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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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아오라드를 이끄는 자들의 포섭이 끝나자, 곧바로 그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 정보들은 단순히 클로리스 종족에 대해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자들과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데이터가 물 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악!”
“안 돼! 정신 차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하지만! 하지만!”
겨우 비서로서 자리를 잡아가나 싶었던 규설과 힐리에타에게 있어, 이 막대한 양의 정보는 단순히 그 양만으로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클로리스인들만 따져도 백이십억.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올린 지식과 역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낸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그런데 그런 그들조차 이 우주에서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 모든 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형진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가공하는 것이 바로 비서의 역할임을 감안하면 힐리에타가 견디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가려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란은 형진에게 새로운 안건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번 기회에 비서실을 만드는 편이 좋겠어요.”
“비서실? 비서를 더 늘리자고?”
“물론 당신을 직접 보좌하는 비서는 이대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그들의 업무를 보다 세분화하고 도울 조직이 필요하다는 얘기에요.”
“그런가.”
확실히 지금까지는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업무를 처리한 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제랄딘이나 요안나의 능력이 너무 출중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녀들이 너무 뛰어난 탓에, 이런 주먹구구식의 체계로도 지금까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설사 요안나와 제랄딘이 다시 업무에 복귀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말이 쉬워서 백이십억이지, 그 정도의 인구가 만들어내는 정보의 양이란 건 한두 명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체계를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뭔가 좋은 방법이 있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란이 이런 얘기를 무작정 꺼냈을 리는 없다. 그래서 형진은 기대를 가지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부터 새로 모든 것을 만들고자 하면 오히려 일만 더 키우는 결과가 되고 말아요. 결국 최선은 기존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겠죠.”
“어떤?”
“타나토스의 회합장에는 장서관이라는 곳이 있어요. 이전에도 한 번 비슷한 일이 있었고, 당시 제랄딘은 사제들의 힘을 빌려서 그곳의 자료들을 체계화하는 일을 했었죠.”
“과연. 한 번 했었던 일이니 도움이 되겠군.”
“그리고 왕성에는 요정들에 의해 움직이는 상황실이 존재해요. 기본적으로 그곳의 일은 저쪽 우주에 설치된 위성으로부터의 정보를 통합하여 보고하는 것이지만, 이쪽 역시 같은 일이 필요하리라고 봐요.”
이것만이 아니다. 요안나에게는 자신의 일을 돕기 위한 별개의 싱크탱크 조직이 있었고, 환수들 중에서도 이런 식의 일에 소질이 있는 자들이 몇몇 있었다. 결국 아란의 말은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이런 조직들을 모두 하나로 합쳐 비서실 아래로 체계화시키자는 얘기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기존에 그의 아내들이 지니고 있던 권한을 비서실이라는 기구를 통해 형진에게 모조리 귀속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요정들이 주축을 이루는 상황실 같은 곳은 형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곳이지만, 요안나가 활용중인 싱크탱크은 물론이고 회합장의 사제들 역시 희망과 생명 개인의 추종자들이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의견이 나오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꽃과 바람의 대두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가 등장함에 따라 위기감을 가지게 된 그의 반려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은 결과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보호와 균형이 형진에게 힘내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의 일인 셈이다.
형진은 이런 부분들을 단숨에 간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그것을 따지고 드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모른 척 그녀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알았어.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고마워요. 혹시나 해서 조직도를 만들어 왔어요. 한번 살펴보시겠어요?”
“그래? 어디…”
조직도까지 준비를 해온 걸 보니 이미 필요성이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여신들끼리 충분히 논의가 된 모양이다.
“다른 건 뭔지 알겠는데, 경호실… 은 뭐지?”
“써 있는 그대로에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왕실의 식구들을 위한 경호 서비스를 담당하기 위한 부서죠.”
“하지만, 그거라면…”
“네. 이미 필요한 경우 주시자나 집행자들처럼 전투에 능한 추종자들을 차출해서 쓰는 방법을 취하고 있죠. 하지만 그들의 본래 능력은 경호가 아닌데다 앞으로 전쟁이 격화되면 그들을 차출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겠죠. 게다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이 왕성 밖으로 나갈 때의 필요한 경호 인력의 수요도 늘어날 테고요.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면, 필요한 인력을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확보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럴 듯 하군.”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었지만, 형진의 표정에는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경호실이라는 것 자체가 앞으로 아이들이 독립하여 왕성을 나가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조직이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야 계속 품 안에 넣어두고 싶지만, 이미 소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공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주관은 보호와 균형이 맡는 건가.”
“네. 전투 능력으로 따지면 부족한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지키고 보살피는 일이라면 그녀의 추종자들이 적임이니까요.”
“그렇겠지.”
보호의 성역은 물론이고, 신체의 상태를 항상 균형 있게 유지시켜 주는 보호와 균형의 권능을 지닌 이가 항상 옆에 붙어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경호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는 그냥 성물을 몸에 지니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가 성물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도 염두에 둔다면 역시 누군가를 옆에 붙여 두는 편이 안심이 된다.
보호와 균형 역시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고민했던 건가.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는 아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군. 이대로 시행하도록 해.”
“네.”
경호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존 체계를 통합 관리하는 수준의 일이었으므로, 형진을 보좌하기 위한 체계는 빠르게 그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뭔가 눈앞에서 후다닥 실체를 갖춰가는 체계를 보며 다시 한 번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어, 그러니까… 이건…”
“그건 이쪽으로, 이건 그쪽으로, 저건 저쪽으로.”
“어, 어, 어어…”
새로 만들어진 일종의 그룹웨어를 통해 업무를 분담시켜 하달하고 그 결과를 받아서 정리한 후 형진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녀들의 주 업무가 되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별로 어려울 것 없어 보이지만, 어떤 일이 어디에 할당되어야 하는지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 어느 정도 비서로서 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아오라드의 수뇌부로부터 받은 자료의 정리가 신속하게 처리되기 시작하자, 적 군세의 현재 상황도 간접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휘체계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려워도, 그 정도 규모의 군세가 움직이려면 보급 체계가 필요한 법. 클로리스인들은 식물을 다루는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들이 식량등의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클로리스인들이 생산하는 식량이 이쪽 우주에서 소비되는 양의 삼할 이상이 되는 건가.”
“식량만이 아니에요. 식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타 물질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이 우주의 반을 그들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엄청나군.”
이쯤 되면 긁지 않은 복권이란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우주가 오직 클로리스인들로만 채워진 것 또한 아니다.
“12종족… 이들이 이쪽 우주의 주류인건가.”
이쪽 우주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른바 12종족이라 불리는 종족들이다.
클로리스인들은 그 가운데 꽃의 종족이라 불리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각 종족들은 저마다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아스트라페에 의해 파괴되어 거짓된 천국으로 보내졌던 크리스털 역시 돌의 종족이라 불리는 12종족의 일원이었고, 애벌레 같은 형상의 녀석들 역시 곤충의 종족이라 불리는 놈들이다.
“우선은 클로리스인들을 확실하게 포섭하는 것이 먼저겠군.”
이것도 이를테면 독점의 폐해인 셈이다. 클로리스인들의 식량 생산 효율이 좋다고 그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라고나 할까. 이제 형진이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면, 이 우주의 식량 생산량 가운데 삼할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 양의 식량 생산이 갑자기 줄어버리면, 그것만으로도 우주 전체에 대규모 기아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물론 그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클로리스인들에 대한 포섭이 눈에 띄게 되면 빛의 신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방어하려고 들 것이다. 클로리스인들이 완전히 형진 쪽으로 넘어갔을 때의 대안은 물론이고, 그들이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끔 조치를 취할 것은 당연한 일.
“일단… 포교는 지금까지처럼 은밀하게 진행하도록 하고. 저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돌려지지 못하도록 좀 더 흔들어 볼 필요가 있겠군.”
형진의 말에 리페가 물었다.
“하지만 이상해. 빛의 신은 어째서 적극적으로 이번 일에 대응하지 않는 거지?”
“글쎄.”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형진도 다소 의문이다. 만약 빛의 신이 지난 번의 전투에 개입했다면 그처럼 손쉽게 대승을 거두거나 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사실 빛의 신이 어떤 식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무기 자체로만 놓고 보자면 형진 쪽이 여전히 유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스트라페가 지닌 초광속 타격 능력은 그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광속이란 문자 그대로 빛을 뛰어넘는 속도. 빛의 신이 어떤 수단을 사용하건 간에, 그것이 빛을 매개로 한 것이라면 적이 때리기 전에 먼저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쩌면 적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가장 큰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빛이란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일 터. 실제로도 물리학에서 이론상 빛보다 빠른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것을 뛰어넘는 속도로 날아들어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크리스털을 단숨에 꿰뚫어 버리는 아스트라페의 존재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관념들을 모조리 허물어 버리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결국 앞서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과학과 마법, 그리고 권능이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육성시키고자 한 형진의 정책이 빛을 발한 덕분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오직 바위만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이쪽은 가위, 바위, 보를 전부 낼 수 있다면 이기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하지만 빛의 신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상황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클로리스인들에 대한 포섭 작업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저들의 시야를 균열 쪽으로 고정시켜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어디를 건드리느냐인데…”
형진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돌의 종족이나 벌레의 종족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이 부족하다. 당장은 균열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티폰 세 마리와 기동 요새 스틱스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균열을 벗어나서 점령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탐사선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전투가 아닌 탐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함선들이기 때문에 애초에 용도 자체가 다르다.
바로 그때, 상황실로부터 새로운 보고가 올라왔다.
“적 군세, 대규모로 집결중입니다!”
아무래도 빛의 신은 더 이상 균열이 형진에게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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