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25)
도착한 다음 날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엘리는 래쉬가드를 입은 채 서핑보드를 타거나 해변가를 걸었고, 카메라와 드론은 그 모습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았다.
광고는 총 세 가지 버전.
다 합쳐봐야 5분 정도지만, 하나 촬영하는 데도 몇 시간이 기본이다. 야외촬영이라 햇빛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촬영은 이틀에 걸쳐 이뤄졌다.
그 사이 우리는 느긋하게 휴가를 즐겼다.
헨리와 현주 누나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고, 어머니는 건이와 놀아주거나 마사지를 받았다.
택규는 선글라스를 낀 채 썬베드에 누워서 모히또를 마셨다.
“몰디브 오면 모히또 아니겠어? 아! 취한다.”
“그거 무알콜 아니야?”
“기분만 내는 거지, 기분만.”
“…….”
성공한 오타쿠의 롤모델 같은 모습이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데 오니 좋네.”
날씨가 사람 기분에 미치는 영향은 꽤 크다. 밝고 따뜻하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행복해진다. 반대로 날씨가 흐리고 추운 북유럽에서는 위도가 낮은 지역에 비해 우울증 발병률과 자살률이 높다.
난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돈 벌길 잘했네.”
* * *
나는 엘리와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스쿠버다이빙을 즐겼다. 제주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닷물이 맑고 투명했다.
물속에서는 산호 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그 외에도 스노클링, 패들보트,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패러세일링 등 즐길 거리는 많았다.
2박3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히잉, 더 놀고 싶은데.”
엘리의 투정에 현주 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얼른 돌아가서 일해야지.”
짧은 휴가를 끝마친 우리는 다시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촬영팀은 몰디브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실로 보냈고, 바로 광고로 제작됐다. 기존 모델 대신 갑자기 엘리로 바꾸는 바람에 이미 일정이 많이 지체된 상태였다.
우리는 완성된 광고를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푸른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엘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모델 같았다. 그냥 예쁜 것만이 아니라, 화면 너머로 강렬한 생기와 매력을 풍겼다.
“어때요? 예쁘게 나온 것 같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예쁜데요.”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광고를 보니, 어째서 사장이 그렇게 엘리를 섭외하려고 애썼는지 알 것 같다.
역시나 TV 광고가 나가자마자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에이튜브에 올라간 광고영상은 순식간에 조회수 100만을 찍었고,엘리가 입고 나온 래쉬가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순식간에 매진됐다. 본사로 재고를 구할 수 없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모델에 대한 관심 역시 폭발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야?
-할리우드 배우인가? 아니면 패션모델?
-와! 진짜 존예보스. 세젤예.
-살면서 저렇게 예쁜 여자 처음 봄. 어느 나라 모델이지?
-현직 금융맨입니다. 모델이 아니라 골든게이트 한국지사 변호사예요.
-맞습니다. 법무1팀장으로 계시는데, 베스터 사장님이 보고 모델해달라고 부탁해서 어쩌다보니 광고를 찍게 됐다고 하네요.
-ㅋㅋㅋ웃기시네. 저런 말에 낚이는 사람도 있냐?
-세상천지에 저런 변호사가 어디 있음?
-ㅈㄴ 어이없네. 뭔 판타지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를 하고 있어.
-진짜입니다. M&A와 국제법 전문이에요.
-저희 회사 팀장님 맞습니다. 일할 때는 무섭습니다.
-홈페이지 보시면, 엘리 킴이라는 이름 있어요.
-뭐야? 진짜야?
-이게 말이 돼? 저 미모에 똑똑하기까지 하다고?
-세상 진짜 더럽게 불공평하네.
-나도 당장 거기 입사해야겠다.
-당장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골든게이트에 지원서 넣어야지.
-헛소리 말고 그냥 다니던 회사 다니셈.
-아니, 골든게이트가 니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미모의 외국인 모델이 변호사라는 것과 골든게이트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어! 저 여자 강진후 애인인데.
-맞아. 전에 파티장에도 같이 간 듯.
-아! 예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 먹는 거 본 것 같음.
-뭐야? 강진후 여친이 있었어?
-왜? 강진후는 여자 만나면 안 됨?
-업계 관계자한테 들으니, 유진욱이 촬영장에서 강진후 애인에게 찝쩍거리다가 걸려서 자수했다는 얘기가 있음.
-ㅈㄴ대박이다. 개부럽다.
-세계 1위 부자인 것보다 저런 애인 있는 게 더 부럽!
-강진후는 진짜 세상을 다 가졌네.
-돈 많이 벌면 저런 여자랑 사귈 수 있는 건가?
-아니. 돈이 많다고 저런 애인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아.
-아! 나도 저런 여친 있으면 좋겠다.
-저런 여친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여친이라도 있었으면…….
-그냥 여친은 바라지도 않으니, 여사친이라도…….
-눈물이 난다ㅜㅜ
* * *
엄청난 미모, 골든게이트 법무팀장, 여기에 나와 사귄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엘리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됐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쇄도했다. 직원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거나 같이 사진 찍어 달라는 것은 예사였다.
골든게이트로 광고 섭외요청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현주 누나가 여기가 증권사인지 모델 에이전시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사자도 갑자기 찾아온 인기에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아까 임진용 회장에게도 연락 왔어요. 서성전자 웨어러블 기기 광고모델로 쓰고 싶다고. 업계 최고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던데요.”
잠시 생각하던, 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전해주세요.”
“왜요? 좋은 기회인데.”
서성전자는 전 세계에 제품을 판매하는 만큼 광고를 찍으면 거의 모든 나라에 나가게 된다. 단 번에 세계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일이 투잡을 해도 될 만큼 널널하진 않잖아요.”
“그렇긴 하죠.”
지금은 그나마 한가하지 M&A나 상장 등의 업무를 맡으면,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바빠진다. 모델 일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난 몰디브에서 광고를 찍던 엘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촬영하는 거 즐겁지 않았어요?”
엘리는 웃음을 지었다.
“모델 일도 재밌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좋아요. 좀 아쉽긴 해도 이번에 한 번 경험해봤고, 예쁜 사진도 많이 남겼으니까요.”
* * *
광고 덕분인지 비시즌임에도 베스터 매출은 크게 상승했고, 언론사는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연예기자들은 쓰라는 연예계 기사는 안 쓰고, 엘리에 대한 기사를 쓰기 바빴다
[베스터 새 모델, 강진후 애인으로 밝혀져!] [엘리 킴, 홍콩 출신 변호사로 미모의 재원!] [(속보)스타트업 투자를 하며 사귄 것으로 추정] [(실시간) 퇴근 후 같이 데이트하는 모습 포착] [(집중취재)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는 아직 안 밝혀져…….]회사에 출근해서 엘리에 대한 기사를 보고 있는데, 택규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왔다.
“야! 큰일 났어!”
얘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큰일은 아닌 모양이다.
난 심드렁하게 물었다.
“뭔데?
“엘리가 예전에 잠깐 모델 일 했었다고 했잖아.”
“응.”
현주 누나 말에 따르면 엘리는 대학생 시절 영국에서 모델 일을 했었다고 한다. 궁금해서 몇 번 물어 봤지만, 그때마다 엘리는 정색하며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모델을 했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다.
“그때 찍은 영상 찾은 것 같아.”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 진짜? 어떻게?”
“한국에 관심 있는 한 영국 네티즌이 찾아서 올렸나봐.”
택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보고 충격 받을 수도 있어.”
“대체 뭔데 충격까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걸 수도 있어. 그래도 보겠어?”
“…….”
그 정도야?
어쩌면 보지 않은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말을 들은 이상 안 볼 수 없다.
“마음 단단히 먹어!”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판도라라고 상자를 열고 싶어서 열었겠는가?
“알았으니까, 틀어!”
택규는 폰으로 영상을 틀었다.
1분 정도 길이의 영상이 흘러나왔고, 난 할 말을 잃었다.
“…….”
엘리가 정말 이런 걸 찍었다고?
* * *
엘리는 늦게 퇴근해서 집에 왔다.
“둘 다 저녁 안 먹었죠?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난 태연하게 말했다.
“뭐 먹고 싶어요? 그전에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만 소파에 앉아볼래요?”
“뭔데요?”
난 리모콘으로 TV를 켰다.
120인치가 화면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엘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것은 영국의 지역 케이블TV에 나온 한 광고였다.
웨이트리스 복장을 한 갈색머리 미녀가 귀여운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Whole family together! Everyone loves Fish&Chips! Royal Fish&Chips!”(온 가족이 다 함께! 아이와 어른 모두 좋아하는 피시앤칩스! 로열 피시앤칩스!)
이어서 후렴구가 나왔다.
“Royal Royal~ FiChip FiChip~ Royal FiChip~ Royal FiChip~.”(로열로열~ 피칩피칩~ 로열피칩~ 로열피칩~)
마지막으로 피시앤칩스를 한 입 먹어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OMG, it tastes sssooo good! The best in the world Fish&Chips! Royal Fish&Chips!”(어머, 이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피시앤칩스! 로열 피시앤칩스!)
차마 계속 볼 수 없었는지, 엘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어, 얼른 꺼요!”
난 일단 TV를 껐다. 너무 큰 충격에 엘리는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엘리 맞죠?”
엘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택규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쩌다가 저걸 찍은 거예요?”
“대학생 때 저기서 파트타임으로 일했어요. 광고를 찍으면 3개월치 페이를 한 번에 벌 수 있다고 해서…….”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엘리는 두 손을 내저으며 계속 변명했다.
“그, 그때는 저런 건 줄 모르고 지원했어요. 저도 나중에 광고 보고 깜짝 놀랐어요.”
찍을 때는 몰랐겠지. 그게 흑역사로 남게 될 줄은.
구블에 열심히 검색해 보니, 저 가게는 지역 프랜차이즈였고 지금은 망해서 사라졌다.
“그런데 저 피시앤칩스 진짜 맛있었어요?”
엘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는 맛도 없었단 말이에요!”
“아…….”
그래서 망했나?
택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팔았군.”
가난한 학생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겠지.
난 엘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괜찮아요. 사람이 살다보면, 피시앤칩스 광고를 찍을 수도 있죠.”
문제는 세트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영상 전체가 묘하게 유치찬란한 B급 감성이라는 것. 택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B급은 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잠시 후, 간신히 진정한 엘리는 정색하며 말했다.
“저 영상 당장 지워요. 아무한테도 보여주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택규가 말했다.
“저녁이나 먹으로 가자. 뭐 먹을까?”
부끄러워하는 엘리를 보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피시앤칩스 어때?”
내 말에 택규는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피시앤칩스를 어디서 팔더라?”
“그야 당연히 로열…….”
엘리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해요!”
* * *
엘리는 나와 택규에게 아무에게도 영상을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분명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영상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와 에이튜브 인기 동영상을 장악했고, 기사로도 떴다.
더 큰 문제는 가사와 율동에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흥얼거리게 된다는 것.
퇴근한 엘리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직원들이 저만 보면 키득거린단 말이에요. 뒤에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요.”
“…….”
사실 나도 가끔 흥얼거린다. 로열로열~ 피칩피칩~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유행은 한순간이니까요.”
“히잉.”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나 지나간다 하더라도 인터넷에 영원히 남아있겠지.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요? 제 눈에는 귀엽기만 하던데.”
“칫, 됐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진짜 귀여워요. 혹시 대학생 때 사진 더 없어요?”
“그럼 지금은 안 귀엽구요?”
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지금이 훨씬 더 귀여워요.”
토라진 것 같은 표정이 깜찍하다.
엘리는 기분이 다소 풀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말 듣기 좋네요. 한 번 더 해줄래요?”
“얼마든지요. 엘리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요.”
택규는 그런 우리를 지켜보며 말했다.
“잘들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