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84
-10884
“무슨 뜻이야?”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묻는 형진의 모습에 미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더니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게. 하지만 의지를 담아서.
“생각해 보면, 저는 당신에게 참 많은 것을 받았어요. 아무것도 없었던, 그래서 신이라는 이름조차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던 제가, 이제는 이렇게 큰 힘을 소유하게 되었죠.”
“…”
“하지만 말이에요. 이렇게 큰 힘, 저에게는 너무 과분해요.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해야 하나요. 원래 이 정도의 힘을 원한 것도 아니었구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처음 바다를 건너 형진에게 왔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대신들을 넘어선 존재가 된 것은, 오직 형진 덕분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미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형진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대답했다.
“과분하지 않아. 당신이니까 얻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런 식으로 자책할 필요 없어.”
하지만 그것은 또한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스스로 넓고 깊은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다른 어떤 신들과도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그에게 다가선 첫 번째 신이었다.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그런 행동의 결과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혹시라도 누에들이 죽은 일에 대해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책망하는 건가 싶어 한 형진의 말이었지만, 미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착한 여자 아니에요. 전 훨씬 이기적이고, 훨씬 욕심이 많은 여자에요. 단지, 그 욕심이 신으로서가 아닌 여자로서의 욕심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전 사실 누에들이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어요. 눈앞에서 둥지가 사라졌을 때도, 누에들보다는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당신이 더 걱정되었어요. 모두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도, 저의 시선은 당신을 향해 있었어요.”
“…”
“나도 알아요. 이런 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신으로서 지녀야할, 추종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조차 저는 그 순간 저버렸던 거에요. 그런 제가, 이런 엄청난 힘을 계속 지니고 있다면 자칫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미아…”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자책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좋게 얻어걸린 식으로 갖추게 된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책임감 없는 이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 그만큼 큰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니까요. 자칫 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뭔가 문제를 일으키고 난 뒤에는 늦어요.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번에 누에들에게 있었던 일도 그래서일지 몰라요. 제가 그들을 좀 더 신경 써서 통제했다면, 그랬다면 그런 식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단순히 누에들의 사고방식만 짚고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조차 구분지어 명시해주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미아가 이렇게 말을 잘하던 여자였던가. 논리나 그 외 다른 부분은 제쳐 두고서라도, 항상 자신의 말에만 고분고분 따라주던 그녀이기에 형진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책임자는 책임을 지기 위해 있는 자리라죠? 그러니 저도 책임을 져야 해요. 어떻게 보면 이건 누에들에게 가장 강력한 권고가 될 수도 있어요. 자신들의 행동이 그들이 신봉하는 여신에게 어떤 식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그들로서도 행동하기 전에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겠죠.”
“어쩌려고?”
이쯤 되면 걱정스러워지기까지 한다. 형진의 표정에 그런 우려가 드러나자, 미아는 가만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다시 말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에요. 저를 받아주세요. 제 몸과 마음과, 그리고 그 외에 신으로서의 모든 부분을. 단순히 계약이나 대리자로서가 아니라,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시길 바래요.”
“뭐?”
형진이 비록 신들의 추대에 의해 주신에 올라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다른 신들과 계급의 차이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물론 인간들의 선출직과 마찬가지로 주신 역시 다른 신들보다 높은 자리라는 식의 개념은 있었지만 명시적으로는 다른 신들과 동일한 위치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미아는 그런 일반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형진에게 스스로 종속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이라니?”
“말이 좀 이상한가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저 자신은 물론이고 누에들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해요.”
“…”
형진은 미아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신상필벌에 관한 문제는 누에들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가장 난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단순히 개체에 대해 가해지는 벌에 대해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개체가 벌을 받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면, 누에들은 서슴지 않고 그쪽을 선택할 종족들이다. 누구 하나를 본보기로 벌을 내린다든가 하는 식의 행동 자체가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종족 전체에 벌을 주는 건 어떨까.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애초에 그들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존재들이니 신상필벌이 종족 전체로 확장된다 해도 큰 의미가 없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감성이 절제되었을 때, 집단이 얼마나 냉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들과 하나가 아니지만, 또한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 바로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바로 그 약점인 셈이다.
스스로에게는 상을 주든 벌을 주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이지만, 보호와 균형에게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는 건 상황이 다르다.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여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도 더 이상 효율만을 고집하며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우선할 수는 없게 되리라.
미아는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누에들에 대해 직접적이고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만드는 방법이 되기도 해요. 대리자라는 어정쩡한 지위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수직적인 관계를 만들게 되면, 저들도 더 이상 당신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되겠죠. 적어도 누에들의 사고 방식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미아의 말에 형진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누에들의 존재는 현재의 형진에게 있어서 실로 계륵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숫자나 번식력, 그리고 일치된 사고를 통해 생산되는 강력한 신앙의 힘은 그에게 있어 매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통제되지 않는 상태라면 양날의 칼처럼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저들이 효율의 잣대를 누에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까지 적용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들의 효율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진의 가족에게까지 그러한 잣대를 들이밀고자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미아가 말한 대로, 대리자라는 어정쩡한 관계 설정이 아닌 명확하고 확실한 수직적 관계가 성립된다면 누에들 역시 형진의 직접적인 지배력에 완전히 귀속된다. 자신들의 효율 이전에 그가 정한 규칙과 법을 우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현재 그가 누에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신상필벌이 의미 없는 누에들에게 형진의 뜻에 거스를 경우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이것은 또한 부조리하다. 이 착하고 귀여운 아내가 제멋대로인 추종자들 때문에 스스로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벌을 감내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게다가 그런 식의 관계설정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당신이 정말로 저를 종처럼 부리거나 할 것도 아니잖아요.”
“당연하지!”
“물론… 저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 대해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요. 음…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플레이도 했던 적이 있지 않나요?”
씩 웃으며 말하는 미아의 모습에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커흠… 그거야, 그냥 잠시 동안의 재미로…”
미아는 그답지 않게 당황해 하는 형진의 모습에 키득거리며 웃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그런 플레이를 좀 더 오랫동안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그러다가 누에들이 스스로를 뉘우치고 그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게 되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걸로요. 어차피 우리 같은 신에게 있어 얼마 정도의 시간은 그리 오랜 기간도 아니니까요.”
누가 그녀에게 처음 의존증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정말로 심각한 의존증이라면, 이런 식으로 형진에게 자신의 결정을 강요하는 식의 행동을 보이지는 못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녀의 의존증은 단순한 결정 장애 같은 행동을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행동 역시, 아예 형진과 자신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정리함으로서 앞으로 그녀가 해야할 결정들을 모조리 떠넘기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형진은 작게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미아는 그런 형진의 시선이 조금 부끄러웠던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에게 등을 기대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처음? 그야…”
모래 사장에 처박혀 있던 그녀와의 조우는 사실 좀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여신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꼬질꼬질한 모습은 물론이고, 우와앙 하며 울음을 터트리던 모습을 떠올리자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우, 웃지 말아요.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쿡쿡.”
“칫.”
미아는 살짝 투덜거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말을 돌렸다.
“그때, 바다를 건너면서도 솔직히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을 떠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되돌려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그때 만약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
형진은 가만히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어깨 위에 머리를 얹고 뺨을 비볐다. 미아는 가만히 얼굴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누에 외의 다른 추종자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들도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자 형진은 잠시 손을 뻗어 미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걱정마, 누에들을 제외한 다른 어떤 주시자들도 당신의 추종자를 낮춰 보거나 하지는 않게 할 테니까.”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미아는 얼른 형진에게 확인했다.
“그럼, 제 뜻대로 해주시는 건가요?”
“응.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일이야. 지위야 어찌 되었든, 당신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일 뿐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당신도 참.”
귓가를 간질이는 형진의 말에 미아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찰랑이는 물 아래로 자신과 그의 다리가 엉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미아는 그제서야 자신이 그와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를 깨닫고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그의 손이 비춰진다. 그 손이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미아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밤의 신이 주관하는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그녀는 그 짙은 어둠 속에 스스로 몸을 눕히고 있었다. 이 의식이 모두 끝을 맺게 되는 순간, 둘 사이에는 이제까지와 다른 관계가 정립되겠지만 그것은 또한 그녀가 스스로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랑해요.”
“나도.”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