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49)
우리는 미국 대사관 근처 호텔에 머물렀다.
미국계 호텔로 미국 외교관들과 기업인들이 많이 묵는다. 가장 좋은 점은 방음과 도청에 대한 방비가 철저하다는 것.
이런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가 전적이 많은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호텔에서는 모스크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스크바까지 왔는데, 명소 정도는 둘러봐야 하는 거 아니야? 붉은 광장이나, 성 바실리 대성당이나.”
“오! 성 바실리 대성당도 알아?”
“테트리스에 나오잖아.”
“…….”
관광을 못 하는 건 좀 아쉽긴 하지만, 지금 밖에 돌아다니면 괜히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된다.
지금쯤이면 러시아 정부도 투자를 받을지 말지 고민 중일 것이다. 내가 이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 어떤 식으로는 접촉이 오겠지.
난 호텔에 머물며 자료를 검토했다.
“비소츠키 대통령이라…….”
21세기는 스트롱맨들의 전성시대.
로날드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오카자키 총리는 ‘일본을 되돌려 놓겠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장핑화 국가주석은 대국굴기와 중국몽을 선언했다. 비소츠키 대통령 역시 집권 내내 강한 러시아를 추구했다.
빅토르 안토노비치 비소츠키.
러시아의 정보기관 KGB 출신이던 그는 정계에 입문했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발탁됐다.
이후 옐친이 건강 문제로 대통령직을 사임했고(모두가 알다시피 술 마시고 주정부리기로 유명했다), 총리였던 비소츠키는 대통령직을 대행하며 정권을 잡았다.
이후 대선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인 장기집권을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헌법으로 대통령 3연임을 금지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3연임을 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비소츠키는 한 발 물러나며 자신의 측근인 볼코프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볼코프는 자타가 공인하는 비소츠키의 충견. 그는 비소츠키의 지원 아래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됐고. 비소츠키는 잠시 총리자리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 선거 때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러시아 헌법이 3연임을 금지할 뿐, 3선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소츠키는 또다시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대통령이던 볼코프는 총리로 물러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회전문 인사였다.
“대체 독재국가들이 투표는 왜 하는 거야?”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함이지.”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막스 베버는 지배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전통적 지배,카리스마적 지배, 합리적 지배다.
전통적 지배는 세습을 뜻한다. 아버지가 왕이고, 할아버지도 왕이니, 나도 왕을 한다는 논리다. 과거에는 거의 모든 나라가 이러했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한 개인이 영웅적 행위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이나, 터키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합리적 지배는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한 민주적 절차…… 바로 선거로 뽑는 것이다.
“반드시 셋 중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나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진 경우가 많아.”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선거로 뽑힌다든지, 부친에 이어 또다시 선거에 당선 된다든지.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합리적 지배다. 합법적 절차에 의해 진행된 선거는 지배의 정당성을 공고하게 해준다.
때문에 대다수의 독재국가들은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거치고 있다. 심지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투표를 한다!
여기에 3대 세습에, 매일 같이 최고존엄이라며 홍보하고 있으니, 여기는 지배의 정당성 세 가지를 다 획득한 셈.
그래서 경제파탄에 인민들이 굶어죽더라도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거겠지만, 그 상황도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지배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가장 중요한 건 경제야. 경제만 성장한다면 독재도 눈감아 줄 수 있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국가부도까지 겪으며 러시아는 몰락의 길을 걷는 듯했다.
그러나 비소츠키 대통령 집권 이후 러시아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경제위기는 극복했고, GDP는 큰 폭으로 성장했다.
이게 딱히 비소츠키 대통령이 뭘 잘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의 집권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유가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OPEC 회원국은 아니지만, 경제구조는 사실상 OPEC 국가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 석유와 천연가스로 먹고 사는 전형적인 자원의존형 경제다.
그나마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무기산업 정도. 한때 소련은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였던 나라고, 그 기술력은 러시아가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것도 점점 힘들어지는 중이다.
최근 나오는 첨단무기들은 중화학공업 및 IT산업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 기존무기를 개량하는 거라면 모를까, 기반산업이 빈약한 상태에서는 첨단무기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크림반도 병합은 러시아의 힘을 세계에 보여줬지만, 역으로 유럽 국가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제재 이후 루블화는 폭락했고,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지금 러시아경제는 빈말로도 좋지 못하다. 제재가 결정타긴 하지만, 냉정한 시각에서 보면 그전부터 산업전환에 실패했다.
중국과 비교해보면 경제성적표는 더욱 명확하다. 비소츠키가 집권하는 동안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정부가 밀어줬든, 내수시장이 크든, 특허를 무시하고 타국 기업의 기술을 베끼든……어쨌든 위챈트, 알리지니, 웨이화 등 세계적 기업들이 수십 개 탄생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세계적 기업이라고 해봐야 예나 지금이나 가즈프롬(Gazprom)이다.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이 기업이 하는 일은 가스를 파는 것이다.
“그래도 자원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네.”
“그렇긴 하지.”
러시아에서 생산된 석유와 천연가스는 송유관과 가스관을 타고 유럽전역으로 공급된다. 당장 가스관 밸브를 잠그면 난리 날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단, 이 경우 러시아도 막대한 타격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실제 실행하기는 힘들다.
“뭐, 당장 우크라이나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전쟁 중임에도 자국 땅을 관통하는 러시아 가스관에는 손도 못 대고 있기도 하고.”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건드리면 비소츠키 형이랑 적 되는 거니까. 아주 그냥 완전히 적 되는 거지.”
세상에는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러시아 가스관을 건드리는 건 당연히 해서는 후자에 속하겠지.
* * *
이틀 후.
크렘린궁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장관이나 총리를 거치지 않고, 비소츠키 대통령이 직좁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서 러시아 대통령까지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갔다가 방사능 홍차 마시면 어떡해?”
“으음.”
이게 단순히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정적들을 암살하기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요원이 암살당한 사건이다.
사인은 놀랍게도 방사능 중독. 그가 사용하던 찻잔에서는 대량의 방사능 물질 폴로늄이 검출됐다.
당연하지만, 일반인이 방사능 물질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냥 독으로 죽여도 될 것을 굳이 방사능 물질로 죽였다는 점에서 암살이 아니라 공개처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국 내에서 암살이 발생하자 영국은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 소행임이 분명하고, 배후가 비소츠키 대통령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영국은 러시아 내에 있는 관련자들을 무더기로 기소했으나, 러시아는 송환은커녕 아예 무시했다.영국은 항의 표시로 러시아 내의 외교관을 철수시켰고,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 그걸로 끝이지.”
죽은 사람만 불쌍하게 된 셈이다.
혹시 몰라 러시아나 비소츠키 대통령에게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다행히 딱히 없는 것 같다.
나한테 방사능 홍차를 먹인다고 해서 러시아가 덕을 볼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문제가 생길 경우 러시아가 잃을 게 많다.
따라서 걱정할 건 전혀 없다.
“그래도 유서는 써놓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그게 더 사망플래그 아니야?
* * *
우리는 차를 타고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크렘린궁으로 향했다.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정작 비소츠키 대통령은 일정이 있어서 두 시간 정도 늦는다고 한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당황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기다리죠.”
비소츠키 대통령은 중요한 회담에 늦게 나오기로 유명하다. 심지어는 강대국 정상들을 상대로도 짧으면 30분, 길면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만들기도 한다.
외교적 결례지만,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로 뭐라 할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은 없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택규는 만화책을 잔뜩 들고 왔다.
“이러니까 만화방 같고 좋네. 라면만 있으면 딱인데.”
크렘린궁을 만화방 취급하다니. 어쨌거나 나도 할 게 없는 관계로 옆에서 같이 만화책을 읽었다.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재밌다.
“이거 다음 권은 없어?”
“아직 안 나왔어. 이 작가 연재속도가 폭망이야. 뻑하면 잡지에 휴재공지나 올리고. OTK상 하나 주려 했는데, 연재가 이 모양이면 생각 좀 해봐야지.”
“…….”
공정한 심사는 어디로 가고?
한 시간 정도 후, 비소츠키 대통령이 도착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리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안내해주겠다는 보좌관의 말에 택규는 손을 저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요. 지금 중요한 장면이라 이것만 보고 갈게요.”
보좌관은 당황했고, 난 택규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TV에서 질리도록 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게.”
반쯤 벗겨진 흰색 머리카락, 각진 얼굴, 짙은 눈썹과 푸른색 눈동자. 이제 6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키가 의외로 작았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실제로는 170센티미터도 안 될 것 같다.
이 남자가 바로 21세기 차르라 불리는 비소츠키 대통령이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러시아라는 거대 국가의 대통령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권기간만 따지면, 로날드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고, 장핑화 국가주석보다도 훨씬 길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통역이 있고, 소파 앞에는 두 마리 개가 앉아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반려견이다. 참고로 그는 애견인으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 개가 집채만한 덩치를 지닌 검은색 도베르만이라는 것. 실제로 사냥할 때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전에 독일 총리와의 회담장에 끌고 나왔다가, 독일 총리가 기겁했던 적도 있다. 스트롱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다들 악취미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물리면 아프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움찔하는 나와는 달리 택규는 좋아했다.
“오! 귀엽네요. 강아지들 이름이 뭔가요?”
“…….”
저것도 강아지에 속하나?
“한번 만져 봐도 되나요?”
“좋을 대로 하게.”
비소츠키 대통령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택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도베르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훈련이 잘 되어 있겠지만, 만에 하나 개가 물기라도 하면, 그때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비소츠키 대통령은 개를 다른 방으로 보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 앉았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만큼 분위기는 자연스러웠다.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일단 차부터 한 잔 하지.”
준비된 음료는 하필이면 홍차였다. 화려한 찻잔에 담긴 홍차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편하게 들게.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홍차니.”
“…….”
대체 뭘 넣었기에 어디서도 맛볼 수가 없을까? 러시아산 특제 방사능이라도 한 스푼 넣었나?
대단히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사약을 마시는 심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택규는 재빨리 말했다.
“전 콜라로 마시겠습니다. 코카콜라로 부탁드려요.”
“…….”
이런 미제 앞잡이 같은 자식이?
비소츠키 대통령은 등을 비스듬히 기댄 편한 자세로 내가 벌이는 사업과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대화가 오고간 후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페트로프 교수의 연구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고 얘기 들었네.”
“그렇습니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러시아의 원전기술은 이미 세계최고고,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네. 굳이 무리해서 실험을 할 필요가 없겠나?”
쉽게 허락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흥미를 나타냈다.
“어째서인가?”
“세계 자동차시장은 전기차로의 전환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동토가 많은 만큼 좀 늦춰질 수 있겠지만, 이것도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세계적으로 화석연료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만큼 러시아는 그 이후를 대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