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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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추종자들 중에서 최고 직위에 있는 인물인데 겨우 이 정도에 정신을 잃다니.”
별장으로 옮겨지는 와중에 강제 개종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충격에 기절해 버린 네아의 모습에, 형진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유명인이다 보니 네아의 신분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에와 클로리스인들에게 그녀의 영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오직 빛의 신에게 봉사할 것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으니까.”
넌지시 건넨 아란의 말에 형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온실 속의 꽃에 불과했다는 얘긴가.”
그러자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리페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일개 추종자 주제에 신의 자리를 꿰차고 올라와 다른 모든 신들을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는 속 시커먼 누군가보다는 그래도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는데.”
명백히 자신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형진은 씩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꽉 움켜 잡았다.
“이렇게? 이렇게?”
“꺄앗! 그, 그만해! 무슨 짓이야! 꺄하하하하!”
옆구리를 마구 주물럭거리는 형진의 손길에 리페는 자지러질 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지켜보던 아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리페를 마음껏 농락하고 나서야 형진은 비로소 그녀를 간질이는 일을 멈추었다.
“으… 이 무엄한…”
“어허. 서방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더 혼내줘야 할까.”
“윽…”
형진은 뭐라 말도 못하고 눈물마저 찔끔 흘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리페의 모습에 키득거리며 녹초가 되어 버린 그녀를 다독이듯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네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지구인들이 봤다면 천사라고 해도 좋을 듯한 외모로군.”
“그런가요.”
“응. 가슴이 없어서 묘하게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
리페와 아란은 그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아의 모습을 보고 중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틱스 안에서 오직 형진뿐이 아닐까 싶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남편이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솔직히 그녀들로서도 헷갈리는 일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네아를 옮기는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미아와 규설, 힐리에타가 돌아왔다.
“수고했어.”
“별 말씀을요.”
말로만 그러는게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덕분에 차지하고 있던 무릎 위에서 밀려난 리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애 취급이냐며 투덜거렸지만, 막상 쓰담쓰담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하여튼 전부 물러 터졌다니까. 저러니까 이 변태가 더 기고만장해 하는 거라고.”
“알았어. 알았어. 자, 이리와. 리페도 쓰다듬어 줄 테니까.”
“됐거든!”
됐다면서도 다시 형진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 냉큼 다시 무릎을 차지하고 앉는다. 도무지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모양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알면서 더 그러는 건지 통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저렇게 혼자 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요.”
리페가 차지하고 남은 무릎 하나를 마저 차지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미아가 그렇게 말했다.
“혼자 안 두면?”
“그래도 환자인데… 아픈 동안 만이라도 시중을 들 사람 한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하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스스로 그 역할을 맡아보고 싶은 듯 했지만, 형진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환자 취급을 해주고는 있지만, 상대는 결국 포로야. 간병인이라도 해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갖춰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귀찮고 힘든 일을 할 정도의 인재를 겨우 포로 상대로 허비할 수는 없어.”
“그거야… 그렇지만.”
물론 적당한 인물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당장 주시자를 비롯한 형진이나 다른 여신들의 추종자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언제든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 중이고, 스스로는 좀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그들이 받드는 신의 지시라면 잠시 동안의 귀찮음이나 번거로움 정도는 대부분 수용할 수 있을 테니까. 정 안되면 누군가를 돌보고 간병하는 일에 특화된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보호의 권능을 부여한 뒤 투입해도 되는 일이다.
미아 역시 이런 사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달리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버렸다.
모처럼 미아가 의견을 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좀 미안했던 모양인지, 형진은 슬쩍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나저나,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뭘요?”
“신의 능력에 대한 거야. 이중에 적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라서.”
“제가요?”
형진의 말에 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녀는 신으로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단을 다시 만든 것도, 그 교단을 제대로 돌아가게 만든 것도 결국 형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니, 따지고 보면 그녀가 지닌 신으로서의 경험치는 여기 있는 다른 여신들에 비하면 결국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문득 미아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신의 능력에 관한 거라고 못을 박아 두긴 했지만, 적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형진의 말에 엉뚱한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떤 식으로 밤을 보내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형진과 했던 이런 저런 요런 일들이 적절한 경험이라는 말에 연상되어 버린다.
“변태.”
“…”
옆에서 지켜보던 리페가 은근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의미를 알아보고는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자, 미아는 어쩔 줄을 몰라 하기 시작한다.
부부는 닮기 마련이라지만, 이 경우에는 전염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크흠. 경험이라고 해서 그런 의미는 아니고.”
다른 아내들이 있는 앞에서 리페의 한 마디에 그렇게 묘한 분위기가 되어 버리자, 형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얼른 논란을 차단하고 나섰다.
“그럼 어떤 의미인데요?”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눈웃음을 지은 채 아란이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전에 미아가 토끼들을 강화시킨 일을 말하는 거야. 본래는 약하기 그지없던 초식 동물을, 상당히 강한 수준의 맹수로 끌어올려 놨잖아.”
지금에 와서는 다른 막강한 주시자들이나 종족들이 많아진 탓에 토끼들의 입지는 고작해야 아이들의 호위나 놀이 대상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다. 하지만 형진이 막 타나토스에 입성했을 당시만 해도 그는 산에 사는 토끼 한 마리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고, 여전히 대부분의 특별한 능력이나 무기가 없는 성인 남성보다는 토끼 쪽이 더 강한 수준이다. 괜히 맹수라고 불리었던 것이 아니라고나 할까. 더구나 필드 보스로 일컬어지던 미스틱 같은 녀석이라면 어지간한 집행자나 주시자도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수준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
“토끼들이요?”
조금 뜬금없게 느껴졌는지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형진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맞아. 이전까지야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했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런 식으로 종족을 강화한 사례가 상당히 많아 보여서 말이지.”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당장 열두 종족들 가운데 형진에게로 넘어온 클로리스인과 누에들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모르긴 해도 클로리스인이나 누에를 강화시킨 신의 능력이 지금의 형진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보호와 균형 역시 토끼를 강화시켰을 때와 지금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격차가 있다. 하나의 세계를 넘어 하나의 우주를 지배하고 다시 다른 우주로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는 지금의 형진이라면 충분히 그와 같은 일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형진의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형진이 지닌 힘이라면, 그런 식으로 거느린 추종자들이나 종족을 강화시켜 전력으로 삼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당장은 필요가 없더라도, 빛의 신과 벌이고 있는 전쟁이 격화되면 그런 능력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알아두는 편이 옳다.
“저도 오래 되어서 기억이 좀 가물거리기는 하는데… 달리 어떤 특별한 형식을 갖추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그저… 강하게 염원했다고 해야 하나요.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다는 느낌으로.”
“허.”
결국 종족의 강화는 그런 식으로 신이 강하게 염원했을 때 나타나는 기적의 한 종류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필요할 때 능력을 더하고 빼는 식으로 종족을 강화하는 식이 아니라.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건가. 그건 좀 곤란한데.”
사실 종족 개조라는 건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클로리스인들만 놓고 보더라도 그대로 두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후의 수단을 쓴 정도니까.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개체 수가 많은 종족이라면 그만큼 소모되는 힘의 절대량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토끼나 클로리스인들처럼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는 상황의 종족과, 수십억 수백억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종족에게 들어가는 힘의 크기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만약 그들이 신에 의해 일괄적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신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면 당장 수급되는 신앙이나 공헌도의 양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버린다. 더구나 지구인들처럼 아직 대다수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신이 있음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사회 자체에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종족 개조라는 것은 그런 모든 점을 감안하고, 후폭풍까지 고려해서 면밀한 검토와 함께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안인 셈이다.
“음… 그럼 연습을 좀 해볼까요?”
“연습?”
“네. 생각해 봤는데, 토끼들을 좀 더 강하게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금 같은 때에 시중을 드는 역할로 그 아이들을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전처럼 힘을 모조리 쏟아 부어버리는 건 곤란한데.”
현재 보호와 균형이 지닌 힘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누에들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그녀의 힘은 아직 클로리스인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꽃과 바람보다도 훨씬 막강해서 단일 교단으로는 최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 정도 힘을 토끼들에게 퍼부었다가는, 자칫 티폰급의 우주 괴수 종족이 탄생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에요. 그런 식의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확실히, 일리가 있는 얘기군.”
만약 미아의 시도가 성공해서 자유자재로 능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면, 누에나 티폰처럼 당장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환수나 노스페라투 같은 전력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 수 있다.
“좋아. 한번 해보자. 나도 돕도록 하지.”
“네! 맡겨 주세요!”
미아는 단순히 형진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아란과 리페의 시선은 어딘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분명히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입은 웃지 않고 있는 아란이라든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형진의 내심을 꿰뚫어보려는 듯이 쏘아보는 리페의 모습이라니. 그런가 보다 하며 신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규설과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왜 그래? 그런 눈으로.”
“흐응.”
아란은 대답이 없었지만 리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콧소리를 냈다.
“글쎄. 왜 그럴까. 왜 우리가 이런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걸까.”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형진이 묻자 리페는 오히려 반문했다.
“우리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속셈? 무슨?”
“시치미 떼긴.”
리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영상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쟤한테 가슴 달아주려고 그러는 거지?”
========== 작품 후기 ==========
숙제는 미리미리.
세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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