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6
-10896
아예 못 들었으면 모를까. 얘기를 듣게 되어 버린 터라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타이밍을 잡기가 영 힘들다. 그래서 문을 열다 말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의 기척을 알아챈 규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을 바라보고 섰다.
“엇! 자, 잠깐만요. 있다가 다시 연락할 게요.”
“응? 무슨…”
규설의 그런 행동을 보고 힐리에타 역시 화들짝 놀라며 통신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원래 그들의 능력이라면 문이 열린 시점에서 이미 알아차려야 옳지만, 이래저래 몸 상태가 영 메롱이다 보니 평소라면 당연한 일조차 쉽지가 않다.
“아, 아야야야…”
지금도 그렇다. 허둥대다가 어딘가 삐끗했는지 힐리에타가 울상을 짓자, 형진은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와 얼른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조심하지 않고. 어디 봐.”
“괘, 괜찮은데…”
“어서.”
“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힐리에타는 속으로 어쩐지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이런 식으로 자상하게 자신을 돌봐주는 상황을 얼마나 그려왔던가. 마침내 그 모든 몽상과 망상들이 현실로 다가왔으니, 아버지의 소망이야 어찌 되었든 실로 감개무량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규설은 피식 웃어 버렸다. 어쩐지 몸도 마음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힐리에타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저런 상태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어버린 것이다.
“자, 다 됐다.”
“감사합니다.”
“아란에게 들었겠지만, 몸 상태가 평소와는 다를 테니까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아.”
“네. 명심할게요.”
평소의 말괄량이 같은 모습은 어디 갔는지, 새색시 같은 모습으로 배시시 웃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형진의 표정에는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모처럼이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봐. 뭐든 만들어 줄게. 규설도 그렇게 있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힐리에타와는 달리 규설은 어쩐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물론 그녀 역시 살짝 부끄러운 기색이 서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냥… 신께서 만들어주시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래도, 뭔가 먹고 싶은 것 없어?”
“딱히 생각나는 게…”
그럴 만도 한 것이, 환수나 노스페라투 모두 본래는 인간처럼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만 하는 종족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형진의 음식이 반해 제자가 되기를 홍예의 대표자 소야 같은 이는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일단 간단하게 먹을 만한 걸로 만들어 볼게. 잠시만 기다려.”
“돕겠습니다.”
“괜찮으니까, 그냥 있어.”
“네…”
나름대로 제자 노릇을 했던 경험이 있는 규설이 도우려고 했지만, 형진은 그녀를 앉혀 두고는 주방으로 가서 후다닥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뭔가 뚝딱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절로 침샘을 자극하는 향기가 실내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아아…”
음식을 반드시 섭취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음식 맛을 모르는 건 아니다. 힐리에타는 은은하게 흘러넘치는 음식 냄새에 벌써부터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을 정도다.
그에 반해 규설은 자신을 위해 주방에서 요리에 전념하고 있는 형진의 뒷모습을 조금은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랄까. 사실 조금 전까지도 그녀는 어쩐지 지금 상황이 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저렇게 자기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는 형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내가 저 분의 짝이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많이 기다렸지. 자, 어서 먹자.”
“감사히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형진이 만들어 온 것은 유부 우동. 다만 일반적인 유부 우동과는 내용물이 조금 다르다. 유부 안에 속을 채워 넣어 만두처럼 만들어낸 유부 주머니라는 것이 얹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으으음!”
따끈한 우동 국물을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도 힐리에타는 이미 몸을 부르르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규설은 그런 힐리에타의 모습에 빙긋 웃고는 조금 넓적한 형태의 스푼에 국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아…”
맛있다. 하지만 단순히 맛있는 것을 넘어서,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다. 아직까지도 어쩐지 좀 몸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이 국물을 한 모금 먹고 나자 그런 느낌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뭔가 특별하네요.”
“그런가? 그렇게 느꼈다면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도.”
“…”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지. 말한 이는 빙그레 웃고만 있는데, 오히려 들은 사람의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만다.
그러나 농담처럼 들리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들이 이 음식을 평소보다 더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먹는 순간 심신의 안정을 느낀 것은 문자 그대로 그의 정성이 음식 안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들의 심신이 현재 불안정한 것은 갑작스럽게 너무나도 과도하게 신격과 접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현상을 유발한 신격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남자, 형진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새로운 반려가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다. 그녀들의 심신을 불안정하게 만들던, 그의 힘으로부터 유발된 여러 가지 현상들이 그 의지를 따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는 일이나 다름없었지만,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그 내막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걸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몹시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신이 안정을 찾아가자, 더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수면이라는 수단이 본능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죄송해요…”
“신경 쓰지마. 졸리면 자야지. 잠들 때까지 있어줄 테니까, 마음 놓고 푹 자.”
“감사합니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모처럼 자신들을 찾아준 형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가 잡아준 손을 꼭 잡은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모르긴 해도, 잠에서 깨어날 즈음에는 그녀들의 불안정해졌던 몸도 본래대로, 아니 훨씬 나은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다.
둘이 완전히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형진은 다시 빛의 신전에서 잡아온 포로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움직였다.
“어떻게 되었지?”
“예상하신 대로에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아란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긴다. 형진은 다가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안쪽의 모습을 살폈다.
“과연.”
영상이 눈앞에 나타나자, 형진은 빙긋 웃었다. 그가 바라던 모습이 그대로 방 안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개종 당한 자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다른 추종자들을 그런 그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쭈그려 앉은 자 주위에는 무언가 불에 그슬린 듯한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다른 추종자들이 강제 개종 당한 자를 공격했던 흔적인 듯 싶다.
“공격하던 장면의 영상은?”
“여기요.”
아란은 곧바로 형진에게 녹화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건…”
강제 개종 당한 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몸에서 통제 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밤의 기운을 느끼고는 곧바로 그에게 힐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제 개종 당한 자는 자신의 결백함을 항변했지만, 애초에 그런다고 해서 그의 몸에서 풀풀 풍겨 나오는 검은 밤의 기운이 사라질 리도 없는 일이다.
결국 논쟁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격분한 몇몇 추종자들이 그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강제 개종 당한 자는 그들의 공격에 털끝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강력한 보호의 권능이 그의 몸을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순히 공격을 받아들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신들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튕겨내는 모습을 보자 다른 추종자들 역시 격분해서 공격을 가했지만, 일개 추종자가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퍼붓는 공격 따위가 신이 직접 발현한 권능을 깨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고, 마침내 모든 기운을 소진하자 지금처럼 소 닭 보는 듯한 느낌으로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흠…”
가만히 영상을 지켜보며 빛의 신을 섬기는 추종자들의 공격 방식을 살피고 있던 형진은 문득 아란의 표정이 조금 어두운 것을 알아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그냥… 뭔가 기분이 좀 꺼림직해서.”
“뭔데? 짚이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구체적인 건 아니고요. 그냥, 저도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특별한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
같은 공포와 죽음의 아바타이긴 해도, 아란과 제랄딘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서 처음 보는 이들은 둘이 같은 신의 아바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미아나 리페가 외모를 제외하고는 본신과 성격 같은 면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고나 할까.
아란은 제랄딘보다 훨씬 차분하고 뭔가를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 쪽이다. 눈웃음을 지은 채 웃고 있으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운 쪽이라고 해야 하나.
이전에 형진이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런 아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기에 형진은 조금 걱정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느낌이 이상하다면, 일단 가서 쉬도록 해.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당신과 얘기를 하다 보니 금방 편해졌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아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다시 현재 방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요?”
“왜? 그냥 괴롭히는 것으로만 보여서?”
“그런 것도 있고. 오히려 당신에 대한 증오만 키워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형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증오든 뭐든,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더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저들은 이제 좀 더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단순히 신앙을 지키겠다. 유혹에 굴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외골수처럼 박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다고나 할까. 지금 보는 것처럼 저들 사이에 생긴 균열이, 또한 저들의 마음 속에도 만들어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하면, 비로소 내가 파고들 공간이 생기게 되는 거지.”
아란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악취미에요.”
“뭐… 당신은 좀 더 단호하고 간단한 쪽을 선호하는 편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저들 사이에 일어난 균열을 더욱 크게 확장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곧바로 방 안으로 드론 몇 대가 들어갔다. 각각의 드론에게는 한 사람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들려져 있었고, 그것들은 형진이 정한대로 방 안에 있는 자들에게 식사를 건네주었다.
“일전에 조사했던 자에게서 저 종족이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알아두었지. 하긴 뭐 딱 봐도 육식을 좋아하게 생긴 종족이긴 하지만.”
그 차이가 바로 지금 저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강제 개종을 당한 이에게는 보기만해도 군침이 절로 나오는 푸짐한 고기 요리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시들시들한 푸성귀 종류가 주어졌다.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차별이었고, 또한 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제 개종을 당한 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자들은 다시 한 번 분노를 폭발시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틈엔가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나 접근을 막고 있었고,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어둠이 밀려와 다른 이들을 집어 삼켜 버리기까지 했다.
“…”
강제 개종 당한 자는 그렇게 과거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이 어둠에 먹혀 버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우울한 표정으로 다리를 감싸 안은 채 웅크려 있기만 했다.
형진은 그것을 보며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어째서요?”
“그는 음식 그릇을 뒤집지도, 그렇다고 그것을 자신들의 동료에게 양보하지도 않았어. 어느 정도는 이미 음식 냄새에 현혹되어 있다는 얘기지. 우리는 이제 그의 인내가 서서히 바닥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돼.”
========== 작품 후기 ==========
세편째.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