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297)
내가 멀쩡하게 퇴원하자 몇몇 언론들은 크게 아쉬워하는 듯했다. 부고 발표라도 있기를 바랐던건가?
그런데 정작 다른 곳에서 부고가 들려왔다.
[(긴급) 한민구 전 회장 별세!) [(속보) 은성차 전 회장 한민구 오늘 오전 7시 병세가 악화돼 숨을 거둬] [은성차그룹 충격에 휩싸여!] [유언장은 비공개로……] [장례는 은성병원에서 치러질 예정]은성그룹 창업주 한영주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한민구는 형제들끼리 경영권분쟁이 생기자, 은성그룹에서 은성차를 분리시켜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후 품질을 끌어올리고수출을 확대해, 은성차를 은성MD, 은성제철, 은성RT, 글로마스, 리노션 등을 거느린 재계 2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가 한국 자동차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차로의 전환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으로 평가받았다.
한민구 회장은 에어백 결함 은폐 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이후 공식석상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인은 뇌종양. 오래전부터 병을앓고 있었고, 얼마 전부터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난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투병중이었던 건가?
한국 자동차산업을 이끌어온 거인의 죽음에 정계와 재계는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대부분의 재벌들이 그러하듯 공도 크고 과도 크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대체로 좋은 얘기만 하기 마련.
은성차 본사를 포함한 곳곳에 분향소가 차려졌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는 고인이 마지막으로 입원해있던 은성병원에 차려졌다.
택규가 물었다.
“조문 갈 거야?”
“가야겠지.”
이미 재계와 정계의 조문이 이어지는 중이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카로스와 은성차가 협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
왠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이 망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은성차 때문. 당시 회장이었던 한민구가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책임이 없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은성차에게서 카로스를 인수해 은성차를 뛰어넘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반면 은성차는 야심차게 추진했던 수소차 실패 등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은성차를 살린 것은 카로스였다. 숱한 악재로 폭락하던 은성차 주가는 카로스와 손을 잡은 이후 반등에 성공했다. 그래도 아직 전 고점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은성차는 카로스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고, 카로스는 은성차의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수백만 대의 생산력과 전 세계 판매망, 그리고 재고관리와 AS 등의 노하우 등등.
카로스는 은성차 외에 다른 파트너를 찾아도 되지만, 은성차에게는 카로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합작해서 만드는 전기차 산업단지 역시 카로스의 기술이 중심이다.
기술의존도가 심한 만큼 은성차는 카로스에종속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한민구 회장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 * *
임일권 회장에 이어 한민구 회장의 죽음은 그동안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재벌 2세들의 퇴장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남아 있는 이들 역시 대부분 승계 작업을 진행 중이거나, 이미 마무리를 지었다.
난 밤 12시가 넘어 택규와 함께 빈소로 향했다. 미리 간다고 얘기를 전해놨기 때문인지, 늦은 시간임에도 상주인 한찬영 회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덩치가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좀 작아 보인다. 이런 게 시각의 차이겠지.
우리는 조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육개장을 먹었다.
택규는 소주와 맥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로 할래?”
“소주로 하자.”
우리는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다 먹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한찬영 회장이 다가와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대표님께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것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뜯어보았다.
[강진후 대표님께.먼저 강동현 사장님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잘못이고,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은퇴 이후 그동안의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은성차와 한국 자동차산업을 여기까지 성장시켰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역할이 끝났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었던 것은 노욕이었겠지요.
한국 자동차는 절대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의 일은 전부 강진후 대표님께 달려있습니다.]
* * *
난 거실에 앉아 홀로 맥주를 마셨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다. 내 연락을 받은 엘리는 호텔에서 바로 차를 몰고 달려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혼자 마시기 심심해서요.”
“괜찮아요. 택규는요?”
“자고 있어요.”
“또 맥주네요. 와인셀러에 좋은 와인도 많은데.”
주방 한쪽에 있는 와인셀러에는 병당 수백만 원이 넘어가는 와인들이 주르륵 꽂혀있다. 대부분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이다.
술의 종착지는 와인이라고 하던데, 아직은 와인 맛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달라지려나?
나와는 달리 엘리는 와인을 즐겨 마신다.
“와인 한 병 꺼낼까요?”
“아니요. 오늘은 저도 맥주로 할래요.”
엘리는 내 옆에 앉아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냥 어렸을 때 생각이요. 그때는 제가 CEO가 되고 이렇게 돈을 벌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지금 재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예지가 보였고, 투자를 하다 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다.
수백 조니, 세계 1위의 부자니 해도 딱히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그게 당장 현금으로 쥐어진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쓴다 해도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진후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어렸을 때요? 음, 그냥 뭐…….”
엘리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뭔데요? 어서 말해줘요.”
“듣고 웃으면 안 돼요.”
“안 웃을게요. 약속해요.”
“경제학자였어요.”
엘리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 빛냈다.
“경제학자요? 어째서 어렸을 때 그런 꿈을 갖게 된거예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난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어른들이 항상 경제가 힘들다, 어렵다, 복잡하다 말하잖아요. 그걸 알아내서 분석하는 모습이 멋있어서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같은 개념이 신기하기도 했고, 경제학자가 돼서 강의도 해보고 싶었고. 뭐, 나중에는 아버지 사업 물려받는 것으로 바뀌었지만요.”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후는 경제학자가 됐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만약 그랬으면, 노벨경제학상 받았을 수도 있겠는데요.”
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준다면 사양하진 않았겠죠.”
엄밀히 말해 진짜 노벨상은 아니지만, 그게 어디인가?
아무래도 서구권의 경제학이 더 발달돼있고,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많이 주다보니, 수상자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인이다.
아시아인이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이다.
난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엘리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음, 비밀이에요.”
이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전 말했잖아요. 어서 말해 봐요.”
엘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발레리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발레리나요? 발레 배운 적 있어요?”
“원래 여자애들은 어렸을 때 한 번씩 배워요.”
남자애들이 어렸을 때 태권도장 다니는 것과 비슷한 건가? 어쩐지 몸이 유연하다 싶었는데, 이런 비밀이숨어 있었을줄이야.
“언제 그만뒀어요?왜 그만둔거예요?”
“저보다 잘하고 열심히 하는 애들이 많았거든요. 열두세 살쯤에는 체형도 변하기 시작했고.”
“체형 변화라면?”
자연히 특정 부위로 시선이 향했다.
그러자 엘리는 눈을 흘겼다.
“지금 어디를 보는 거예요?”
“아,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하고 싶은 것들도 많이 생겼어요. 운동도 공부도.”
“다른 꿈을 찾아가게 된 거네요.”
“맞아요. 지금도 발레공연 보는 거 좋아해요. 가끔 무대에 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그만둬서 다행이네요
“어째서요?”
“만약 발레리나가 됐다면, 못 만났을 테니까요.”
엘리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건 모를 일이죠. 진후가 경제학자가 되고 제가 발레리나가 됐어도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고 보니 21세기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와 결혼했다. 아이는 없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엘리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뭘 고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요. 언젠가는 다들 진후의 진심을 알아 줄 테니까요.”
어떤 일은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처럼, 큰돈에도 큰 책임이 따른다. 내가 큰 재산을 갖게 된 이상, 책임 역시 같이 떠안게 된 셈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책임은 계속 따라다닌다.
그래서 한민구 회장이 나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거겠지.
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요.”
내일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 * *
회사에 출근한 나는 상엽 선배에게 말했다.
“사흘 후에 청와대에서 기업인 간담회 한다고 했죠?”
“응. 명단 다 나왔어.”
상엽 선배도 K컴퍼니 대표로서 참가한다.
K컴퍼니 규모가 커졌다지만, 10대 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초청명단에 포함된 건 나를 대신해 불렀다고 봐야겠지.
“저도 참석 가능한지 한 번 물어봐주세요.”
내 말에 상엽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
“예. 한 번 참석해보게요.”
“알았어. 바로 얘기해볼게.”
택규가 물었다.
“그런데 기업인 간담회 같은 건 왜 하는 거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지.”
대통령은 기업인들에게 투자를 독려하고, 기업인은 그에 호응해 투자를 약속한다. 당연하지만, 없던 투자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고, 원래 시행할 예정이었던 투자를 최대한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담회는 경제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정치인들과 그에 호응하는 기업인들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인 것이다.
“일종의 가면무도회 같은 거지.”
뭐, 생각해보면 무도회도 정치행위의 일환이다. 괜히 귀족들이 돈 써가면서 파티했던 게 아니지.
택규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흐음, 가면무도회라. 가이포크스 가면 쓰고 가도 되나?”
“……되겠냐?”
청와대 폭파시키러 왔다고 오해 받을 일 있어?
* * *
이미 참석자 명단이 정해진 만큼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바로 강진후의 이름을 추가했다.
일반적인 재벌들이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그동안 강진후는 정치권과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대통령이 주최하는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언론에서는 참석목적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자유국민당 의원들은 불쾌감을 표했고, 마상태 의원이 대표로 나서 호통을 치듯 말했다.
“강진후 하나 때문에 이미 결정된 참석 명단을 수정한다는 것은 이 정권이 얼마나 재벌들 눈치를 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정부가 싹싹 빌어서 모셔오는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겠습니까? 정부는 원칙과 절차를 지켜야지, 인기에 영합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 재벌들과 밥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민경제는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 마상태 의원님 또 코마상태네ㅜㅜ
-아직도 입원 안 하셨나?
-자유국민당 지지자로서 말한다. 보수의 부활을 위해서 이정혜와 마상태를 새정치당으로 보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마상태 의원님 댁 근처에 한방병원 하나 놓아드려야겠어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 강진후 하나 때문에 명단 수정이 말이 되나?
-박시형 대통령일 때는 청와대 근처에도 안 가더니, 좌파 대통령되니 바로 달려가네.
-쯧쯧, 좌파본성 어디 가겠냐?
-아니, 불러줘야지 가지. 안 불러줬는데 어떻게 가?
-청와대에 불쑥 찾아가면, 문 열어주는 줄 아나보네ㅋㅋㅋ
-근데 허창민은 왜 만나는 거야? 강진후가 아쉬운 소리할 게 있나?
-까놓고 지금 강진후가 한국 대통령이랑 놀 레벨은 아니지.
-맞아. 로날드 정도는 돼야 격이 맞지 않겠어?
-강진후 많이 컸네.
-지금 위치였다면, 박시형도 감히 못 건드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