계들 가운데 타나토스를 딱 짚어서 온 것을 보면 틀림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포트니아 테론은 무엇을 위해 타나토스에 온 것일까. 그저 자신의 손에 비참하게 소멸되어 버린 신의 잔재에 이끌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까.
확인해 보니 자신의 손에 건네진 것은 신격의 파편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힘 역시 이전에 흡수했던 파괴와 재생의 파편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포트니아 테론이 말한 대로, 파괴와 재생의 파편이 틀림 없는 것이다.
신격의 파편을 손에 쥔 순간, 형진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을 얻어 흡수하는 순간, 형진은 지금까지 완전히 얻지 못했던 나머지 하나의 신격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신격이라는 것이 그 절대량에 따라 갖춰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가 지닌 신격이 일반적인 신과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형진은 일단 신격을 흡수하는 것을 관두고 그것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한 뒤 포트니아 테론을 바라보았다. 당장 신격의 파편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건네준 존재가 눈앞에서 잔잔하게 웃으며 자리하고 있다.
형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포트니아 테론이라는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라 해도 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 게다가 도무지 주된 신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름들. 그럼에도 공간을 넘고 추종자에게 이런 저런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
단순한 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어디서 나고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의 진실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형진의 그런 심각한 표정과는 달리, 포트니아 테론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리고 이내 얼굴에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되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뭐?”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야… 밤의 신…”
“아니. 그게 아니야.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형진은 자신이 지닌 신격을 말했으나 포트니아 테론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자네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는 그 존재들과는 전혀 달라. 그래서 나는 궁금해. 자네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
아무렇지 않게 꺼낸 그 말에 형진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네가? 신들을?”
형진의 반문에 포트니아 테론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바로 그 신들을… 아니, 정확히는 엘리시온을 낳은 장본인이니까.”
다이애나는 포트니아 테론을 항상 위대한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것이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두편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