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08
-10908
“인사하세요. 규설님과 힐리에타님이에요. 오늘 별궁으로 이사하는 걸 도와주실 거에요.”
저항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미아의 손아귀에 놀아나 열심히 잘 먹고 잘 자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상반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어김없이 음식을 가지고 온 미아가 새로운 인물을 네아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네아… 입니다.”
미아의 경우를 통해 겉모습과 실체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낀 터라, 가급적이면 최대한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다. 빛의 권능은커녕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연히 신들의 문제에 대들어 봐야 의미 없다는 식으로 네아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리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그건 어떻게 보면 신들의 행동을 접했을 때 평범한 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두 분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그이를 돕고 있어요. 상당히 유능하신 분들이에요.”
“그런가요.”
뭔가 애매한 말이다. 미아와 마찬가지로 밤의 신을 돕고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단순히 비서로서 일하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밖의 부분까지 의미하는 것인지 그 말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처음 보았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차림을 이 두 사람 역시 하고 있다는 정도다. 그의 일을 돕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입어야 하는, 일종의 제복인 걸까 싶은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오늘은 새로운 요리를 맛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에요.”
“…”
아… 또 시작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음식을 통한 고문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네아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일었다. 하나는 두려움, 그리고 또 하나는 기대감.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서로 맞물리며, 그녀의 허약해진 의지를 더욱 약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 맛이 없거나 괴악해서 고문이 아니다. 모처럼 단단하게 결심을 해도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니 네아의 입장에서는 정말 흉악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상태가 좋아진 것도 있지만, 평소보다 많이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서 더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준비를 했어요. 전복이랑 새우, 거기에 버섯이랑 여러 가지 야채를 넣은 죽이래요. 그이가 그러는데, 죽이나 미음 같은 것이 소화나 흡수에는 상당히 좋은 편이어도 계속 이런 음식만 먹는 건 좋지 않대요. 소화가 쉬운 것만 먹다보면 내장이 약해진다던가요. 게다가 씹지 않고 그냥 넘기는 버릇이 드는 것도 안 좋대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꼭꼭 씹어서 먹는 버릇을 들여야 해요. 만약 제 말을 잘 따라 준다면, 아주 좋은 선물을 하나 줄게요. 알았죠?”
“네…”
이미 반쯤은 저항을 포기한 상태이기도 하고, 이렇게 설명을 할 때의 미아는 외모 때문인지 묘하게 거부하기 어렵기도 하다. 평소에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감 선생님 같은 느낌의 외모가 이럴 때만 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네아는 사감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 해봐요.”
“아…”
규설과 힐리에타는 뒤에 물러 선 채로 미아가 포로를 아기 다루듯 하는 모습을 조금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형진을 아기 오리마냥 따라다니는 모습만 보여왔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를 챙겨주는 모습은 그녀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네아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할 틈도 없이 미아가 내미는 수저의 음식을 받아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 돼요. 꼭꼭 씹으라고 했죠?”
“죄송…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꼼짝 못하는 것은 상대가 여신이기 때문이다…
네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식은 다시 한 번 그녀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었다.
미음이라는 것도 충분히 맛이 있었지만, 사실 건더기 하나 없는 음식이 맛이 있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물론 그렇게 단조로운 음식이다 보니 조금은 내성이 생겨서 이제 어느 정도는 처음의 강렬한 느낌이 사그라들었나 싶었는데, 이제 그보다 훨씬 다채로운 맛과 식감을 지닌 음식이 등장해 버렸다.
이제는 두렵다. 아직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니까 그나마 이런 음식들만 나오는 거지, 만약 몸이 건강해지고 나면 얼마나 더 엄청난 음식이 눈앞에 차려질지, 이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지고 있었다. 만약 이것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나게 된다면, 그런 일이 생겨버린다면 네아는 더 이상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잠시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던 것이 거짓말처럼, 네아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죽 한 그릇을 다 비워버리고 말았다. 만약 미아가 옆에서 바라보며 꼭꼭 씹어 먹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그대로 후루룩 마셔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참 잘했어요. 어때요. 아주 맛있죠?”
“네…”
또 이런 수순인가. 네아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미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의 빈약한 인내심에 절망했다. 이렇게 쉽게, 고작 음식 따위에 굴복할 정도의 인내심 밖에 지니지 못한 이가 최고 장로에 올라 당연하다는 듯이 신도들을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물론, 형진의 음식이 고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미아는 발끈하며 화를 냈겠지만 말이다.
“말한대로 꼭꼭 씹어 먹었으니 상이에요.”
“이건…”
‘커스터드 푸딩이라는 음식이에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후식이에요. 자, 아 하세요.“
“…”
맙소사.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죽 한 그릇을 비우고서도 세상만사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버렸는데, 이제 또다시 새로운 음식이 눈앞에 나타나 버렸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 강 넘어 강, 바다 건너 바다다.
이제 조금 보스에 익숙해졌나 싶었더니, 그보다 더 강한 보스가 나오고, 간신히 그걸 넘어섰나 싶었더니 삼형제 중에 가장 강한 맏이가 튀어나오는 식이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이 과연 끝이겠는가 하는 점. 이런 식이라면 이 뒤에 또 뭐가 튀어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네아는 지금 이 순간 힘이 쭉 빠지는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여신님,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그만 괴롭히세요.
차마 말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어느 새인가 네아는 속으로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쿡!”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규설은 이제 완전히 경계심이 허물어져 그대로 드러나버리는 네아의 속마음을 읽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힐리에타가 넌지시 메시지로 물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치사하게. 너 자꾸 그럴래?] [정말로 치사한 건 누군데.] [내가 뭘.] [아까 보고하러 들어가서 한참이나 있다가 나왔던 것이 어디의 누구더라.] [그, 그건… 보고가 길어져서.] [거짓말을 하려면 입가에 묻은 그거나 좀 닦고 나서 하던가.] [헙!] [농담이야.] [너어!]규설과 힐리에타가 그렇게 뒤에서 메시지로 투닥거리고 있는 동안, 네아는 이제 완전히 맛이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져 넉다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 왜 울어요?”
“그, 그게… 죄송합니다.”
부드럽고 포동포동한 푸딩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는 순간, 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아, 끝장이다.
이런 맛을 알아버렸으니, 이제는 더 이상 항거할 방법이 없다.
맛에 감동한 것도 있지만, 더 이상 항거의 의지가 사라져 버린 상태의 자신이 또한 그렇게 눈물을 떨어뜨리도록 만들어 버린 셈이다.
미아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하긴. 가끔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있긴 해요. 그이의 음식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
그런가. 나만 이런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려고 해도 별로 위로가 안 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연이어서 음식이라는 수단을 통해 마지막 남은 저항의 의지까지 말끔하게 지워지고 나서야, 네아는 마침내 새로운 거처로 옮겨지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삿짐 차량에 짐을 챙겨 싣는다거나, 차를 타고 어디 먼 곳으로 간다거나 하는 식은 아니다. 등에 날개가 달린 네아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휠체어에 규설과 힐리에타가 그녀를 옮겨 싣고, 미아가 황혼의 성물로 경계를 열어 도착지까지 연결하는 것만으로 모든 준비가 끝나 버린다.
“아마 마음에 들 거에요.”
“네…”
조금은 허탈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던 네아는 그래도 오랜만에 빛을 쐴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 빛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이렇게 의지가 약해지고 인내심이 말라붙어 버린 것도 결국은 빛을 쐬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따뜻하면서도 나른한 오후의 그 햇빛을 다시 쐴 수만 있다면, 이런 자신의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네아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모처럼 자신의 품안으로 날아든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갑자기 빛을 쐬면 눈이 아플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네.”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조심스럽게 네아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며 경계선 안쪽으로 넘어갔다.
오늘 그녀들이 미아와 함께 한 것은 단순히 네아를 들어올려 휠체어에 태우고 그것을 밀어 경계선을 넘는, 이를테면 힘 쓸 일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만은 아니다. 형진의 비서이면서도 강력한 주시자인 그녀들의 힘을 통해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는 돌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동안은 밤의 권능으로 가득 채워진 방 안에만 있었으니 상관이 없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곳을 벗어나 빛으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가야만 한다. 아직 빛의 신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추종자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자세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이상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막상 경계선을 통과해, 은은한 석양이 바다 너머로 비치는 전망 좋은 테라스에 도착하자 네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게 되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에 감동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오래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의 신을 모시는 최고 장로인 그녀는 다른 신도나 추종자들과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빛의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이다. 빛의 신을 모시는 최고 직위의 인물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축복을 통해, 그렇지 않아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종족이라고 칭송받는 유익족 알마네아 중에서도 특히나 더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그러한 빛의 축복이 함께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내심을 읽은 규설이 조용한 목소리로 넌지시 일러주었다.
“미처 알지 못했나 보군요. 당신은 더 이상 빛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밤의 신께서 특별히 은총을 내리신 덕분에, 이미 밤의 신을 모시는 추종자로 개종된 상태입니다.”
“!”
규설의 말을 들은 네아는 반문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개종이라니. 자신은 그런 것을 원한 적이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또한 네아는 그것이 사실임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그랬다. 처음 미아를 봤을 때 느꼈던 묘한 동질감도, 이후에 그녀를 비롯해 여기 있는 규설이나 힐리에타를 봤을 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 안에서도 어둠 속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자신의 몸 안에 어떤 신의 권능이 담겨져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래놓고도 명색이 빛의 신을 섬기던 최고 장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네아님!”
네아는 자신을 부르는 미아의 외침을 들으며 아주 오랜 만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순간 그녀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