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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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도.”
형진의 말이 울려 퍼진 순간 집무실에는 균열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모습이 펼쳐졌다.
“저 쪽이군.”
적의 본진이 위치해 있던 장소로 손을 뻗치자 해당 영역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아…”
“저건…”
얼핏 보기에도 마치 개미떼 같은 무언가가 꾸역꾸역 모여드는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이쯤 되면 숫자를 세는 것도 뭔가 난감한 느낌.
“추정되는 숫자는?”
“애벌레 형상의 개체는 최소 일만. 크리스털 역시 천 단위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말이 좋아서 일만이지, 애벌레 형상의 개체가 지닌 크기를 생각해 보면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행성 하나는 전부 채우고도 남을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질리게 만드는군.”
거짓된 천국에서 아스트라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제조되어 나오고 있긴 하지만, 크리스털의 개수가 천 단위로 넘어가게 되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 티폰이 나서서 먹어치우는 일도 무한대로 가능한 게 아니다. 이쯤 되면 티폰이 먹다 체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저게 끝이 아닐 거라는 점.
돌의 종족이나 곤충의 종족 역시 120억 인구를 가진 클로리스인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12종족의 일원임을 감안하면, 집결이 끝났을 때의 숫자는 지금의 몇 배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이 무작정 숫자로 몰아붙이기로 마음먹는다면, 세 마리의 티폰과 기동요새 스틱스 하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별다른 대책이 없다면, 남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바로, 형진이 최대한으로 아바타를 뽑아 저들을 상대하는 방법이다.
당장 그가 운용하고 있는 아바타의 숫자는 열 명이 넘어간다. 아내들과 자식들을 돌보기 위한 아바타는 물론이고 연구나 제작, 수련 등을 위해 항상 그 정도의 숫자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숫자가 형진이 운용할 수 있는 아바타의 전체 숫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지닌 공헌도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바타를 운용할 수 있고, 그들 모두를 통해 인스턴트 킬을 사용한다면 티폰과 스틱스로 균열만 제대로 틀어막는다는 가정 하에 시간은 다소 걸리더라도 어지간한 숫자의 적은 모두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형진은 다시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일 자체가 자신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점에 생각이 도달한 것이다.
적은 자신의 모든 카드를 다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전에 아스트라페로 분견대를 타격한 일을 통해 자신이 저들이 지닌 원시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먼 곳의 정황을 들여다 보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집결하고 있는 적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위나 다름없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형진은 이 순간에도 꾸역꾸역 모여드는 적들의 모습을 근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규설에게 물었다.
“참모 본부에도 상황을 전파했나?”
“네? 아, 아직… 즉시 상황을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잠시 뒤, 참모 본부로부터 일차적인 소견이 전해져 왔다. 그들 역시 형진이 우려한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더 위험 요소를 지적하고 있었다.
“대량 파괴 병기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가.”
작게 혀를 차며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규설이 보충 설명을 이어간다.
“그렇습니다. 방어의 용이성을 위해서라면, 현재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은 일단 균열 너머로 물러서서 넘어오는 적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방이 트여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보다는 일단 출입이 제한된 균열을 통하는 쪽이 상대가 지닌 숫자의 이점을 제한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쪽 역시 전력을 한 곳에 집중해야겠지.”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대량 파괴 병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저희 쪽은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입게 되겠죠.”
“흠…”
적이 한곳에 집중하는 순간, 아군 역시 한곳에 화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만약 상대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상대가 이번 전투에 동원된 이들의 희생을 개의치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나 성립될 수 있는 가설이다. 하지만 때로 종교는 그것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일견 무의미하게까지 보이는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들이 형진이 보아왔던 일반적인 종교의 행태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이전 전투에서 적들이 보여주었던 맹목적이고 저돌적인 모습을 보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항상 고려되어야만 한다.
“역시 숫자란 건 쉽게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군.”
전략이나 전술을 수립함에 있어서 예비 전력을 반드시 마련해 두라는 것은 어떤 시기 어떤 무기 체계를 사용하는 전쟁이건 간에 반드시 회자 되는 고언 가운데 하나이다. 형진을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민스럽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당장 애벌레 같은 놈만 하더라도 주시자나 집행자가 일대일로 상대하기는 다소 버겁다. 환수 쯤은 되어야 제한 없이 일대일로 상대가 가능한데, 그들은 아무렇게나 막 소모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추종자들에게 모조리 인스턴트 킬이나 아스트라페 같은 무기를 쥐어줄 수도 없는 일이고.
애초에 개체 하나가 단독으로 우주 항행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나 할까.
“돌의 종족과 곤충의 종족들에 대한 정보는 정리가 되었나.”
“여기 있습니다.”
돌의 종족이 어떤 생태를 가지고 있는지는 클로리스인들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인 탄소 기반 생명체와는 구성 물질 자체가 다른 종족이다 보니 12종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생태는 물론 의사소통 방법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곤충의 종족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들은 벌이나 개미처럼 사회성을 지닌 곤충의 일반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다. 흔히 여왕이라고 칭해지는 개체에 의해 무리가 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클로리스인들 역시 여왕을 직접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생산하는 식량의 일부가 특정 장소에 대량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곳이 여왕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만 하고 있는 상태.
“흠…”
사실 대책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균열로의 진입을 결심한 시점에서 이런 식의 물량전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사용하기는 좀 아쉽다. 아직 적이 비장의 한 수를 숨겨두고 있는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자신이 숨겨둔 한 수를 꺼내 보이는 것이 뭔가 아깝다고나 할까.
“적 개체수, 현재 이만을 넘어섰습니다!”
괜찮을까 싶은 기색이 역력한 힐리에타의 목소리. 하지만 여전히 적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단… 알큐비에레 어뢰라도 한 방 먼저 날리는 편이 어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리페가 그렇게 의견을 내놓았다. 관통력을 중시한 아스트라페와는 달리, 초기형의 알큐비에레 어뢰는 명중시 주변 공간에 치명적인 여파를 만들어낸다.
알큐비에레 어뢰라면 지금처럼 한곳에 수많은 적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상황에서라면,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터.
하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그럼… 좀 더 기다리려고?”
“반드시 써야한다면.”
하지만 형진은 그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알큐비에레 어뢰 역시 그가 지닌 카드 가운데 하나. 지금 집결하고 있는 것이 적의 전투 가능한 전력의 대부분이라면 상관없지만, 120억이나 되는 클로리스인과 곤충의 종족이 동급이라면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 저렇게 한 군데 똘똘 뭉치는 것도 결국 아스트라페의 위력을 감안한 행동일 텐데, 여기에서 알큐비에레 어뢰까지 선보이게 되면 저들은 다시금 그에 걸맞은 대책을 들고 나올 터.
“적의 가용한 전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만 알아도 좋을 텐데 말이지.”
“…”
슬슬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서 조바심이 일어날 무렵, 형진은 마침내 고민을 멈추고 결정을 내렸다.
“움직여 봐야겠군.”
“어떻게 하시려고요?”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아가 혹시나 싶은 표정으로 묻는다. 설마 형진 스스로 저 무수한 적들에게 뛰어들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적은 간을 보려는 것 같아.”
“간을 본다구요?”
“그래. 지금 공격을 가한다면 우리가 상대의 정황을 낱낱이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 굳이 드러내 보여야 한다면 좀 더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황에 꺼내보이는 것이 좋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야.”
그러자 가장 성격이 급한 쪽인 리페가 얼른 물었다.
“그럼… 이대로 지켜만 보겠다는 얘기야?”
“물론 그건 아니지.”
형진은 씩 웃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절대량이 부족한 입장에서는 전면전은 그 자체로 손해야. 그렇다면 결국 기책을 쓸 수 밖에 없는 거지.”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란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책략이라면… 역시, 여왕인가요.”
“맞아. 물론 쉽진 않겠지만, 대략의 위치만 알고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은염랑이라는 훌륭한 카드가 있으니까.”
12종족의 하나를 구성할 정도면 그 숫자가 만만치는 않을 터. 대략의 위치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은염랑의 능력으로 여왕이 머물고 있는 근거지를 알아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자 이번엔 규설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클로리스인처럼 일반적인 방법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종족이 아니에요. 설령 여왕을 찾았다 해도, 그들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실 생각이신가요.”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반적인 생명체가 우주 공간에서 다른 아무런 도움 없이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그건…”
“우리가 지금 크리스털이라고 부르는 돌의 종족이라면 혹시 몰라. 완전히 일반적인 생물과는 생태 자체가 다르니까. 그렇다면 결국 간단한 얘기야. 클로리스인들이 꽃의 여신이라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결국 그들도 어떤 신에 의해 보호 받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지.”
물론 환수와 같은 경우를 보면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환수도 결국은 포트니아 테론이 엘리시온을 만들기 전에 탄생시킨, 어떻게 보면 준신이라고 해도 될만한 종족들이다. 다소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신의 개입으로 인해 탄생한 것은 마찬가지인 셈.
“적어도 클로리스인들이 생산한 식량을 소비하는 것으로 봐서는, 곤충의 종족 역시 모습은 기괴하지만 결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곤충이라고 불리는 존재로부터 변화해서 지금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형진은 잠시 아란과 미아, 그리고 리페를 주욱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쪽이 지니고 있는 가장 커다란 강점이 바로 엘리시온의 수많은 신들이라고 생각해. 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모든 신들의 통합을 이루어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통합된 신격이 분리된 개별적인 신격보다 각각의 추종자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꽃과 바람의 경우를 통해 확인이 되었지.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
형진의 말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깨닫고는 작은 전율마저 느꼈다.
어떻게 보면 코앞에 모여들고 있는 적의 대군을 앞에 두고 이런 식의 시도를 하는 것이 미친 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하게 되면, 지금 모여들고 있는 적의 대군 그 자체가 자신들의 것이 되어 버린다. 결정적인 순간에, 곤충의 종족 전부가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게 된다면 적이 입을 타격은 단순히 숫자로 계산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단계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럼, 이해한 걸로 알겠어. 함께 가는 건, 이전처럼 규설과 힐리에타로 해둘게. 괜찮겠지?”
형진은 그녀들이 모두 납득했으리라 생각하고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 사람이 더 나섰다.
“저도 같이 갈게요.”
그녀는, 바로 미아였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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