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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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체는 단순했지만, 왕성은 형진이나 그의 가족을 비롯해서 신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장소다. 그렇지 않아도 형진에게 찍혀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인 누에 공주들로서는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기에 어디서 그렇게 체력들이 샘솟는지 전력으로 웃고 떠들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니, 제아무리 강인한 신체를 가진 누에들이라 해도 일이 끝날 무렵에는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다.
“아직 익숙하지 않을텐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해 주어서 고마워요. 당직만 남고 나머지는 가서 쉬어도 좋아요.”
“수고하셨습니다.”
낮에 신나게 뛰어 놀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밤이 되면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잠이 들게 마련이지만, 아직 젖먹이이거나 태생 자체가 야행성인 종족이라면 밤에도 일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원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밤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때문에 누에 공주들은 3명씩 순서대로 야간 당직까지 서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환수들이라든가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중요한 일은 거의 처리하고 누에 공주들은 그들을 돕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피곤한건 마찬가지다.
“이건 역시 벌이 맞는 것 같아.”
“할 수 없지. 밤의 신께서 이런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열 명 정도의 개체가 이런 일을 하는 정도라면 별로 무거운 벌도 아니다. 그 정도라면 딱히 희생이라고 할 필요도 없을 정도랄까.
다음 날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도 휴식은 충분히 취해둬야만 하므로 누에 공주들은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가 무섭게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 죽은 듯이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일찍.
“후후후, 후후후후…”
누군가가 그렇게 작게 웃으며 그들의 숙소를 침입했다.
물론 누에 공주들로서는 그런 일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밤의 신과 그의 가족들이 머무는 왕성 안에서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방마다 강력한 보안 설비가 갖춰져서 침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만든 당사자가 아닌 이상.
침입자는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누에 공주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듯한 모습으로 잠시 바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곤히 잠들어 있는 누에 공주의 침대 시트를 잡고는 그대로 확 뒤집어 버렸다.
“언능 못 일어나!”
“?”
누에 공주는 불의의 기습에 성대하다 싶을 정도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곤하게 자고 있던 그녀는 비명이라고 하기도 아리송하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뭔가 미묘한 소리를 내며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와 그녀의 동족들은 왕성에서 벌어질 수많은 사건에 대한 가능성을 상정해 둔 상태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자다가 갑자기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태를 예상한 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했고, 또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생명체들과는 달리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겹눈을 가진 누에 공주지만, 그녀가 어쩔 줄 모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기색에 침입자는 격한 감동을 느꼈다.
아, 도대체 얼마 만에 해보는 시트 뒤집기란 말인가.
이전의 대상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라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바람에, 형진은 아주 오랫동안 시트 뒤집기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부인이 될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언제든지 시트 뒤집기를 할 수 있는 메이드가 열 명이나 생겼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쾌감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눈빛을! 언제나 마음 속에서 그것을 바라고 있음에도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있던 금단의 영역을 해방시킨 형진에게 있어, 이제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크으…”
“…”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한 감격에 몸을 떠는, 자신을 침대에서 떨어뜨린 침입자이며 이 왕성의 주인이자 전 우주를 아우르는 주신의 지위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며 누에 공주는 자신이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연결된 사고를 통해 상황을 이해한 다른 누에들도 도저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사태를 유발했으며 또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째서인지 격한 감격에 몸을 떨다가, 또한 어째서인지 지금껏 비어있던 무언가를 채우고 충만해진 듯한 눈빛을 한 채 누에 공주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지고는 방을 빠져 나갔다.
“고맙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
뭔 소리야.
모르겠다, 이 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해불가다.
지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격렬하게 묻고 싶은 충동에 절로 휩싸이고 만다. 할 수만 있다면 멱살을 잡고 이 상황을 설명하라고 윽박지르고 싶다.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는 무려 밤의 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명백하게 자신들이 섬겨야하는 신의 지위에 있는 자이다.
누에 공주는, 그리고 그녀의 사고와 연결된 다른 수많은 누에들은 그렇게 혼란에 빠진 채 잠시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아침나절부터 하나의 종족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형진은 가뿐하면서도 홀가분하고 또한 지금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충만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용히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현숙한 아내가 있었다.
“좋아 보여요.”
“그런가.”
유아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드디어 뭔가가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아무 말 없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마치고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형진은 유아를 끌어당겨 그녀를 가만히 품에 안고는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배불리 먹고 곤하게 잠이 들어 있는 달이 녀석에게 손을 뻗어 가만히 이마를 쓰다듬어 주고는 조용히 방에서 빠져 나왔다.
방 밖에는 스틱스에서와는 달리 여비서다운 정장을 갖춰 입은 규설과 힐리에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네.”
다른 아내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면밀하게 준비되어 왔던 일이고, 이제 남은 일은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일뿐이다.
불안해 할 것도 없고, 걱정할 일도 없다. 그저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갔다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한아름 가지고 돌아오면 그 뿐이다.
스틱스로 넘어가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세 여신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휴. 저 변태를 어쩌면 좋아.”
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형진이 상황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리페가 그렇게 투덜거렸고, 아란과 미아는 작게 웃었다.
“크흠. 준비는 모두 끝났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자 곧바로 미아가 대답했다.
“네.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우선 상황도부터.”
“상황도를 엽니다.”
규설의 대답과 함께 상황실 내부에 간략하게 도식화한 상황도가 펼쳐진다. 물론 간략하게라고 표현은 했지만 적과 아군의 현황은 물론이고 점령지역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연결은?”
“완료되었습니다. 언제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 전 군세 기동.”
“전 군세, 예정된 작전 목표를 향해 기동을 시작합니다.”
힐리에타의 말이 이어지자 서로 수천수만 광년 떨어져 있는 각각의 군세들이 일사분란하게 사전에 지정된 목표를 향해 기동을 시작한다. 지구와 앙그릴에서 만들어진 함선은 물론이고, 클로리스의 보급선이나 누에의 둥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된 티폰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함대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보인다.
상황도에서 보이는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느릿하지만, 실제로는 행성 단위의 천체를 빠르게 주파할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단지 그들이 존재하는 우주가 너무 넓어서 마치 굼벵이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느릿하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적이 공세를 가해올 때만 대응하고 가급적 현재 장악하고 있는 거점을 지키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의 군세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하자 빛의 군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적 함대에 탑승한 자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수없이 사방에 깔린 위성들을 통해 들어오는 적의 움직임은 통일되지 못한 채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물자가 떨어져서 반쯤은 포기 상태에 있던 몇몇 지점의 군세들은 상대가 자신들을 압박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서 진세를 굳힌 채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형진은 어느 시점이 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네아. 준비 됐나.”
그러자 한쪽에 다소곳하면서도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가득한 모습으로 하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네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의 신이시여.”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있었지만, 또한 그녀의 모습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전에 빛의 신을 자신의 몸 안에 강림시켰을 때와는 또 다른, 막중한 책임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던 간에, 결국 선택은 저들의 몫이니까. 그들의 선택은 오로지 그들의 몫. 네 책임이 아니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형진과의 대화가 끝나자 네아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신은 앞으로의 일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을 희생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빛의 신을 향한 날카로운 비수.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의미 없이 사라져 갈 수도 있는 다른 수많은 생명들을 구하기 위한 비수이기도 하다.
“후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짝이는 일곱 쌍의 날개로부터 빛이 가루처럼 흩날려 주위를 밝힌다. 이미 밤의 신에게 속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아니 본래 빛의 신에게 속해있을 때보다 훨씬 그녀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네아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이전에 대성전의 최고 장로 자리에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는 더욱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부담과 설레임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들에 휩싸인 채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단상에 올라서자 사방에서 빛이 날아들어 그녀를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곧바로 인공위성으로 구성된 수많은 통신망을 거쳐 빛의 신이 지배하던 우주 각지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저건…”
“서, 설마… 대성전의 바로 그…”
“네아님이다. 네아님이다!”
어떻게 보면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빛의 신전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 빛의 신 그 자체보다도 대성전의 최고 장로인 그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신의 모습을 본따 새긴 성상조차 없는 빛의 신보다, 그녀의 존재야 말로 빛의 신전을 대표하는 모습인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그녀 자체를 빛의 신이 현신한 모습으로 여기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종교의 지도자가 신과 일체화되어 숭배되는 경우는 의외로 꽤 흔하다. 단순히 사이비 종교에 국한된 얘기도 아니다. 더구나 그녀처럼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면, 그래서 현세와는 어쩐지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런 숭배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런 그녀가 거대한 전투가 벌어지려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우주 전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던 자들조차 놀랄 정도로, 더욱더 아름답고 신비하게 빛나는 모습을 한 채.
그녀는 가만히 그 모두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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