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24)
현주 누나네서 얘기를 끝낸 뒤.
우리는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난 아까 잠깐 봤던 유진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놈이 손으로 엘리의 몸을 더듬다가, 강제로 허리를 감쌌다고 했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서 그쳐서 다행이지, 만약 엘리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더 심한 짓을 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 대 얻어맞은 다음에는 엘리에게 주먹질을 하려 했고,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온갖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역시 그냥 도망가게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놈이 도망치기 전에 얘기를 들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았을 것이다.
유진욱은 GJ그룹 유병문 회장의 막내아들. GJ그룹의 재계서열은 17위. 대단하다면 대단하지만, OTK컴퍼니에 비하면 중소기업이나 다름없다.
내가 쓸 수 있는 수는 많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룹을 공격해 해체시키거나 고사시킬 수도 있겠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엘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 일 때문에 계속 화내는 거예요?”
“그럼 화가 안 나겠어요?”
내 말에 엘리는 생긋 웃었다.
“왜 웃어요?”
“그냥 ‘사랑받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그래요?”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어째서인지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화를 내는 건 괜찮지만, 지나친 일은 하지 말아요. 진후가 나쁜 사람 되는 건 싫으니까. 내 말 알죠?”
“아, 알았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아까 엘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유진욱을 상대로 멱살 잡고 주먹질을 했다면 내 기분은 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봤을 테고, 바로 안 좋은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는 유진욱이 그냥 도망치도록 놔뒀고, 바로 회식자리로 나를 끌고 간 것이다. 소고기를 얻어먹은 스탭들이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된 건 덤이고.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속이 깊다. 나보다 어른이라서 그런가?
“그보다 저 오늘 화장 예쁘지 않아요? 진후 보여주려고 일부러 안 지웠는데.”
“아, 그러고 보니…….”
엘리는 평소 화장을 옅게 하는 편이다. 그런데 전문가에게 제대로 메이크업을 받으니 웬만한 할리우드 여배우들 이상으로 미모가 빛을 발했다.
화난 건 화난 거고, 예쁜 건 예쁜 거다.
“씻고 올까요?”
난 일어나려는 엘리의 손을 붙잡고 끌어안았다.
“이따 씻어요. 지금 이렇게 예쁜데.”
* * *
상엽 선배는 Edm엔터를 통해 계속해서 유진욱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고, 내가 출근하자 그것들을 정리해서 건네주었다.
“이 새끼 수법이 한결 같아. 잘나가는 예능에 패널이나 게스트로 출연시켜준다고 꼬신 다음, 오디션 보자거나 계약하자며 개인사무실로 부르는 거지.”
“그럼 넘어와요?”
“출연기회 따내려고 매달리는 여자들도 있긴 있겠지. 그렇지 않은 애들은 그냥 강제로 덮치고. 그러다가 문제 생기면 적당히 출연시켜주거나 돈으로 입막음한 모양이야. 그렇게 당한 다음 충격 받고 아예 연예계를 떠난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난 자료를 훑어보았다. 이름이 적힌 피해자만 열 명이 넘었다.
“이게 다 진짜예요?”
“확인된 것만 그 정도고, 실제 피해자는 그거보다 훨씬 많을걸.”
한창 얘기를 하고 있는데, 비서가 들어와서 말했다.
“GJ그룹 유병문 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슬슬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상엽 선배가 나가고 나와 택규는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 유병문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청문회 자리 등에서 한두 차례 본적이 있다. 70대임에도 아직 정정한 모습이다. 아마 향후 10년은 더 그룹을 이끌어나가지 않을까?
그 뒤에는 마치 죄인처럼 유진욱이 따라 들어왔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유병문 회장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못난 아들놈이 결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이 녀석을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리셔도 됩니다. 이가 나가든 뼈가 부러지든 상관 안 하겠습니다.”
유진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강진후 대표님! 저를 마음껏 때려주십시오.”
이게 무슨 영화의 한 장면도 아니고.
택규는 괜히 손가락 관절을 열심히 풀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몇 번 아이언을 선호하세요?”
회장님들은 골프채로 사람을 패는 것은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골프채가 없다. 왜냐하면 골프를 안 치기 때문이지.
마음 같아서는 골프채든 야구방망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패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사람 폭행한 다음 지갑에서 돈 빼서 던지는 재벌들 갑질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여자를 성추행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돈이 얼마나 많든, 그게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애인 자격으로 때릴 수는 있겠지만…… 대놓고 때려달라고 판을 깔아놓은 상황에서 그러는 건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거겠지.
난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잘못했다고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되죠.”
내 말에 유진욱의 표정의 밝아졌다.
“그, 그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용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가서 빌어야죠.”
“아! 당장 애인 분께 무릎 꿇고 사과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엘리도 용서한다고 했으니까요.”
유진욱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고, 유병문 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그들 앞에 상엽 선배가 정리해놓은 자료를 내밀었다. 그것을 살펴본 유병문 회장과 유진욱은 깜짝 놀랐다.
“보니까 그동안 비슷한 짓 한 게 한둘이 아니던데. 이분들께도 용서를 받아야죠. 용서를 못 받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난 이어서 종이와 펜을 올려놓았다.
“진술서입니다. 시간 충분히 드릴 테니 편하게 작성하세요.”
유진욱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지, 진술서요?”
“예. 옆에 자료 참고해서 상세하게 쓴 다음 근처에 있는 경찰서로 가서 직접 제출하면 됩니다. 나중에 여기 적히지 않은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어떻게 될지 아시죠?”
유진욱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아버지.”
유병문 회장의 얼굴에 굴욕감과 낭패감이 떠올랐다.
현재 GJ그룹은 5대 그룹 쪽에서 거래를 끊겠다고 나선 상황. 소문이 퍼지면 다른 그룹들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내가 하라고 지시한 건 아니지만, 하지 말라고 말은 해줄 수 있겠지.
그 전제는 유진욱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쓰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 * *
서울중앙지방경찰서 앞에서 짤막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코에 붕대를 붙인 유진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거리며 말했다.
“저, 저는 성범죄자입니다. 그동안 지위를 이용해 여러 연예인 지망생들을 강압, 또는 회유로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했습니다. 지금부터 경찰에 자수해 진술하고,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짧은 기자회견 이후 자기 발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자수했다.
유병문 회장의 막내아들 사랑은 유별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아들에 대한 사랑이 깊어도 그룹보다 소중하지는 않다.
결국 그룹을 살리기 위해 막내아들을 교도소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병문 회장은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고, 피해자들과 최선을 다해 합의하겠다고 밝혔다.
갑작스레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언론들은 앞다퉈서 기사를 냈다. GJ그룹 회장 막내아들의 돌발행동(?)에 GJ그룹주 전체가 폭락했고, GJ미디어는 하한가까지 떨어졌다.
오너리스크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재벌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당장 마스터치킨만 하더라도 오너가 구속된 뒤 가맹점 매출이 급감했다.
외국에서도 전문경영인이 사고를 치면 여론의 비판과 불매운동이 일어난다. 게다가 전문경영인은 교체하면 그만이지만,재벌은 그럴 수가 없으니 더 큰 문제다.
택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또 한 놈 보냈네.”
“뭐, 엄밀히 따지면 내가 보낸 건 아니지.”
저놈이 엘리에게 한 짓은 범죄지만, 법대로 한다고 해도 구속될 만한 건은 아니다. 기껏해야 벌금이나 집행유예였겠지.
그러나 다른 범죄들은 충분히 구속할 만한 사항이다.
본인이 지은 죄 때문에 들어가는 거니, 누구를 원망하겠나?
“……라지만, 열심히 너를 원망하고 있지 않겠어?”
“그렇겠지. 그래도 GJ그룹은 나한테 감사해야 돼.”
저런 놈이 계속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니면, 나중에 그룹 이미지가 어찌되겠는가? 차라리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얌전히 교도소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쟤가 반성할까?”
“안 하겠지.”
애초에 반성할 인간이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법의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들에게 위로는 좀 되겠지.
* * *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이미 계약한 대로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실내에서 한 차례 더 추가촬영이 있었고, TV 광고 촬영지도 결정됐다. 촬영지는 몰디브에 있는 한 섬과 리조트. 상업용 촬영인 만큼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왜냐하면 이 섬과 리조트가 골드맨 가문 소유기 때문이지.
엘리의 촬영에 맞춰 우리는 다 같이 휴가를 가기로 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휴가는 미루면 평생 못 간다는 것이다. 어디 갈 만하면 일이 하나씩 터진다. 그러니 갈 수 있을 때 가야 한다.
일정은 2박3일. 우리의 설득에 누나도 하루 휴가를 내고 같이 가기로 했다.
헨리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말했다.
“드디어 몰디브에 가게 됐군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몰디브 가자는 얘기가 나온 건 재작년이다. 계획까지 다 짜놨는데,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건 빅원 때문.
원래는 놀러가서 헨리와 현주 누나가 잘되게 밀어줄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헨리는 이미 건이를 품에 안고 있으니까.
“회사 복귀는 안 해요?”
“당분간은 쉴 생각입니다. 현주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의외로 가사와 육아가 적성에 맞나?
잠시 후, 엘리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도착했다.
“넌 평소 엄마한테 연락도 안 하고. 요즘 뭐가 그렇게 바빠?”
“죄송해요.”
“하루에 한 번씩은 연락해야 걱정을 안 하지. 그러다가 뉴스에서 네 얘기 나오면 얼마나 놀라는지 알아?”
“…….”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어머니 잔소리는 피할 수가 없구나.
촬영팀은 따로 항공기로 움직일 예정이고, 우리는 전용기를 타고 가기로 했다.
드디어 OTK컴퍼니의 전용기를 개시할 때가 된 것이다!
기종은 걸프스트림 G700.
이걸 선택한 이유는 가장 빨리 출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원래 한 러시아 부호가 주문했으나, 문제가 생겨서 인도가 늦어졌고 그걸 우리가 사기로 했다.
전용기 구매에 있어서 상엽 선배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다. 실내 인테리어를 꼼꼼하게 지시했고, 인도일에 맞춰 기장과 승무원들도 다 선발해놓았다.
전용기 내부는 깔끔하고 모던했다. 좌석, 회의실, 샤워실 등이 갖춰져 있고, 위성통신도 가능했다.
택규는 감탄했다.
“우와! 안에 침대도 있어!”
뒤쪽에는 방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퍼스트 클래스로도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전용기를 타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전에 서성전자 전용기를 타본 적이 있으니. 그러나 내 전용기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난 출발 전에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승무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표님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뜨자 잠시 귀가 먹먹해졌고, 놀란 건이가 힘차게 울어댔다. 일반 항공기였다면 다른 승객들에게 미안해했겠지만, 전용기인 만큼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전용기가 몰디브를 향해 날아가는 사이 우리는 음악을 틀어넣고,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 * *
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섬까지 또다시 수상 경비행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그야말로 에메랄드빛.
경비행기는 섬에 도착하자 바다 위에 착륙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리조트 내에서도 가장 좋은 룸으로 안내됐다.
룸 안에는 노천탕과 프라이빗풀이 달려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목욕이나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호화 리조트에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데가 있었니?”
나 역시 이제까지 5성급 호텔에 묵은 적은 많아도 5성급 리조트는 처음이다.
리조트 안에는 전용 비치, 인피니티풀, 식당, 마사지샵, 와인바, 워터스포츠 센터 등 모든 설비가 다 갖춰져 있었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갔다. 엘리는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흰색 카디건을 걸쳤다. 치마 아래로 뻗은 다리는 매끈한 각선미를 드러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햇빛은 강렬하게 내리쬈다.
리조트 고객들만 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만큼 해변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엘리는 신발을 벗고 한달음에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바다에 발을 담근 채 뒤를 돌아 나에게 손짓했다.
“어서 와요, 진후!”
눈부신 남국의 햇살 아래 갈색머리 미녀가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너 언제 결혼할 거니? 엄마가 보기에 저만큼 괜찮은 아가씨도 없어.”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