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50)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비교우위를 주장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우위를 지닌 상품을 교역하면, 양쪽 모두의 이익이 증진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문제가 있다. 바로 상품마다 기술집적 속도가 크게 차이난다는 것이다.
반도체 용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농업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봐야 바나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해가 지날수록 반도체를 수출하는 나라는 유리해지는 반면, 바나나를 수출하는 나라는 불리해 진다.
미국과 러시아는 오일과 가스가 펑펑 나는 자원부국이다. 그런데도 원전강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고, 자국에도 원전을 계속 짓고 있다. 이게 단지 핵무기 때문일까?
아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은 기술집적 속도가 다르다. 화력발전은 어차피 석탄이나 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연소시키는 것뿐이니, 앞으로 기술이 발전해봐야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진화해왔다. 만약 진행파 원자로가 상용화되면 발전효율을 지금보다 수십 배 이상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경수로나 중수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재활용할 수 있는 만큼 연료비는 사실상 제로라고 봐도 좋다.
과거 OPEC이 석유자원을 무기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OPEC이 발생시킨 두 차례 오일쇼크는 세계경제를 파탄에 빠트렸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수십 년 사이 모든 분야에서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선진국과 신흥국에서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석유를 팔던 나라들은 지금도 여전히 석유만 팔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가즈프롬은 여전히 세계적 기업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요?”
자원의존형 경제는 자원가격이 하락하거나 자원이 고갈되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셰일혁명 이후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세였다. 여기에 전기차 보급과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에너지 패권은 이미 다른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러시아는 세계무대에서 점점 뒤처지게 될 겁니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등을 뒤로 기대며 깍지를 꼈다.
“진행파 원자로 개발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투자해도 충분하네.”
“뭐,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진행파 원자로를 만들 기술이 러시아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블러핑이다.
내가 본 예지는 페르로프 교수가 실험에 성공한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쪽을 먼저 찾아가지 않고, 러시아로 온 건가?”
“첫째는 페트로프 교수님의 비전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번 협력을 계기로 러시아 진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OTK컴퍼니는 원전에 대한 기술은 없어도, 다른 분야에 최고의 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다.
“진행파 원자로 사업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여러 분야에서 협력해 나갔으면 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진행파 원자로 사업의 협력 없이는, 다른 협력도 없다는 뜻이다.
“실험이 언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실패하더라도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을 건 많겠죠.”
어차피 돈은 내가 낸다. 그리고 내가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원전기술을 크게 홍보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잃을 것 없는 장사다.
비소츠키 대통령의 공식적인 재산은 고작(?) 수천만 달러. 그러나 실제로는 2천억 달러가 넘을 거라는 얘기도 있다.
당연하지만, 공무원 연봉을 열심히 저축해서 모은 재산은 아니고, 국영기업들을 민영화시키고, 올리가르히를 척결하는 과정에서 한몫 단단히 챙긴 것이다.
그가 차명으로 가즈프롬과 로사톰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진행파 원자로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의 자산 역시 크게 늘게 된다.
따라서 나와 손을 잡는 것이 러시아에게도 그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러니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겠지.
비소츠키 대통령은 차가운 눈빛으로 계속 내 표정을 훑었다.
“러시아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나?”
“제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 굴복할 만큼 우스운 나라가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러시아 제재는 대이란 제재나, 대북 제재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어느 나라도 핵무기와 ICBM을 가지고 있고,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강렬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러시아의 지도자. 그리고 러시아는 미국과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권국이다.
그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를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그가 가진 힘이다.
그렇다면 나의 힘은 뭘까?
당연히 돈이다. 돈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마주할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루블화 하락과 일자리 감소. 그리고 물가상승을 좋아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겠죠.”
막스 베버는 지배의 정당성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지배권력을 획득했든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아무리 그가 독재자라도 경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독재자기 때문에 더욱 경제를 신경 써야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국민들의 불만은 커진다. 지지율 하락은 장기집권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고, 난 최대한 태연하게 그 눈빛을 받았다.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누가 좀 도와줘.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택규가 말했다.
“성공한 대통령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성공했지만, 실패한 대통령은 저마다의 이유로 실패하기 마련이죠.”
“…….”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런데 그 순간, 비소츠키 대통령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어찌나 크게 웃는지 옆에 있던 통역이 놀랄 정도였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그가 물었다.
“안나 까레니나 좋아하나?”
택규의 표정 당황하는 빛이 떠올랐다.
난 그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게 누구야?’
난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책이야, 책! 책이라고!’
이 자식이 책은 안 읽고 애니 같은 데서 저 대사만 주워들은 게 분명하다.
뭔지 모르는 듯 했지만, 택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엄청 좋아합니다. 세상에 안나 까탈레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까레니나야! 대체 까탈레나는 누구야?
발음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비소츠키 대통령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안나 까레니나는 완벽한 예술작품이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고 봐야겠지.”
택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뻥을 쳤다.
“맞습니다. 안나 까탈레나가 곧 인생이고, 인생이고 곧 안나 카탈루냐죠.”
“…….”
까탈루냐는 또 뭐야? 바르셀로나야?
“좋은 친구로군.”
갑자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비소츠키 대통령은 다정하게 물었다.
“둘 다 저녁은 먹었나?”
“아직 점심도 못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하필 점심 때 약속을 잡은 다음, 정작 본인은 늦게 왔기 때문이지.
“하하, 이거 미안하게 됐군. 실무적인 얘기는 담당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같이 식사하며 보드카나 한잔 하는 게 어떻겠나?”
* * *
강진후가 크렘린궁에서 빅토르 비소츠키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은 금세 전 세계에 퍼졌다. 굳이 정보를 입수할 필요도 없이 러시아 언론이 주요뉴스로 계속 보도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비소츠키 대통령와 강진후는 러시아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MOU를 체결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서류에 사인한 다음, 악수하는 장면은 전 세계 언론에 방송됐다.
[러시아 원전분야에서 OTK컴퍼니와 협력해 나가기로] [강진후, 러시아기업인들과의 만남] [OTK컴퍼니, 진행파 원자로 실험에 투자결정!] [진행파 원자로는 기존 원전의 문제점을 개선한 차세대 원전기술…….] [로사톰과 세부사항 협의 중] [강진후의 투자가 원전산업에 미칠 영향은?]OTK 효과(OTK effect)라는 단어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가 처음 쓴 단어로 OTK컴퍼니가 투자한 기업이 큰 성공을 거두며, 산업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OTK컴퍼니의 투자를 지켜보고, 연관된 기업이나 산업에 투자하면 이익을 낼 수 있다. 실제 몇몇 투자회사들은 이러한 전략을 썼다.
OTK컴퍼니의 투자가 결정되자 순식간에 원전산업과 진행파 원자로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다른 기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메가파워는 미국 내에서 실험을 강행하겠다며 미국정부에 허가를 요청했고, 중국과 프랑스 원전업체들도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하겠다고 나섰다.
불똥은 한국으로도 튀었다. 당장 정부가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에 대해 논란이 불붙었다.
* * *
OTK컴퍼니 실무진과 골든게이트가 러시아 에너지부처와 로사톰과 협상에 나섰다.
로사톰은 진행파 원자로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자회사 로사톰TWR을 만들었고, OTK컴퍼니는 여기에 10억 달러를 투자해 지분 36퍼센트를 받았다. 또한 향후 추가실험 여부에 따로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부지확보와 환경평가 등 행정적 절차와 주민반발을 억누르는 데만 1년 이상 걸릴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TWR 개발계획은 실험단계 직전에 폐기됐다. 이미 부지의 기반시설까지 끝난 상태였다. 아직 정식계약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부지에 바로 실험을 위한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다. 주민반발은……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으로 취급됐다.
난 호텔에 머무르며 뉴스를 보았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러시아는 환영하며, 비소츠키 대통령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며 모든 것을 그의 공으로 돌렸다. 미국은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EU는 제재가 무너질까봐 우려를 표했다.
현주 누나는 러시아지사와 계속 연락하며, 협상을 진두지휘했고, 엘리는 러시아 법률전문가와 함께 법적문제를 처리했다.
난 임진용 회장의 연락을 받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시장이 확대되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정치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청와대든 여당이든 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뉴스는 보고 있어요.”
원전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고, 여당과 야당은 난타전을 벌이며, 국회는 또다시 혼수상태로 들어갔다.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가겠지.
난 페트로프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 실험의 총책임자. 정부와 로사톰 관계자들에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도 표정은 밝았다.
“덕분에 TWR 실험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로 투자를 하실지는 몰랐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교수님에게 달렸네요.”
“하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페트로프 교수는 회상을 하듯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아버지는 핵무기를 만드셨습니다. 그중 일부는 해체해 원전의 연료로 썼지만, 일부는 아직도 군사기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무기가 쓰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과학자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핵무기와 미사일 등 각종 무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만든 무기가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련이 더 많은 핵무기를 가지는 것이 오히려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사실이다.
핵무기의 개발은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강대국끼리 전면전을 피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냉전은 총성 한 방 없이 자연히 끝이 났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핵무기를 개발하며 쌓은 기술이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평화가 오면 핵은 쓸모없어질 테고, 그때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기술이 인류를 위해 쓰일 거라고 말씀하셨죠.”
“하긴,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고속증식로의 개념을 만들어내셨겠죠.”
페트로프 교수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진행파 원자로는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전 그 꿈을 꼭 이뤄드리고 싶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