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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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벙긋거리던 리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미아의 모습을 앞뒤로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역시 어울려. 기회가 되면 언제고 한 번 입혀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입혀보니 느낌이 확 다르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제야 자기 옷을 찾아 입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각선미가 드러나는 그물 스타킹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 허벅지로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은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멋져. 최고야.”
나름대로 진지하기까지한 그의 평에 미아는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발그레하니 볼을 붉힌다.
“고, 고마워요.”
“좋은 거냐!”
미아의 그런 태도에 리페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다시금 핑크빛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형진의 야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서 놀랐어. 이참에 아예 비서실 인원들 전부 근무 때에는 바니걸 슈트를 입혀 볼까. 꽤 멋질 것 같은데.”
미아의 바니걸 슈트 차림이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형진은 그런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당황해 하던 리페는 곧바로 반발했다.
“우, 웃기지마! 누가 그런 걸 근무 중에 입는데? 너 그거 알아? 이거 엄연히 갑질이라고! 지구에서였다면 직장내 성추행으로 고소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라고!”
리페가 다시금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여긴 지구가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나 당당한 그의 대답에 리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헛소리도 너무 당당하게 해버리면 오히려 상대가 말문이 막힐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오늘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놀랄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순간 옆에서 뭔가 번쩍 하는 빛이 터져 나오길래 고개를 돌려봤다. 그랬더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느 틈엔가 옆에 서 있던 아란의 복장마저 바니걸 슈트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미아가 입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미아의 바니걸 슈트는 단색의 원피스 형태였지만, 아란의 그것은 투피스 형태로 만들어진데다 풍만한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어져 그렇지 않아도 묘하게 색기 있는 아란의 모습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너, 너, 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니걸 슈트를 갖춰 입은 아란의 모습에 리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라 말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아란을 가리켜 보이며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형진이 그런 아란의 모습을 보고는 탄성을 터트린다.
“오! 그 옷! 설마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네. 이상하지는 않나요?”
“이상하기는! 하하, 어쩐지 예전 일까지 막 떠오르고 그러네.”
“하하…”
생각해 보면 아직 공포와 죽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전, 그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 바로 이 바니걸 슈트이다. 형진과 아란에게 있어서는 추억이 서린 옷이라고 해야 하나.
“노, 노노노노, 농담이지 이거? 제 정신이야?”
물론 리페로서는 그런 둘의 추억 같은 것까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여신 세 명 가운데 둘이 바니걸 슈트를 입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어쩐지 자신만 뭔가 뒤처진 것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
“…”
이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규설과 힐리에타는 문득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형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래? 다녀와.”
나간다길래 어디 화장실이라도 가는 건가 싶어서 선선히 허락해 주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둘의 복장마저 바니걸 슈트로 바뀌어 있었다.
도대체 그 사이에 어디서 이런 걸 구해 온 것일까. 리페는 순간 그런 의문마저 떠올렸지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요정들에게 연락을 넣은 다음, 지급으로 의뢰를 넣어 물품을 건네 받은 것이다. 집행자로부터 시작되어 주시자들에게도 전해진 의뢰 시스템은 이 우주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둘에게 있어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여신들의 벽이 너무 두터워서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의 취향 가운데 하나를 알아냈으니 실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에게 있어 복장이란 건 인간들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닌 바에야.
“…”
이렇게 되자 상황실에 바니걸 슈트가 아닌 옷을 입고 있는 비서는 오직 리페 혼자만 남게 되었다.
“후후후… 후후후후후…”
어서 너도 갈아입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느낌으로 웃는 형진의 모습에 리페는 온몸의 털이 쭈뼛하고 곤두서는 느낌마저 받았다.
원래 전부 팔이 하나 뿐인 종족이 사는 세계에서 혼자만 팔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비정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리페는 여기 있는 다른 누구보다도 건전하고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노라 자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죄다 형진에게 넘어가서 그의 손가락 끝에 놀아나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이상한 쪽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바, 바보야! 누가 그 따위 옷을 입는다고!”
결국 리페는 주위로부터 전해지는 알 수 없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른다음 도망치듯 상황실을 빠져 나가고 말았다.
“쳇. 아깝군. 한 명만 마무리 지으면 딱이었는데.”
도망쳐 버린 리페의 뒷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있자니, 미아는 이렇게 비서 전부가 바니걸 슈트를 입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아란은 뜻모를 미소를 지은 채 그런 형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도망쳐 버렸지만, 할 일이 태산이다. 지체 된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해. 시작하자.”
“네!”
비서들 모두가 바니걸 슈트를 입은 것이 활력소가 되었는지, 형진은 빠르게 당면한 과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앞서의 전투를 통해 획득한 영역을 확실하게 통제하는 일이다. 비록 전투를 통해 게이트 주변에 남아 있던 적을 소탕하긴 했지만, 최초의 목표였던 게이트 장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해야 하는 탓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상대의 게이트를 분석할 기회를 놓친 것은 역시 아쉬운 기분을 저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게이트가 파괴되면서 적의 이동 수단이 무력화 되었으니, 당분간 이 영역에 새로운 적의 군세가 몰려올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아졌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게 마련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게이트를 파괴하고 적의 군세를 분쇄했다고는 해도, 아직 빛의 신을 추종하는 세력이 완전히 소탕된 것은 아니다. 해당 게이트를 사용하던 종족들이 거주하는 행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빛의 신이 지니고 있을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는 이상, 최악의 경우 새로운 게이트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출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각 행성들을 점령하여 빛의 신으로부터 그들을 단절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단 중요한 지역은 이렇게 다섯 군데 정도인가.”
균열 인근에 존재하는 유인 행성은 모두 일곱 개 정도. 그 가운데 두 곳은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소수의 인원만이 거주하고 있었고, 제대로 지성체가 정착해서 살아가는 곳이 다섯 곳 정도였다. 아직 정착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라고 해봐야 백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누에들을 동원할까요?”
“아니. 무력 시위 정도라면 몰라도, 누에들에게 점령 작업은 어울리지 않아.”
“그럼…”
“주시자들을 쓴다.”
그러자 아란이 물었다.
“수가 모자라지 않을까요? 필요하다면 집행자들도 동원하는 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추종자를 지원해 주겠다는 말은 기특했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점령이라고는 하지만, 싸움을 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저… 결계를 설치하고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정도면 충분하겠지.”
“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걱정마. 다 생각이 있으니.”
형진은 씩 웃고는 휘하의 주시자들을 소집했다.
그가 부르자 곧바로 주시자들이 다시금 스틱스에 발을 내딛었다.
“부르심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모여든 주시자들을 대표해서 노스페라투 즈라탈이 인사를 하자, 형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천천히 말했다.
“휴식은 취했는가.”
“물론입니다.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쉬었으니 염려마시고 명을 내려 주십시오.”
“다행이군.”
형진은 곧바로 그들에게 일곱 개의 행성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보여 주었다.
“얼마 전의 전투를 통해, 이 근방에 웅크리고 있던 적의 군세는 완전히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 영역에는 아직 저들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너희들은 그들에게 가서 우리가 이겼음을 전하라.”
즈라탈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맡겨 주십시오! 제가 가서 그 불손한 무리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겠습니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기백이 넘치는 말이었지만,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쉴 뿐이다.
“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쓸어 버려?”
“네? 그럼…”
“말했잖아. 가서 우리의 승리를 전하라고. 그것만 하면 돼. 쓸데없이 싸움 걸고 그러지 말라고.”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형진은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그것을 전해들은 즈라탈은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모처럼 한 번 더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주어진 것은 문자 그대로 사절의 역할뿐이었기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바로 움직이도록.”
“네…”
주시자들은 곧바로 형진이 건네준 아름다운 범선들에 올라탄 채로 저마다 지정된 행성으로 이동했다. 그런 그들의 주위에는 수천의 누에들이 마치 호위하듯 도열해 있었다.
“엄청나군…”
제대로 싸워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탓에 다소 실망스런 기색을 보이던 즈라탈은 자신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수천의 누에들을 보고는 질린 표정이 되어 버렸다. 하나하나가 자신이 타고 있는 범선 정도의 크기를 지닌 거대한 종족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래서였나.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하신 이유가…”
이 정도 군세라면 그저 몰려가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보는 이로서는 그 모습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형진의 안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준비.”
목표가 되는 행성에 도달하자, 스틱스의 상황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진의 입에서 그렇게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곧바로 규설과 힐리에타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손끝을 따라 행성 주위에 빠르게 그물처럼 촘촘한 위성망이 설치되었다.
“위성망 준비 완료 되었습니다.”
규설의 보고를 들은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미아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실행했다.
“결계 발동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행성 주위를 감싸고 있던 위성망은 일제히 황혼의 결계를 발동했다.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빛의 신의 의지로부터 행성을 단절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치인 셈이다.
“다음.”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형진의 입에서 다시 한번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아란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실행했다.
“밤의 권능을 발동합니다.”
순간, 위성들 주위로 새카만 먹구름 같은 것이 뭉클뭉클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순식간에 결계 내부에 존재하는 공간에 거대한 암흑을 선사했다. 단순히 결계로 감싸는 것을 넘어서, 행성 하나를 통째로 암흑 속에 묻어 버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던 세계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그곳에는 더 이상 태양도 달도 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그 짙은 어둠에, 그곳에서 살고 있던 종족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일이 말로 하느니, 직접 보여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빠르게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 법.
그들은 깨달았다. 빛의 신은 가고, 이제 밤의 신을 맞이할 때가 왔음을.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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