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231)
어느덧 예비군훈련 입소 날이 다가왔다.
나와 택규는 결연한 마음으로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군복을 꺼내 입었다. 예비군훈련 가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가기 싫다.
그래도 얘랑 같이 가서 다행이다.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
택규는 군복이 좀 헐렁해보였다.
“살이 좀 빠졌나?”
“그러고 보니…….”
매일 봐서 못 느꼈는데,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빠진 것 같다.
엘리는 오전 반차까지 쓰며 우리를 훈련장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와아! 둘 다 군복 입으니 멋있는데요.”
난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럴 리가요.”
신기하게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라도 군복만 입으면 바보처럼 보인다. 예비군마크가 붙어 있으면 더더욱.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프레의 안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난 엘리에게 말했다.
“우리끼리 가도 되는데.”
“한국에서는 군대에 입대할 때 여자친구가 배웅해주는 거라고 하잖아요.”
“입대가 아니라 입소예요.”
누가 들으면 재입대하는 줄.
우리는 차에 올라탔고, 엘리는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예비군훈련까지는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난 가면서 어머니와 통화했다.
[가면 몸조심하고. 사고 치지 말고.]“걱정 마세요. 그냥 잠깐 다녀오는 건데요.”
[그래도 항상 조심해. 알았지?]“예, 알았어요.”
생각해 보면, 유명 연예인이든 재벌3세든 군대를 갔다 왔다면 예비군 징집대상이다. 그 사람들도 다 훈련을 가겠지?
전화를 끊자 엘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예비군훈련장에서 총기사고가 있지 않았어요?”
“그랬었죠.”
한 예비군이 사격 도중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한 다음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범인을 포함해 세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중상을 입었다.
예비군훈련장이 이렇게 위험한 곳이다.
택규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안 그래도 얘 입소한다고 철저하게 대비했대요.”
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관심병사도 아니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난 입대 초기에 관심병사였다. 딱히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입대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결손가정이면 관심병사로 분류된다)
“가면 고문관 취급 받는 거 아니야?”
“시끄러.”
엘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관심병사면 관심 받는 거니 좋지 않나요? 고문관도 높은 직책이고.”
“…….”
맞는 말이긴 한데, 군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인다.
엘리는 궁금한지 이것저것 질문했다.
“군대에서는 매일 총 쏘고, 총검술 하는 거예요?”
“뭐, 안 하는 건 아닌데…….”
그런 건 훈련소에서나 하지, 자대배치 받은 후로는 거의 안 한다.
가장 많이 하는 건 삽질이고, 보직에 따라서는 총 한 번 제대로 쏴보지 않고 전역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행정병이나 취사병이 총 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이것도 부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괜히 의욕 넘치는 대대장이나 중대장을 만나면 골치가 아파지지.
“훈련비는 얼마나 줘요?”
“동미참은 13000원일걸요.”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8시간씩 훈련 받는다고 하면 하루 10만4천 원이니, 좀 적긴 하네요. 더 많이 줘도 될 것 같은데.”
“음…….”
외국인이라 그런지, 한국군대에 대해 대단히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아니, 시급이 13000원이 아니라 하루에 13000원 준다구요.”
내 말에 엘리는 웃음을 지었다.
“에이, 농담하지 말아요.”
그러자 택규가 말했다.
“그나마 이것도 식비와 교통비 포함이에요.”
엘리는 깜짝 놀랐다.
“마, 말도 안 돼요. 한국 정도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치킨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을 주며 훈련을 시킬 리가…….”
“한국에서 군인 시급이라고 해봐야 교도소에서 노역하는 죄수들보다도 못하죠.”
택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북한군보다는 많이 주지 않나?”
* * *
예비군을 실은 차와 버스가 줄줄이 연병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난 엘리와 가볍게 키스했다.
“히잉, 보고 싶으면 어떡해요?”
“여섯시면 퇴근이잖아요.”
이게 동미참훈련의 장점이지.
“그래두요.”
“끝나면 전화할게요.”
“조심히 다녀와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훈련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슨 연예인 군입대하는 것도 아닌데, 앞에는 취재진들까지 몰려 있었다.
최대한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가려는데, 취재진들이 앞을 가로막고 마이크를 내밀었다.
생각해 보니, 군복에 이름이 박혀있구나…….
“어떤 각오로 예비군훈련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 총기사고가 있었는데 걱정되진 않습니까?”
“최근 문제가 된 군납비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향후 방위산업 투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이게 대체 뭔 질문이야?
난 카메라를 보며 짧게 한마디 했다.
“열심히 훈련받겠습니다.”
연병장 안에는 이미 예비군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입대했을 때가 떠오른다.
예비군들은 날 보고는 신기해했다.
“와아! 강진후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진짜 왔네.”
“여기서 강진후를 보게 될 줄이야.”
“대박이다.”
내 인기가 이 정도라니.
주위에 있던 예비군들은 어려워하면서도 슬쩍 인사를 건넸다. 난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는 사이 입소식이 시작되었다.
대대장은 단상에 서서 말했다.
“본 대대장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모인 예비군 장병 여러분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택규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대체 왜 자기를 3인칭으로 칭하는 거야? 저게 ‘택규는 너무 기뻐요’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달라?”
“그러게 말이다.”
우리 부대 중대장도 ‘본 중대장은 너희에게 매우 실망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본 병사’도 중대장에게 매우 실망했지. 덤으로 손발도 오그라들었고.
신병이라면 각 잡고 부동자세로 서있겠지만, 예비군들은 대대장이 뭐라고 하든 말든 짝다리를 한 채 하품을 했다.
입소식이 끝나고 나자 훈련장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예비군훈련이 시작되었다.
“분대장조! 고지를 향해 돌격!”
예비군훈련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훈련도 견학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느낌이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생업을 내팽개치고 모인 예비군들은 마치 일주일은 굶은 것 같은 힘겨운 모습으로 움직였다.
고난의 행군 시절의 북한군이나 대장정 막바지의 홍군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선배님들! 조금만 빨리 뜁니다!”
“총 바닥에 끌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는 분명 CEO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방탄모와 군장을 차고 M16을 들고 있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옆에서 택규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멀리서 국가가 날 부르고 있어…….”
얜 아주 신났네.
택규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각개전투도 간만에 하니까 재밌지 않아?”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이게 재밌냐? 재밌어?”
“응. FPS게임하는 것 같고 좋잖아.”
“…….”
대체 국가는 뭐한 거냐? 이런 놈 현역으로 안 데려가고.
이 자식은 공익이라 4주 훈련받고 끝났으니 재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현역이라 군 생활 내내 이 짓거리했다.
하필 군번이 꼬인 데다가 쓸데없이 의욕이 충만한 대대장을 만나는 바람에 유격, 혹한기, 전술훈련 등 돌아가면서 다 받았다.
예비군들의 체력과 사기가 지각을 뚫고 내핵까지 도달하는 관계로 훈련은 결국 우수조교의 시범을 보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휴식시간이 되자 다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떠들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뺑이 쳤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대체 예비군훈련은 왜 하는 거야?”
“이게 다 똥별들 때문이지. 별 숫자 유지하려면 예비군이 있어야 하니까.”
“걔들이 진짜 고문관이야. 예전에 투스타가 와이프랑 같이 공관병한테 갑질하다 걸린 일도 있었잖아.”
“그런 새끼들 월급 줄 돈으로 훈련비나 좀 올려줄 것이지.”
“에이, 더러운 세상!”
한 예비군이 나에게 다가와 슬쩍 담배를 내밀었다.
“회장님도 한 대 피시죠.”
“괜찮아요. 담배 안 피워서요.”
“나중에 사인 한 장 해주시면 안 돼요?”
“안 될 거 없죠.”
처음에는 나를 좀 어려워하는 것 같더니, 이내 신기하다는 듯 이것저것 물어봤고, 나도 웬만한 건 대답해주었다. 며칠 같이 훈련받아야 하는데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청년이 허리를 붙잡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허리가 좀 안 좋은데. 의무대에 가봐야 하나?”
그러자 아까부터 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실없는 농담을 하던 사람이 말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며칠 전부터 허리 왼쪽이 쿡쿡 쑤셔요.”
“옷 올려 봐요. 제가 한 번 봐드릴게요
“아저씨가요?”
“저 신라대학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입니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오! 정말요?”
“아아, 의사셨구나.”
의사도 군복 입고 예비군훈련 오면 다 똑같아 보이기 마련이지.
다들 열심히 쉬고 있는데, 조교가 다가와 말했다.
“선배님들! 휴식 끝났습니다!”
그러자 다들 드러누워 엄살을 부렸다.
“나 발목을 삐끗한 것 같은데.”
“윽!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어.”
“난 두통이 좀.”
“나 어깨 빠졌어. 팔 덜렁거리는 거 보여, 안 보여?”
“당장 119에 전화해서 나 좀 실어가라고 해.”
누가 예비군훈련장 아니랄까봐 멀쩡한 사람도 환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환자를 멀쩡한 사람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점심식사 시간입니다!”
그러자 아파 못 일어나겠다던 예비군들은 전원 벌떡 일어났다.
“뭐하나, 조교?”
“밥 먹으러 가즈아!”
* * *
첫날 훈련이 끝난 뒤.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매일 회사에서 일하다가 예비군훈련을 다녀오니 캠핑 갔다온 것 같은 기분이 들…… 기는 개뿔.
현역으로 개고생 했으면 됐지, 전역 후에도 이 짓이라니!
내일도 이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좋게 생각해.”
“싫어.”
그러자 택규가 말했다.
“차가운 감방에 누워 널 원망하고 계실 각하를 생각해봐. 그에 비하면 넌 행복한 거야.”
“…….”
여기서 각하가 왜 나와?
다음 날.
우리는 또 다시 예비군훈련을 받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했다.
구급법을 교육 중인 가운데, 예비군들은 하품을 하거나 졸았다. 나도 졸고 싶었으나 주위에 보는 눈이 많은 관계로 열심히 듣는 척했다.
“먼저 부상자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병인 조교는 더미를 앞에 놓고 심폐소생술 시범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폭발, 연기, 화약 냄새, 다리를 붙잡은 채 절규하던 병사…….
훈련이 끝난 뒤 난 박격포병으로 배치 받았다. 내 사수는 갓 진급한 상병이었다.
이름은 김재학.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안 가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전역 후 돈 벌어서 자기 가게를 차리는 꿈이라고 했다.
군대만큼 사람 본성이 잘 드러나는 곳도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재학 병장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랑은 죽이 잘 맞기도 했고.
그런데 전역을 세 달 정도 앞둔 상황에서 문제가 터졌다.
박격포 사격훈련을 하던 도중 신형 박격포가 폭발한 것이다.
그 순간, 눈앞에 뜬 예지 덕분에 난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덕분에 귀가 안 들리는 것만 빼면 멀쩡했다.
하지만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김재학 병장은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는 처참했다.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난 군병원에서 퇴원해 자대로 돌아온 뒤, 김재학 병장이 오른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고 의병전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역 후에도 자주 보자고 했었는데…….
언제 한 번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역 당일부터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