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0
00790 181. 동란 =========================
드디어 마지막까지 엘리시온에서 뭉개고 있던 신들까지 모두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신 체면에 아이들이나 돌보는 보모 신세가 된 것이 자존심 상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잘 하면 신격마저 되살릴 수도 있는데다 수락하지 않으면 당장 맨몸뚱이로 엘리시온에서 쫓겨날 판이니 그들로서는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 부탁해.”
“네. 맡겨주세요.”
자신 앞에서는 생긋 웃는 귀여운 아내일 뿐이지만, 잉여신들에게 있어 미엘은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다. 당장 엘리시온의 운영권을 틀어쥔 형진의 부인인데다, 그의 힘을 받아들여 여느 환수와는 차원이 다른 힘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은 물론이고 실질적인 힘까지 지니고 있으니, 잉여신들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미엘과 하엘로서도 그동안 아이들을 돌보느라 왕성 밖으로 나서지 못한 탓에 다소 갑갑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고 있는 중이다.
“이거 봐. 예쁘지? 빠아가 만들어 줬어.”
“우와아… 부러워.”
신이 난 건 아기 공주들이다. 흑요호 아이들이 왕성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제는 흑요호만이 아니라 다른 환수들의 아이들 역시 왕성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비와 낭만이 해방되고 난 뒤 조금 시무룩해 하던 다희는 순식간에 아이들을 휘어잡고 골목대장이 되었다.
“돌격!”
“와아아아아!”
“어이쿠! 자, 잠깐.”
어떻게 하면 형진에게 자신의 사업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지 골똘하게 고민하고 있는 할이 얼결에 목표가 되어 버렸다. 평범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골렘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몸집을 지니고 있는 터라 아이들 눈에는 영락없는 사냥감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맷집도 상당하니 환수 아이들의 놀이 상대로 제격이긴 하다.
산후조리 중인 유아를 데리고 소풍을 겸해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형진은 문득 자신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밤의 신을 뵙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구르듯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는 인물은, 아운 제국의 어린 황제 라만이었다.
“무슨 일이지?”
모처럼 유아와 단둘이 바깥바람을 쐬고 있는 참에 훼방을 놓으니 좋게 보일 이유가 없다. 게다가 라만 이 녀석은 카트린을 호시탐탐 노리는 어린 늑대이기도 하다. 물론 이전에 카트린과는 친구로 지내기로 약속한 모양이긴 하지만 남녀 관계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지어지는 것이던가.
시큰둥한 형진의 반응에 라만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고했다.
“앙그릴에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뭐?”
우주 개발도 순조롭게 첫 발을 떼었고, 엘리시온에서 뭉개고 있던 잉여신들 바깥으로 완전히 끌어내었다. 남은 것은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듯 느긋하게 그 모든 것을 살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갑자기 전쟁이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혹시 신 행세를 하고 다니던 그 놈의 잔당인가?”
앙그릴을 발견하게 된 것 자체가 그곳에서 신 흉내를 내고 다니던 리치 놈 때문이었다. 물론 그 놈은 형진에게 걸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도 전에 한줌 재가 되어 버렸지만, 혹시나 놈의 잔당이 남아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라면 형진의 지시를 받은 요정들이 매의 눈으로 동향을 살피고 있는 상태긴 하지만, 앙그릴은 위성망을 깔아두긴 했어도 아직까지 그렇게 철저한 관리 체계가 수립되어 있지는 못했다. 선언 역시 지구에만 효과가 적용되는 것일 뿐, 앙그릴에는 효력이 없다. 형진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광대한 우주 전체에 선언을 적용할 정도는 아니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문화나 사회가 다른 세계들에 지구의 개념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닙니다. 놈의 잔당은 이미 완전히 척결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누가?”
“그것이…”
라만은 조심스럽게 앙그릴에서 발발한 전쟁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자 형진은 허탈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일어난 전쟁이 나 때문이라는 얘긴가?”
“화, 황공합니다.”
라만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또한 긍정의 뜻이기도 했다.
앙그릴은 이제 막 마법 기반의 산업 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와중이었고, 각국은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국력을 표출할 기회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만약 중간에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들은 과거 지구가 그랬던 것처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 경쟁을 벌이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멈추었지만, 문제는 이미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지역이었다.
“신께서는 정의를 수호하는 분이시다. 분명 이 부당한 침탈 행위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에게 인정받았다. 따라서 이 땅을 점유하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다!”
“신의 뜻은 우리에게 있다!”
“아니다! 우리야 말로 신의 뜻을 받드는 자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자기들끼리 나서서 설레발을 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본국과 식민지측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에게 신의 정의가 있음을 주장하며 충돌했고, 지배자 측에서 시위하던 자들에게 무력 진압을 감행하면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양측은 본격적인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형진은 물론이고, 중재를 하려던 라만으로서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신의 뜻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정작 신의 뜻을 대변하는 자신의 중재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양측의 입장을 조율해 평화를 이끌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전쟁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그 노력은 충분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라만은 몸둘바를 모르며 형진의 꾸짖음을 기다렸다.
“얕보였군.”
하지만 형진은 화를 내는 대신 혀를 차며 어이 없어 했다. 라만이 중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애초에 말을 들을 생각 자체가 없는 이들에게 무슨 소리를 하든 먹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형진은 이것이 단순히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충돌이 아님을 바로 간파한 것이다.
우발적인 충돌로 포장이 되긴 했지만, 이것은 사실상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형진이 스스로 신임을 밝히긴 했어도 다른 나라들이 경험한 것이라고는 귀엽고 예쁜 공주 하나가 아운 제국의 황제를 데리고 하늘을 나는 배를 탄 채 여행을 다니는 장면뿐이다. 물론 열 척에 달하는 부양선 함대가 함께 하긴 했으며 주시자들이 그들의 여행을 호위했지만, 그래봐야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분쟁을 빌미로, 상대가 정말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는지를.
어리석은 일이긴 했지만, 그들로서는 해 볼만 한 일이었다.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식민지 하나를 부추긴 것뿐이다. 상대의 역량을 찬찬히 지켜보고 이후의 행동을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들로서는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 판단한 것이리라.
세상을 조율하는 것이 이래서 어렵다. 누구 하나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송… 합니다.”
라만은 입술을 깨문 채 그렇게 다시 한 번 사죄했다. 얕보였다는 말이 아직 어린 자신에게 향한 말이라 생각한 것이리라.
엄밀히 말하면 얕보인 것은 형진 자신이었지만, 굳이 그의 생각을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형진은 이렇게 물었다.
“너는 이번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라만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의 위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들에게 확실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또한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도 알려야만 합니다.”
의외로 꽤 강경한 발언이다. 자신이 얕보였다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른 건가 싶었지만, 목소리가 생각보다 침착한 걸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너는 내가 힘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이번 일을 획책한 이들 모두입니다.”
“어째서?”
“신의 시선이 그들 모두에게 확실하게 닿고 있음을 알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형진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리 된다면, 자칫 앙그릴 전체가 경직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힘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면, 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험해 보고자 할 것입니다.”
“흠…”
아직 맹숭맹숭한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법 강단이 있다. 그래봐야 카트린에게는 손끝 하나 못 대도록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앞으로 사흘간의 말미를 주겠다.”
라만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최후통첩입니까.”
“맞아. 그 기간 안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닌 자와 더불어, 이번 일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들이 스스로의 죄를 밝힌다면, 나는 처벌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기회를 걷어찬다면 앙그릴은 내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라만이 측근들을 데리고 황급히 물러나자, 형진은 노스페라투 즈라탈을 불러들였다.
“밤의 주인을 뵙습니다.”
“갑자기 불러 미안하군. 그래. 따로 불편한 점은 없고?”
“없습니다. 모두 안락하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주시자들이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은 언제든 명을 받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 말하니 아주 든든하군.”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형진은 다시 말했다.
“앙그릴에 대한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 역시 카트린 공주님을 모신 적이 있으니까요.”
“그랬군.”
“혹시, 그쪽의 놈들이 뭔가 문제라도 일으킨 겁니까.”
“맞아. 전쟁이 일어났다는군.”
“그런…”
순간 즈라탈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아지랑이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형진의 옆에 앉아 있는 유아의 존재를 깨닫고는 황급히 기운을 가라앉혔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그가 힘을 드러낸 순간 두려움에 빠졌겠지만, 유아는 희망과 생명의 성녀인지라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조심하도록 해. 이곳엔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우직한 즈라탈의 대답에 형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일단… 사흘간의 유예 기간을 주긴 했지만 스스로 나서서 죄를 청하거나 하지는 않을테지. 그러니 너는 그 사흘 동안 원정 준비를 하도록.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일거에 나서서 그 모든 불온한 자들을 쓸어버릴 수 있도록.”
지시가 내려지자 즈라탈은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불꽃과 같이 일어나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에게 철퇴를 내리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좋아.”
즈라탈이 물러가자, 형진은 다시 왕성 안에 머물고 있는 자칭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림. 너는 요정들을 통솔하여 앙그릴의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도록.”
-네! 스승님.
“소야, 규설, 쿠. 너희들은 환수들 가운데 이번 일에 참여할 이들을 불러 모아라. 노스페라투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긴 하겠지만, 그들만으로는 수가 모자랄 수도 있으니.”
“참여할 자들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스승님.”
사흘은 짧은 시간이다. 특히나 그것이 전 우주에 흩어져 있는 주시자들의 전력을 불러 모아 전열을 가다듬는 시간이라면, 터무니없이 적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사흘이라는 시간은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뜻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딱히 실망스러운 기분도 느껴지지 않는다.
형진은 라만을 위로하고는 곧바로 대기중이던 주시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집행을 시작하라.”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오늘은 뭘 먹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