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97)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은 경제를 이끄는 양쪽 날개다.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융이 밑바탕이 되어야하고, 금융이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산업이 발전해야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산업자본이 강세다. 서성전자나 은성차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들은 많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융회사는 없다고 봐도 좋다.
금융이 가진 힘은 산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기업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서성전자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가장 많은 자본을 굴리는 곳은 바로 국민연금이다.
현재 국민연금의 자산규모는 약 600조.
국민들이 없는 살림에 허리띠 졸라 납부한 돈들이 모여, 서성전자 시가총액 두 배가 넘는 거대한 기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국민연금은 그 막대한 자본을 국내 증시와 채권, 부동산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 투자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경우 자본이 1천조가 넘어.”
택규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뭐? 1천조?”
세계는 넓고 돈은 많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가 가진 돈은 아직 새발의 피에 불과하겠지.
정부가 운용하는 국부펀드(SWF)뿐 아니라, 개인들이 운용하는 사모펀드(PEF) 역시 수십조에서 수백조를 굴린다.
금융자본은 돈으로 수많은 기업들을 집어삼켰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프랜차이즈, 마트, 보험사, 저축은행 등도 알고 보면 사모펀드 소유인 경우가 허다하다.
난 현주 누나에게 받은 자료를 읽어보았다.
엑스캅은 미국 타이포그룹이 100퍼센트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비상장회사로, 인수한지 15년 만에 다시 매물로 내놨다.
매각주관사는 일찌감치 모건스탠리로 정해졌다.
2조5천억 원에만 매각해도 타이포그룹은 2조 원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동안 경영자문료와 배당으로 받아간 돈을 포함하면 그 이상이고.
예비입찰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타이포그룹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엑스캅이 3조 이상의 가치가 있고, 아무리 돈이 급해도 헐값에 매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인수를 희망하는 대기업과 사모펀드들은 ‘3조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2조도 비싸다. 차라리 입찰에 참가하지 않겠다’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당연하지만, 양쪽 다 그냥 블러핑(Bluffing)이다.
타이포그룹은 당장 현금을 필요로 하고, 대기업과 사모펀드들은 엑스캅을 가지고 싶어 한다.
중요한 건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인데…….
상장회사의 경우 이미 시장에서 가치가 평가되어 있다.(그게 반드시 맞다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비상장회사의 경우 가치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재무제표에 따르면 엑스캅의 자기자본은 4천억 정도. 예금, 토지, 건물, 차량, 장비 등을 전부 합한 가격이다.
자기자본의 가치가 반드시 장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금이야 실제 가치가 똑같지만, 그 외에는 전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음이나 채권도 만기일에 그 금액을 다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그 외에 각종 장비들은 장부에는 비싸게 기재되어 있더라도 막상 팔 때는 헐값이 된다.
자기자본이야 그렇다 쳐도, 영업권 가치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계산을 하느냐에 따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두 배 이상 차이난다.
만약 엑스캅이 2조5천억 원이라 한다면, 자기자본 4천억을 제외한 나머지 2조1천억 원은 영업권에 대한 가치다.
현재 고객수, 매출, 영업이익, 앞으로의 성장성 등등.
엑스캅의 주요사업 분야는 보안, 경호, 보안시스템 개발 및 판매, 건물관리 등이다. 이중 학교, 관공서, 상점, 주택, 아파트,쇼핑몰 등에 제공하는 보안서비스에서 가장 큰 매출이 발생한다.
왜 가끔 영화를 보면 상황실 같은 데서 수백 대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무전기로 연락하는 장면 같은 게 있지 않은가?
현재 기업수요를 중심으로 관련 산업이 성장추세에 있긴 하지만, 부정적 요소도 만만치 않다.
자료를 훑어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엄청 복잡하네.”
팔려는 쪽에서는 최대한 비싸게 팔고 싶어 하고, 사려는 쪽에서는 최대한 싸게 사고 싶어 한다.
가격은 양쪽의 이해가 맞아드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문제는 그 지점이 어디냐는 것이다.
내가 수십조가 넘는 자산가에 OTK컴퍼니 CEO긴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20대 중반의 청년에 불과하다.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CEO나 M&A 전문가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
택규가 말했다.
“대신 너한테는 걔들한테는 없는 특수한 능력이 있잖아.”
“그거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다른 곳은 얼마 정도 생각하고 있을까?
2조? 3조? 아니면 그 이상?
한 5조 싸들고 가서 ‘제가 살게요’ 하면 쉽게 끝날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타이포그룹과 매각주관사인 모건스탠리만 좋은 일 시켜주게 된다.
“더 나아가 글로벌 호구임을 인증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까지 해서 손에 넣어야할 필요가 있나?”
“없으니까 고민 중이지.”
엑스캅은 우리 입장에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기업이다. 그렇다 해도 쉽게 은성차가 쉽게 가져가게 놔둘 생각은 없다.
결국 전략은 둘로 나뉜다.
“적정한 가격에 우리가 인수하거나, 아니면 아예 비싼 가격에 은성차가 인수하도록 만들거나.”
* * *
저녁 8시.
우리는 오랜만에 상엽 선배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메뉴는 상엽 선배가 좋아하는 등심이었다. 대표의 입맛 때문에 K컴퍼니 직원들은 회식 때마다 강남 쪽 등심 맛집을 순회 중이었다.
이제 직원들 입에서 제발 삼겹살이 먹자는 얘기가 나올 때가 됐을 텐데.
우리는 미리 예약을 해놓은 개인실로 안내되었다. 이번에는 기홍 선배도 함께였다.
자기도 좀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나?
직원이 고기를 굽는 사이 맥주가 나왔다. 기홍 선배는 공손하게 맥주병을 들며 말했다.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사석인데, 그냥 편하게 말해요.”
기홍 선배는 내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럴까?”
상엽 선배는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진후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신입생 때 기홍 선배에게 매일 같이 학식 얻어먹던 게 생각난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내가 법인카드로 기홍 선배에게 소고기를 사주게 되었구나.
술잔을 몇 번 부딪치고 나자 긴장이 좀 풀리는지, 기홍 선배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이번 일 아니었으면,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
“글쎄요.”
어차피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젠가는 알려질 문제였다. 다만 직접 나서서 공개적으로 알리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좀 서운하더라. 나한테 만이라도 귀띔 좀 해주지.”
“…….”
그랬으면, 기자회견하기도 전에 전 국민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고기를 먹으며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현주 누나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상엽 선배가 물었다.
“엑스캅 매각건? 그건 왜?”
“흥미가 좀 생겨서요.”
기홍 선배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 참여하는 회사들 면면이 장난 아니던데. 대기업 중에서는 은성차그룹과 리테그룹, 사모펀드 중에서는 KRR, TM컨소시엄, 씨티그룹, 골든게이트PIA…… 여기에 세계 최대 사모펀드 칸라인그룹과 한국 최대 사모펀드 RCK브로스까지. 참가자 명단으로 보면 한국시장 M&A 중에서 가장 화려해.”
“잘 알고 계시네요.”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기홍 선배는 씨익 웃었다.
“내가 원래 그쪽에 관심이 좀 많잖아. 그런데 RCK브로스는 얼마 전 바이원 지분 인수해서 자금여력이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바이원은 스위스기업 렛슬레가 중국진출을 위해 중국기업과 합작해서 세운 음료회사다. 렛슬레는 중국시장에서 철수하며 자신들이 보유한 지분 49퍼센트를 매각했고, 얼마 전 RCK브로스가 사들였다.
금액은 120억 위안, 우리 돈으로 2조에 달하는 금액이다.
상엽 선배가 말했다.
“테마섹이 또 앵커LP로 나설 거라는데.”
사모펀드가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투자펀드를 조성하면, 돈 많은 개인이나, 연기금, 국부펀드, 금융기관 등이 필요한 자금을 출자한다.
이들을 LP(Limited Partner, 출자자)라 하고, 이들 중 가장 메인이 되는 LP를 앵커LP라고 한다.
기홍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뒤에서 실탄을 대주려는 거죠.”
“그만큼 류철균 회장을 믿는 거지.”
테마섹(Temasek)은 싱가포르 재무부가 지분 100퍼센트를 소유한 연기금 운용펀드로, RCK브로스와는 설립초기부터 협력관계였다.
“예전에 진짜 RCK브로스 들어가고 싶었는데.”
학교 다닐 때부터 기홍 선배는 M&A와 사모펀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KYB투자증권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업무가 자신과 맞지 않다며 사표내고 나왔고, RCK브로스 입사를 노렸으나 실패.
한동안 백수로 방황하다가 이후 K컴퍼니에 합류했다.
“이직하시게요? 추천서 써드릴까요?”
내 말에 기홍 선배는 정색했다.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대표님? K컴퍼니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타이포그룹 입장에서는 분식회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각에 나섰다지만, 타이밍이 좋았어. 아마 예상 이상으로 흥행할 거야.”
매각 흥행여부는 시장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호황기에는 프리미엄을 붙여서라도 사려고 하고, 불황기 때는 싼값에 내놔도 잘 안 사간다.
체감이 잘 안 되긴 하지만, 최근 세계경제는 호황기에 진입했다.
중간에 브렉시트나, 로날드 당선(?) 같은 충격적인 일들이 몇 가지 있긴 했지만, 성장세를 꺾을 정도는 아니다.
신산업의 등장으로 신생기업들이 끝없이 탄생했고, 글로벌 대기업들의 매출과 이익은 증가세를 그렸다.
이러한 호황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는 곳은 당연 금융계다. 주가가 오르고, IPO가 이어지며, 금융회사들은 막대한 수익을 내는 중이다.
덕분에 금융권에서는 작년부터 돈 잔치가 이어졌다. JP모건, 무디스, 모건스탠리, 씨티그룹, 도이체방크, 로스차일드, 맥쿼리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금융회사의 CEO들은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으로 수천만 달러의 연봉을 챙겼다.
시중에는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유동자금이 넘쳐났다. 이 유동자금 중 일부는 높은 수익을 쫓아 사모펀드로 흘러들어갔다.
“지금 웬만한 사모펀드들은 블라인드펀드(Blind Fund)를 통해 자금을 꽉꽉 채워놨을걸.”
택규가 물었다.
“블라인드펀드가 뭐야?”
“투자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일단 자금부터 끌어 모으는 거.”
한마디로 어디에 투자할지에 대한 판단을 오로지 경영진에게 맡기는 것이다.
투자를 잘못하면 큰 손실을 볼 수도 있는 만큼 웬만큼 유명한 사모펀드가 아니면 엄두도 못내는 방식이다.
“선배 생각은 어때요? 어디가 제일 가능성이 높을까요?”
“아무래도 은성차가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 칸라인그룹과 RCK브로스도 눈여겨 볼만할 거야. 칸라인그룹은 아예 한국대표까지 갈아치우며 전열을 재정비했던데.”
이 정도면 어느 쪽이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정말이지 별들의 전쟁이구나.
왠지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어차피 실패해도 상관없기도 하고.
난 본론을 꺼냈다.
“OTK컴퍼니도 인수전에 참가해 보려구요.”
“뭐?”
내 말에 상엽 선배와 기홍 선배는 깜짝 놀랐다.
“진심이야?”
“예. 보안회사도 하나 있으면 좋잖아요.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른 기업에 위탁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고.”
기홍 선배가 말했다.
“앞으로 보안 분야가 성장할까?”
“보안 분야가 성장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성장할 건 확실하죠.”
지분을 보유한 기업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보안에 대한 수요 역시 계속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여러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도 가능하다.
잠시 생각하던, 상엽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만 적절하다면 괜찮겠지. 하지만 쟁쟁한 후보들이 너무 많아. 잘못하다가는 인수가가 터무니없이 높아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다 싶으면 발 뺄 거니까.”
“실사랑 입찰은 어떻게 하게? 우리는 그쪽 전문가가 없잖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뒀다.
난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골든게이트와 컨소시엄을 구성할 거예요.”
* * *
다음날.
나는 택규와 헨리와 함께 현주 누나와 엘리를 만나 컨소시엄 구성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건을 확정지었다.
지분은 7대3. 인수에 성공하면 OTK컴퍼니는 인수자금의 80퍼센트를 골든게이트에 선순위 대출받는 게 조건이다.
OTK컴퍼니의 가치를 생각하면 선순위 대출이 떼일 염려는 없다고 봐도 좋다. 대출해주는 쪽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인수가 성사됐을 때 얘기. 실패하면 실사에 들어가는 비용만 날리고 끝나게 되겠지.
* * *
OTK컴퍼니가 골든게이트와 함께 엑스캅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재계와 금융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엑스캅을 계열사로 편입하려는 건가?
하지만 강진후와 은성차의 악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은성차 물 먹이기 위한 건가?
중요한 건 OTK컴퍼니가 이제까지 거의 모든 투자를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에 참가 업체들이 일제히 술렁이는 가운데, 예비입찰 날짜가 다가왔다.